바츨라프 스밀 지음┃이한음 옮김┃웅진지식하우스
자연에선 빠름보다 최적 속도
산업혁명 시기 처리속도 비약
환경오염·사고위험·스트레스
막대한 혜택뒤 심각한 부작용
문명사학자 저자의 시선으로
지구 탄생부터 속도역사 살펴
“무한가속 환상 비현실” 일축
게티이미지뱅크
속도는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원리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멀리 이동하고, 더 빨리 소통하기 위해 인류는 무작정, 무한정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 속도가 더 나은 삶을 보장하고, 더 나은 세상을 가져오리라 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는 100년 전만 해도 매우 낯선 생각이었다. 세계적 문명사학자인 바츨라프 스밀의 ‘질주하는 세계’에 따르면 예수도, 키케로도, 아퀴나스도, 맬서스도, 다윈도 속도를 말하지 않았다. 속도 숭배는 지극히 현대적인 현상이다.
이 책에서 스밀은 속도를 중심으로 지구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사의 큰 그림을 펼치면서, 현대인의 속도 중독에 경고를 보낸다. 지각 변동, 침식 작용 같은 지질학적 속도는 매우 느리고, 생물학적 진화는 환경에 맞춰 최적 속도를 추구한다. 빠른 치타도, 느린 거북도 모두 제 속도를 좇아서 살아간다. 자연에선 빠름만이 정답은 아니다. ‘더 빨리’를 외치며 사는 인류 역시 산업혁명 전엔 속도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과 가축의 근육, 물이나 바람의 힘에 제약됐기 때문이다. 1812년 나폴레옹 군의 러시아 진군은 그 예이다. 프랑스군은 초당 세 발씩 포탄을 쏠 수 있었지만, 행군은 보급품을 끄는 소의 속도(시속 1.5㎞)에 의존했다. 그사이 겨울이 왔고, 프랑스군 42만 명 중 1만 명만이 귀국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은 인류의 속도를 바꿨다. 증기기관, 철도, 전신, 내연기관, 전기모터 등 가속 장치가 등장하면서 생산성, 운송, 통신 등 사회 전체 속도가 비약했다. 로마 농민이 밀 1㎏을 생산하는 시간은 약 25분이었으나, 트랙터와 콤바인을 사용하는 현대 농민은 2∼3초밖에 안 걸린다. 그 덕택에 현대인은 속도와 진보를 동일시한다. 빠른 속도가 유아 사망률 감소, 기대수명 연장, 겨울철 난방, 대륙 간 여행 등 문명의 혜택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속도 증가는 공짜가 아니다. 인류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총이 빨라지면서 살상력이 늘었고, 자동차가 빨라지면서 사고 위험이 커졌으며, 금융 거래가 빨라지면서 시장 변동성이 커졌다. 정보 혁명은 즉각 자극과 실시간 소통에 근거한 소비문화를 가져왔다. 패스트푸드, 인스턴트 메시지, 영상 몰아 보기, 숏폼 콘텐츠 등 가속 문화는 인류의 인내를 약화하고 주의력 결핍을 가져왔다. 생산-소비-폐기 속도가 빨라지면서 지속가능성이 파괴되고 태평양의 거대한 플라스틱 쓰레기 섬과 같은 재앙을 낳았다.
그런데도 기업들은 속도 선호를 조장 중이다. 익일 항공 배송, 24시간 긴급 출동, 새벽 배송, 초고속 다운로드 등 속도의 독재를 퍼뜨리고 있다. 일론 머스크는 도시 간 로켓 이동, 초음속 스타트업 ‘붐’은 ‘100달러에 전 세계 4시간 이동’을 이야기한다. 레이 커즈와일은 기술이 무한 가속을 거듭해서 2045년 초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특이점’에 도달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실리콘밸리 특유의 과장법을 현실을 무시한 공상에 가깝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속도는 무한 가속될 수 없다. 물리적·경제적·환경적 제약 때문이다. 1957년 상용화한 보잉 707 이후 제트여객기의 순항 속도는 엔진 효율이 높아졌는데도, 음속 직전(마하 0.85 수준)에서 더 빨라지지 않았다. 자동차의 속도도 1930년대에 실질적으로 멈췄다. 어떤 나라도 안전 문제 탓에 무제한 속도를 허용치 않는 데다 도로 사정, 교통 체증이 가속을 막는다. 전용도로에서도 시속 120㎞ 이상 달리지 못하는 속도계 숫자가 300㎞ 이상 표시된 건 과시에 불과하다. 고속철도도 물리적 한계 등으로 상용 속도가 시속 450㎞ 이상을 넘지 못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숱한 연구들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생산성 혁신과 가속적 진화가 끝나감을 보여 준다. 1960년대 말 이후 기계의 물리적 속도가 한계에 이르면서 선진국의 생산성 증가율은 둔화했고, 이후 성장은 속도보다 효율성, 안전, 비용, 신뢰성 혁신을 통해 이뤄졌다.
이 때문에 스밀은 “속도가 우리 미래를 좌우하도록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속도의 물리적·생물학적 한계와 환경적 비용을 직시하고, 가속 신화에서 벗어나 인간 복지와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속도를 지혜롭게 조절하자는 말이다. 이를 위해 그는 사회의 어떤 부분의 속도를 향상해야 인류 전체의 복지에 도움이 되는지를 묻는다.
세계 인구의 8분의 1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갈수록 불평등이 심해지며, 환경 파괴와 기후 재앙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런 문제들을 바로잡는 일은 기계적 가속보다 우선순위를 바꾸어 더 시급한 곳에 자원을 쓰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의료 검사 결과 대기 시간을 단축하는 게 극초음속 항공기를 개발하는 것보다 우리 삶에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저소득 국가의 도로, 학교, 보건의료, 상하수도, 식품 저장 체계 구축에 투자하는 게 화성 개척보다 인류 전체에 더 큰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428쪽, 2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