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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귀 찬 배우, 일곱 살이 된 할머니…무대가 다시 쓰는 ‘노년’

요약
  • 한국이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운데, 올해 서울 무대에서는 노년을 연민의 대상이 아닌 삶의 주체로 다룬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 치매와 돌봄, 꿈, 사회적 혐오 등 노년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이러한 서사는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진화하고 있다.
치매·돌봄부터 꿈·혐오까지… 올해 서울 무대 '노년 서사' 잇따라
65세 이상 인구 1000만 시대, 무대가 묻는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
연민 대상에서 삶의 주체로… 진화하는 무대 위 노년 서사
[데일리안 = 박정선 기자] 치매가 시작된 70대 노인이 ‘영혼의 물고기’가 건넨 코딱지(극중 커딱쥐)를 먹고 일곱 살 아이가 된다. 오는 16일 서울 한남동 더줌아트센터에서 재연의 막을 올리는 창작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의 한 장면이다. 올해 무대에는 노년을 다룬 작품이 잇따랐다. 장르도 이야기도 제각각이지만, 이들은 늙음이라는 같은 질문에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는다.

한국은 2024년 말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어서며 초고령사회에 들어섰다. 그로부터 2년 가까이 지난 지금, 무대 위 노인의 자리도 달라졌다. 과거 연민의 대상이거나 돌봄을 받기만 하던 노인이, 이제는 고유한 자기 세계를 지닌 주체로 무대 한가운데 선다. 출발점은 같지만, 그 주체가 마주한 현실을 그리는 방식은 판타지부터 블랙코미디, SF까지 갈린다.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극단 오징어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극단 오징어무대는 치매를 바깥의 시선이 아니라 당사자의 내면에서부터 바라본다.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11월 15일까지 더줌아트센터)는 치매가 시작된 고춘자와 그 가족의 이야기다. 치매 노인이 겪는 환각과 인지 저하를 ‘이상한 나라’의 모험으로 옮겼다. 가족의 시선에만 머물지 않고 춘자씨가 경험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 서로 어긋난 세계를 바로잡는 대신 그대로 함께 사는 법을 모색한다.

창단 50주년을 맞은 극단76이 지난 6~7월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올린 ‘리어의 역’은 30년간 리어왕을 연기한 노배우가 치매로 무대를 떠난 이후를 그린 메타극이다. 자기 이름을 딴 극장 아래 공간에 머무는 배우를 통해 과거와 현재, 현실과 연극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비춘다.

노년을 쇠락의 과정이 아니라 여전히 무언가를 열망하는 ‘진행형의 삶’으로 그린 작품도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연초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에서 공연한 연극 ‘노인의 꿈’은 자기 영정사진을 직접 그리겠다며 미술학원을 찾아온 할머니 춘애의 서사를 담는다.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노년을 그렸다.

연극 '노인의 꿈' ⓒ수컴퍼니 연극 '노인의 꿈' ⓒ수컴퍼니대학로 예스24아트원 3관에서 공연 중인 연극 ‘나와 할아버지’(11월 29일까지)는 여든을 앞둔 할아버지가 손자와 함께 전쟁통에 헤어진 옛사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지난 5~6월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한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팔순에 한글을 깨친 경북 칠곡 할머니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문해학교 할머니들이 직접 쓴 시를 넘버로 만들어 노년의 배움과 삶의 기쁨을 전한다. 12월 안산·과천 공연과 11월 런던 쇼케이스를 앞두고 있다.

반면, 늙음을 밀어내는 사회의 태도를 날카롭게 묻는 작품들도 있다. 지난 8~9월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공연한 극단 신세계의 ‘노인박멸’은 성인용 기저귀를 찬 배우 13명이 선 무대에서 시작한다. 한 배우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80대 노인임을 선언하면, 중년 역의 배우들도 차례로 얼굴을 하얗게 칠한다.

극은 팔순을 앞둔 택시기사 정복이 인지증을 겪고 가족의 돌봄과 요양원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간다. 가족은 아버지를 걱정해 결정을 내리지만, 그 결정이 쌓일수록 정복 자신의 목소리는 뒤로 밀려난다. 비정한 가족이 아니라 평범한 가족의 선의 속에서 노인의 자리가 사라지는 구조를 비춘다. 김수정 연출은 우리 사회가 노인을 사람이 아닌 존재, 곧 ‘NO人’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자고 말한다.

연극 '노인박멸' ⓒ극단 신세계 연극 '노인박멸' ⓒ극단 신세계지난달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한 극단 사개탐사의 SF극 ‘늙지 않는 마음’은 노화의 속도마저 돈으로 결정되는 근미래를 그린다. 노화를 늦추는 센터 비용을 대려고 두 청년이 번갈아 돈을 버는 사이, 같은 시간을 산 두 사람의 나이가 수십 년 벌어진다. 늙음이 경제적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임을 꼬집는다.

노년을 연기하는 이들이 실제 노년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연초 ‘노인의 꿈’과 ‘더 드레서’ ‘불란서 금고’에는 평균 나이 82세의 원로배우 7명이 출연했다. 무대 밖에서도 노년 당사자가 직접 무대에 서는 일이 늘고 있다. 서울 송파구에서는 지난달 치매 고위험군 어르신 13명이 20주간 연습한 회상극을 구청 대강당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과거 무대 위 노년층이 주로 가족애를 자극하는 희생양이나 신파의 소재로 소비됐다면, 이제는 고유한 욕망과 서사를 가진 주체로 진화하고 있다”며 “이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한국 사회가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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