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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머니가 부른 '육영수 여사 피격'…'암살자(들)'이 놓친 1970년대

요약
  • 1973년 오일쇼크 이후 한국은 중동 건설 현장에 수많은 노동자를 파견해 외화를 벌어들이며 경제 위기를 극복했다.
  • 반면 경제적 열세에 놓인 북한은 위기감을 느꼈고, 이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등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 최근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개봉하며 역사적 진실과 배후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 중동 리비아의 건설현장에 진출한 대우건설 직원들이 공사 현장에서 측량하는 모습. photo 조선일보 1980년대 중동 리비아의 건설현장에 진출한 대우건설 직원들이 공사 현장에서 측량하는 모습. photo 조선일보

한번은 늦은 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젊은 남성들이 들어와선 감기약을 찾았다. 증상을 듣곤 아세트아미노펜이 든 약을 권하면서, 복용하는 동안엔 술을 피하라고 덧붙였다. 말하고 나서야 사우디가 엄격한 금주 국가란 사실이 떠올랐다. 괜한 말을 했나 싶던 순간, 손님이 되물었다. "아, 나 5분 전에 맥주 마셨는데…." 역시 물어볼 건 물어봐야 한다. 본국에선 몰라도 여행지에선 작은 일탈을 즐기는 이들이 많잖은가. 지금이야 사우디 젊은이가 서울 한복판에서 맥주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지만, 반세기 전 건설노동자로 중동을 찾은 한국인에겐 그럴 여지도 없었다. 소설가 박완서는 단편 '여인들'(1977)에서 남편이 매달 '천 딸라'를 부쳐온 덕분에 가족들은 호사를 누리지만, 정작 남편이 사는 중동은 "돈 버는 것 외에는 술맛도 계집맛도 볼 수 없는 별유천지"로 묘사한다. 그럼에도 1970년대 내내 수많은 한국 남성이 바로 그 별유천지로 떠났다.

별유천지에서 흘린 피와 땀

계기는 1973년 석유파동이었다. 중동전쟁을 계기로 산유국이 석유를 무기화하면서 국제 유가는 몇 달 새 네 배로 뛰었다. 석유를 전량 수입하던 우리 경제엔 직격탄이었다. 이제민 연세대 명예교수가 '외환위기와 그 후의 한국 경제'에서 분석했듯, 3%대로 눌러 뒀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5.3%까지 뛰었다. 그 사이 산유국엔 오일머니가 쌓였다. 사막 위에 도로와 항만, 주택을 한꺼번에 지으려는 발주가 쏟아졌지만 건설 인력은 턱없이 모자랐다. 해외 일감을 찾던 우리 건설사들로선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의 고속도로 공사를 따낸 것을 시작으로 한국 건설사들이 앞다퉈 중동으로 향했다. 중동 수주액은 1973년 1억7400만달러에서 1978년 81억달러로 불어났다. 국내 기본급의 두세 배를 벌 수 있었고, 1~2년만 다녀오면 집 한 채를 산다는 말까지 돌았다. 나라엔 외화가, 개인에겐 목돈이 필요했으니 1975년 6000명 남짓이던 현지 근로자는 1978년 10만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그런데 만리타향으로 떠난 이들의 삶이 평온했을까.

해외건설협회가 1979년 창간한 근로자 잡지 '밀물'에 실린 한 수기를 보면 노동자들의 하루는 이랬다. 캠프 스피커에서 새마을노래가 울리면 서둘러 아침을 먹고 트럭에 올라탄다. 새벽 6시에 작업을 시작하면 오전 11시엔 기온이 섭씨 50도, 오후엔 53도까지 오른다. 작업을 마치면 어느덧 밤 11시다. 그제야 숙소에 누워 아내의 편지를 읽으며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다 까무룩 잠이 드는 생활을 술도 없이 버텨야 했다. 창간사는 "여러분의 피와 땀의 결정" 덕분에 "보다 풍요한 나와 내 나라 살림"을 이룩한다고 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가혹한 근로조건이었다.

