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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李 ‘대북 제재 무용론’ 비판...“제재·압박 놓아선 안돼”

요약
  •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고려대 심포지엄 기조연설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대북 제재 무용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 반 전 총장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과 대북 제재를 직접 연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제재와 압박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하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131회>]

“대북 제재 실효성 없다”고 한 李 대통령 겨냥
“핵·미사일 개발 중단과 대북 제재 연계 위험”
“제재 효과 분명해...北 인권도 정면으로 다뤄야”
潘측근 김숙, “제재 무용론 대통령이 할 얘기 아냐”
“더러운 평화론은 의지와 담력을 갉아먹는 독약”


지난달 29일 고려대학교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재단과 고대 통일융합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제4차 심포지엄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이재명 대통령 지난달 29일 고려대학교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재단과 고대 통일융합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제4차 심포지엄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이재명 대통령의 "별다른 실효성이 없는 (대북)제재와 추가 핵무기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 개발 중단을 맞바꾸는 것은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한 발언을 염두에 둔 듯,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 중단과 대북 제재를 직접 연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이하원 기자
지난달 29일 오후 고려대학교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재단과 고대 통일융합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제4차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주제는 ‘질서 이후의 질서-국제 안보의 재편과 한반도 평화’였습니다.

저는 이신화 통일융합연구원장의 초청으로 행사장을 찾았는데, 첫 번째 세션에 관심이 가 있었습니다. ‘지정학적 충돌의 연쇄화와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가 중동 전쟁의 복합화와 국제 질서 재편을, 박영준 국방대 국가안보문제연구소장이 연쇄 위기의 국제 질서와 한반도 평화의 조건을 발표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기조연설

김동원 고려대 총장의 환영사에 이어 반기문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의 기조연설이 시작됐습니다.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그의 연설을 듣고 있었는데, 한반도 문제로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반 전 총장이 이런 언급이 귀를 파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미북 대화가 다시 시작되는 상황이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목표는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CVID)여야 합니다.” 이어서 “미북 정상회담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전 개입과 관여는 필수적이고, 주한 미군 감축이나 철수, 한미연합 연습과 훈련의 폐지와 같은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일은 결코 의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순간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평소보다 강한 톤으로 한미 양국의 이재명,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발언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곧바로 메모를 시작했습니다.

반 전 총장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핵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어떠한 합의가 미국의 위협뿐 아니라 한국과 동북아 전체의 위협을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며 “따라서 저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과 대북 제재를 직접 연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지난달 29일 반기문재단-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의 심포지엄 기조연설 원고 일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과 대북 제재를 직접 연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등 주요 대목에 붉은 형광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지난달 29일 반기문재단-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의 심포지엄 기조연설 원고 일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과 대북 제재를 직접 연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등 주요 대목에 붉은 형광펜 표시가 돼 있다./이하원 기자
이 말을 듣는 순간 1주일 전 이재명 대통령이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별다른 실효성이 없는 제재와 추가 핵무기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 개발 중단을 맞바꾸는 것은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했는데, 이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재 상황에서 비핵화를 목표로 삼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라며 이 발언을 했습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일부 제재 완화를 주장한 적은 있지만 NYT 인터뷰처럼 제재 무용론을 주장하며 제재 해제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어서 다음 날인 22일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3단계 접근법을 제시하면서 최종 단계에서 ‘북한 비핵화’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핵 없는 한반도’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반 전 총장은 대북 제재를 핵·미사일 개발 중단과 직접 연계하는 것이 결국 “북한이 이미 개발한 60기 안팎의 핵무기를 용인하는 결과로 이어주고 이것은 북한의 ‘핵 보유국’ 주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제재 풀었다 다시 복원하기 불가능”

반 전 총장은 그동안 외교 현안에 대한 입장 표명을 비교적 자제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입장 표명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81차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뉴스1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81차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뉴스1
반 전 총장은 대북 제재가 효과 없다는 이 대통령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북 제재의 효과는 분명히 있다”며 “북한은 무역의 95%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역시 국제사회의 제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제재를 풀었다가 북한이 과거에도 그랬듯이 비핵화 과정에서 이탈했을 경우, 지금의 안보리 거버넌스를 볼 때 다시금 제재의 틀 속에 가두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도 했습니다. 현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구조와 국제 정세를 감안하면 북한을 다시 제재의 틀 안에 넣기가 거의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반 전 총장은 “우리는 북한의 핵 무력에 대한 제재와 압박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고 북한 인권 문제도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한반도 문제로 들어갈수록 단호해졌습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기조연설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이름을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발언의 시점과 내용을 생각하면 이 대통령이 1주일 전에 내놓은 북핵 정책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형광펜으로 동그라미, 밑줄 그어진 기조연설 원고

