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대장균 감염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17개월 영아. 출처=페이스북, 뉴욕포스트 [파이낸셜뉴스] 아이의 변비를 고치려 비살균 원유(생유·raw milk)를 먹였다가 17개월 아기가 대장균에 감염돼 세 차례 심정지를 겪고 신장 기능이 망가진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자연 친화적 식단을 맹신해 비살균 유제품을 섭취하는 것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고 강력히 경고하고 나섰다.
2일 뉴욕포스트, 프로퍼블리카 등 외신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에밀리 매리스 씨의 17개월 된 딸 브루클린은 차 뒷좌석에서 노란색과 청록색 담즙을 토해내며 응급실로 긴급 이송됐다.
병원 도착 당시 브루클린의 상태는 위중했다. 급성 신부전 증상과 함께 인공호흡기와 혈액투석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입원 기간 동안 세 차례나 심정지가 발생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다.
의료진의 진단 결과는 치명적인 변종 대장균(E. coli) 감염이었다. 이 균은 혈관 내벽을 손상시켜 혈전을 만들고 주요 장기를 망가뜨리는 '용혈성 요독 증후군(일명 햄버거병)'을 유발했다. 수일간의 투석 치료 끝에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브루클린은 걸음걸이가 불편해졌고 평생 신장 질환 위험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오염된 육류뿐 아니라 비살균 생우유, 오염된 채소, 지하수를 통해서도 감염
햄버거병은 장출혈성 대장균이 분비하는 '시가 독소(Shiga toxin)'가 혈관 내벽을 손상시키면서 시작된다. 손상된 미세혈관에 혈소판이 엉겨 붙어 미세 혈전(피떡)이 생성되고, 이 과정에서 적혈구가 깨지는 '용혈 현상'이 발생한다. 이렇게 파괴된 혈구 찌꺼기와 혈전이 체내 노폐물을 걸러내는 신장 모세혈관을 막아버리면서 급성 신부전과 요독증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질환이다.
과거 덜 익은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를 먹고 집단 발병해 '햄버거병'이라는 별칭이 붙었으나, 실제로는 오염된 육류뿐 아니라 멸균되지 않은 생우유, 오염된 채소나 지하수를 통해서도 흔히 감염된다.
특히 5세 미만 영유아는 면역 체계와 신장 발달이 미숙해 햄버거병의 가장 취약한 고리로 꼽힌다. 초기에는 단순 장염처럼 복통, 설사, 구토, 혈변으로 시작하지만, 며칠 만에 신장 기능이 급격히 저하되면서 소변량이 줄고 빈혈, 황달, 전신 부종이 나타난다. 심할 경우 뇌혈관 손상으로 인한 경련, 혼수, 심정지 등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이어지며, 완치되더라도 상당수가 만성 신부전이나 고혈압 등 영구적인 후유증을 앓는다.
브루클린 역시 수일간의 투석 치료 끝에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다리를 절뚝거리게 됐고 평생 신장 질환 위험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면역 체계 완성되지 않은 영유아나 노약자, 임산부에 치명적
감염원은 엄마가 아이에게 약 6개월간 먹여온 '살균하지 않은 생 산양유'였다. 미숙아로 태어난 딸을 위해 친환경·무가공 식품을 고집하던 에밀리 씨는 시판 분유의 첨가물과 일반 우유로 인한 아이의 변비를 우려했다. 그러던 중 맘카페 등 SNS 커뮤니티에서 "살균하지 않은 생 산양유가 장 건강에 탁월하다"는 추천을 받고 인근 농장에서 갓 짠 원유를 직접 구매해 먹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원초적 자연식품' 열풍이 불며 살균 공정을 거치지 않은 원유를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지만, 의학계는 이를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위험한 미신"이라고 일축한다. 비살균 원유가 영양가가 더 높다거나 장내 유익균을 늘려준다는 주장은 입증된 바 없다는 설명이다.
미국 감염병학회(IDSA) 전문의들은 100여 년 전 저온 살균법(파스퇴라이제이션)이 도입되기 전 수많은 영유아가 비살균 우유로 인한 감염병으로 사망했다고 지적한다. 살균되지 않은 생유는 일반 살균 우유에 비해 식중독을 일으킬 확률이 100배가량 높다. 아무리 건강한 가축에서 짠 우유라도 착유 과정에서 가축의 분변, 유두, 농부의 손 등에 존재하는 병원균에 오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시중 생유의 최대 3분의 1에서 병원균이 검출된다.
비살균 유제품 속에는 대장균뿐 아니라 캄필로박터, 살모넬라, 리스테리아,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등 치명적인 균이 번식할 수 있다. 특히 면역 체계가 완성되지 않은 영유아나 노약자, 임산부에게는 패혈증이나 영구적 장기 손상,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에밀리 씨는 "내가 무지해서 아이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릴 것"이라며 다른 부모들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한편 브루클린이 원유를 구매한 농장은 해당 제품을 '반려동물 사료용'으로 허가받아 우회 판매한 혐의 등으로 피해 가족들로부터 소송을 당해 법적 공방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