참다못해 터진 일도 있었다. 1977년 3월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 현장에서 현대건설 기능공들이 들고일어났다. 관리자가 트럭을 느리게 몬 기능공의 얼굴을 때리자, '인간적 대우'를 해달라는 절규에 3000여명이 동참하며 농성을 시작한 거다. 그렇지만 사우디는 절대왕정(王政) 국가다. 무장 병력이 노동자들을 에워싸고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며 대치하자,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급히 중재에 나서야 했다.

이게 사막에서만 벌어진 일이었을까.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 파병으로 들어온 외화는 10억달러 규모로 추산된다. 1960~1970년대 서독으로 간 광부 7936명과 간호요원 1만1000여명은 탄광과 병동에서 번 돈을 고향으로 부쳤고, 정부는 서독에서 차관을 들여왔다. 전쟁터의 목숨값에 탄광·병동의 품삯, 사막의 땀이 한데 섞여 경제개발의 종잣돈이 된 거다.

1978년 해외건설협회가 중동 근로자를 위해 마련한 위문공연. photo 조선일보 1978년 해외건설협회가 중동 근로자를 위해 마련한 위문공연. photo 조선일보

따라잡히던 북한, 1974년의 총성

우리가 피와 땀으로 극복하던 경제 위기를 북한이라고 겪지 않았을까. 북한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서방에서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 기계와 공장 설비를 사들였다. 그러다 오일쇼크가 터지며 빚을 갚을 길이 요원해졌다. 통일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1976년 말 북한의 외채는 20억~24억달러로 추정된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전 파병으로 번 돈의 2배다. 반면 우리는 오일쇼크의 진원지인 중동에서 건설 수주까지 따냈으니, 격차는 곱절로 벌어졌다. 냉전사 연구자 오드 아르네 베스타는 '제국과 의로운 민족'에서 "북한의 통일 계획의 가장 큰 장애물은 1960년대 남한에서 시작된 경제 발전이었다"고 짚는다. 1970년 무렵이면 남한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거의 북한 수준까지 올라왔고, 1980년에는 두 배가 됐다고 추정한다.

경제적 우위에 군사력까지 자부하던 북한 지도부의 위기감이 부쩍 커질 시기다. 1968년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물론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습 사건도 이런 배경에서 봐야 제대로 보인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국립극장에서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쐈고, 빗맞은 총알에 육영수 여사가 숨졌다. 우리 수사 당국은 친북 단체인 조총련 오사카 지부 간부 김호룡이 문세광을 포섭했다고 결론 냈지만, 일본 경찰은 증거가 없다며 김호룡을 수사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가 도쿄 한복판에서 유력 야권 지도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납치해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지난 9월 23일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은 바로 그 빈틈을 파고든다.

영화는 빈틈 많은 수사 기록을 근거로 배후가 조총련이나 북한이 아닌 제3자, 어쩌면 긴급조치 발동을 위해 정권이 벌인 자작극일 가능성마저 암시한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을 비롯한 보수 세력이 반발하자, 제작진은 기록에 영화적 상상을 더해 여러 가설로 재구성했을 뿐 특정 인물을 배후로 규정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시민들까지 비판에 가세하자 400만 유튜버는 영화 소개 영상을 비공개했고, 단순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영화평을 낸 이동진 평론가도 결국 영상을 내렸다.

물론 영화적 상상은 존중받아야 한다. 역사가 비워 둔 대목을 상상으로 메우는 게 역사적 인물을 끝없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자, 창작물의 힘이지 않나. 흑막을 거대하게 그릴수록 이야기는 극적으로 변하겠지만, 그만큼 흐려지는 사실도 있다. 사막과 탄광, 전쟁터에서 피와 땀으로 번 외화로 국력을 키운 우리의 역사, 그리고 그 격차를 받아들이지 못한 북한이 극단적 도발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오일머니를 벌러 찾아가야 했던 사막의 부국(富國)에서 이젠 우리나라로 관광을 온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이다. 애써 그 비극을 뒤틀어 당시의 산업 역군들을 모욕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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