기조연설이 끝난 뒤 연단을 내려온 반 전 총장을 만나 “이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신 것 같다”고 확인하니 “최대한 약하게 했다”는 짧은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날 반 전 총장의 12쪽짜리 연설 원고를 보니 온통 형광색으로 동그라미, 밑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과 대북 제재를 직접 연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대목에도 붉은 형광펜으로 표시가 돼 있었습니다. 단어 하나 하나를 고르고, 수차례 연습 후에 작심하고 기조연설을 한 흔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이날 “질서 이후의 질서라는 표현이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며 “강대국 간 경쟁이 심화되더라도 국제법과 규범은 지켜져야 하고,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더라도 국제 협력의 공간은 유지되어야 하며, 한반도의 안보 환경이 변하더라도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통일 목표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도 했습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측근으로 반기문 재단 업무를 총괄하는 김숙 전 유엔대사의 지난 1일 문화일보 시평. 김 전 대사는 ‘李 대통령, 대북접근법 바꿔야 한다’는 이 칼럼에서 “북한이 의도적으로 제재를 폄하할 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측근으로 반기문 재단 업무를 총괄하는 김숙 전 유엔대사의 지난 1일 문화일보 시평. 김 전 대사는 ‘李 대통령, 대북접근법 바꿔야 한다’는 이 칼럼에서 “북한이 의도적으로 제재를 폄하할 순 있어도 (제재 해제는) 한국 대통령이 할 얘기는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김숙 전 대사는 이 대통령 실명 거론하며 비판

반 전 총장의 이 대통령을 향한 메시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일은 이틀 뒤에 있었습니다. 반 전 총장의 최측근으로 반기문 재단 업무를 총괄하는 김숙 전 주유엔대사가 지난 1일 문화일보 시평에서 아예 이 대통령의 이름을 거론하며 대북 접근법을 비판했습니다. 김 전 대사는 ‘李 대통령, 대북접근법 바꿔야 한다’는 칼럼에서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이 제재가 별 효과도 없다고 한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구체적으로 이같이 이 대통령의 대북 제재 무용론을 비판했습니다.

“여러 객관적 증거 외에도, 필자는 과거 제재의 고통에 대해 외부에 얘기 못 하는 솔직한 고백을 북한 최고위급 인사로부터 직접 들었던 경험이 있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제재를 폄하할 순 있어도 한국 대통령이 할 얘기는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북 제재와 추가 핵무기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능력을 맞바꾸자는 구상이다. 다행히 국제사회의 호응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일 추진된다면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사실상 묵인하고, 항시적 핵 위협에 노출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김숙 전 대사는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국가정보원 1차장으로 재직하면서 북핵 협상과 남북 간 접촉에 관여했습니다. 특히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과 이에 대응하는 5·24 조치가 있었던 2010년 국정원 1차장으로서 북한의 실세였던 류경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을 카운터파트로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남북관계 출구전략과 정상회담 문제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 전 대사는 이때 대북 제재가 북한에 어느 정도의 압박과 고통을 주는지를 직접 파악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 전 대사는 또 “이 대통령은 올해 8·15 경축사에 이어 9월 22일 유엔총회 연설에서도 ‘평화공존’을 반복했다”며 “중장기적 비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공감대 없는 공허한 구상을 중요한 계기에 거듭해서 언급하는 것은 현실성 없는 외교 낭비”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다는 낫다는 유약한 구호는 의지와 담력을 갉아먹는 독약”이라고 이 대통령의 ‘더러운 평화’론을 비판했습니다.

김 전 대사는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패배주의적 유화와 답답한 순진함 사이를 오갔던 이 대통령의 대북 접근법은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

매일 재단 사무실에서 현안 논의하는 두 사람

반기문 재단에서 반 전 총장과 김 전 대사의 방은 맞붙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매일 재단에 나와 국내외 현안을 분석, 논의하고 중요한 해외 출장은 함께 다닐 정도로 가까운 사이입니다. 이들은 이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더 이상 잘못된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판단하에 강하게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 전 총장이 이 대통령을 언급하지 않고 큰 틀에서 비판했다면, 김 전 대사는 이 대통령 실명을 거론해서 구체적으로 지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 전 총장을 잘 아는 전직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외교부 장관과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한 반 전 총장이 유엔 안보리가 채택한 대북 제재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 대통령 발언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해석했습니다. 다른 전직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반 전 총장은 이 대통령을 보좌하는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이 대통령의 제재 관련 발언을 사전에 제지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평소 우리 정부와 관련된 구체적인 현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자제해 온 반 전 총장이 대북 제재 문제에 이처럼 분명한 목소리를 낸 것은 이례적입니다. 유엔 사무총장 재임 시절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이끌었던 반 전 총장의 이번 공개 비판이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과 제재 무용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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