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왕의 인성과 사생활 - 세조 편(1)
세종-소헌왕후 슬하 아닌 부모와 떨어져 민간서 양육
외가 정치적 비극에 연이은 국상으로 궁궐 갈 기회 놓쳐
엄격한 왕실교육 벗어나 자유분방… 세상 어려움에 밝아
다섯 살에 효경 외울만큼 총명하고 역학·산학·기예 능해
학문보다 무술 좋아해 16세때 사슴 수십마리 잡기도
체격·인상 강렬해 무인·장수처럼 보이는 생김새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궁궐 밖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란 왕자, 이유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세조는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궁궐 밖에서 홀로 양육됐다. 그 때문에 세조는 어린 시절을 왕실의 엄격한 교육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활했다. 이와 관련해 실록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조는 어릴 때 민간(民間)에서 자랐으므로 모든 어려움과 사실과 거짓을 자세히 일찍부터 겪어 알고 있었으며 도량이 성숙했다.”
세조실록 총서에 나오는 이 기록처럼 세조는 어린 시절을 궁궐이 아닌 민간에서, 그것도 세종과 소헌왕후의 슬하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양육됐다. 그런 까닭에 세조는 소년 시절에 여느 왕자들과 달리 기생집도 자주 드나들었다. ‘오산설림’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었던 14세 때에 어느 기생집에서 자는데, 밤중에 기생과 관계하는 자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 세조가 놀라서 발로 뒷벽을 차서 벽이 넘어지자 곧 밖으로 나와 몇 길이나 되는 담을 뛰어넘었다. 그러자 그 사람 역시 뒤를 따라 넘으므로 세조는 또 이중의 성을 뛰어넘었더니, 그 사람 역시 뛰어넘었다.”
세조가 일 리쯤 가다가 길가에 속이 텅 빈 늙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어 속에 숨었더니 그 사람이 따라오다가 찾지 못하고 투덜거리면서 가버렸다.
이렇듯 세조가 자유분방하게 소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궁궐 밖에서 양육됐기 때문이다. 세조 외에 다른 형제는 모두 부모 슬하에서 궁궐 생활을 했는데, 왜 세조만 민간에서 홀로 떨어져 양육돼야만 했을까.
그 내막을 살펴보면 이렇다.
세조의 이름은 유이며, 세종의 둘째 아들이다. 세종 부부가 둘째 아들 유를 낳은 것은 1417년 9월 29일이었다. 당시 세종의 나이는 21세, 소헌왕후는 23세였고, 세종은 아직 왕위에 오르기 11개월 전이었다. 유가 태어난 곳은 당시 충녕대군의 사저였는데, 출생 직후부터 유는 어머니 심 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심 씨는 유를 출산한 지 불과 석 달도 되지 못해 다시 아이를 임신해 유를 돌볼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유는 세종 부부와 함께 궁궐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세종은 1418년 6월에 양녕이 쫓겨난 세자 자리에 올랐는데, 이때 세자빈이 된 심 씨가 이미 임신 7개월이었고, 궁궐 분위기도 어수선해 유를 대궐 밖에 두고 입궁한 까닭이다. 그리고 세종은 두 달 후인 8월 11일에 태종의 선위로 즉위했다.
이후, 세종 부부는 여러 차례 유를 궁궐로 데려오려 했으나 번번이 일이 생겨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한 달 뒤에 소헌왕후는 해산해 안평대군 이용을 낳았고, 그로부터 두 달 뒤에는 소헌왕후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이로 인해 이유를 궁궐로 데려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소헌왕후는 그 와중에 또 임신해 임영대군 이구를 낳았고, 그 뒤로는 정종과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태종 등의 국상을 연속으로 치러야 했다.
세 번의 국상이 끝난 뒤에 이유를 궁궐로 데려오려 했으나, 또다시 임신해 광평대군 이여를 낳았고, 그러는 사이 둘째 아들 이유는 어느덧 열두 살이 돼 어린 나이에 장가를 들어 분가했다. 이 때문에 이유는 어린 시절을 부모 슬하에서 지내지도 못했고, 형과 동생들과도 함께 지내지도 못했다. 이렇듯 이유는 왕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궁궐 생활을 거의 하지 못한 채 궁 밖에서 홀로 자유분방하게 성장했던 것이다.
# 유학보다 무예와 잡학에 능한 왕자
왕자 이유는 머리도 좋고 체력도 뛰어났다. 다섯 살에 ‘효경’을 외워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으나 학문보다는 무술을 더 좋아했다.
이에 대해 실록은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문학과 활쏘기와 말타기가 고금에 뛰어났으며, 역학·산학·음률 ·의술·점(卜)·기예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묘(妙)를 다했다.”
그는 외모가 특이하고 궁술과 승마에 뛰어났는데, 이에 대해 ‘동각잡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세조는 얼굴이 괴기하고 활쏘기와 말 달리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나이 16세에 세종을 따라 왕방산에서 강무할 때, 하루 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십 마리를 쏘아서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었다.”
이렇듯 세조는 무술에 능했을 뿐 아니라 생김새가 특이했던 모양이다. 얼굴이 “괴기(怪奇)”하다고 했는데, 이는 ‘특별히 크고 기이하다’는 뜻이다. 대개 왕의 얼굴에 대해서는 용의 형상이나 호랑이 형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괴기하다고 표현했다는 것은 가히 매끈하게 생기거나 평범한 얼굴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세조는 용맹도 남달랐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 ‘동각잡기’에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세종이 규표(圭表, 방위·절기·시각을 측정하던 천문 관측기기)를 바로잡을 때, 세조와 안평대군 및 다른 유신에게 명해 삼각산 보현봉에 올라서 해가 지는 곳을 관측하게 했다. 돌길이 위험하고 또 불측한 벼랑이 내려다보였으므로 안평대군 이하의 모든 사람이 모두 눈이 어지럽고 다리가 떨려서 전진하지 못했으나, 세조만은 유난히 걸음이 나는 듯해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보는 자가 모두 탄복해 따를 수 없다고 했다.”
세조는 용맹뿐 아니라 몸도 매우 재빨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몸도 다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흡사 외모로는 무인이나 장수처럼 보였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동각잡기’의 다음 이야기는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계유년에 세조가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더니 길에서 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대장군이라고 여겼다. 북경 대궐문 밖에 서 있던 코끼리 여덟 마리가 그를 보고 나선 일시에 물러나 움츠리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조는 누가 봐도 무인으로 여길 정도로 외형이 단단하고 골격이 튼튼해 보였던 것이다. 또한 풍기는 인상도 강했던 모양이다. 코끼리가 물러가 움츠렸다는 것은 세조의 강한 인상과 기상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
■ 용어설명
오산설림(五山說林): 조선 중기의 문필가 차천로(車天輅·1556∼1615년)가 지은 야사집이다. 차천로는 서경덕의 제자인데, 문장이 매우 뛰어나 중국과 일본에까지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로 발송되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작성했는데, 그 문장이 매우 수려하여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시대 문신 이정형(李廷馨·1549∼1607년)이 고려후기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의 정치와 명신들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서다. 이정형은 명종, 선조, 광해군 대에 활동했던 인물로 성리학에 밝았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성력(星曆)·복서(卜筮)·술수(術數)에도 통달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