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월세 76만원→402만원…87세 노인 강제퇴거에 스페인 민심 폭발

요약
  • 스페인 전역에서 치솟는 임대료와 주택 부족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 고령 세입자의 강제 퇴거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으며, 정부의 세입자 보호 법안까지 의회에서 부결되면서 주거 문제가 정국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평균 임대료 10년 새 2배…마드리드 7만명 주거대책 촉구

월세 급등·주택 공급 부족…전국 50여개 도시 동시다발 시위

임대차 자동연장·취약계층 퇴거 제한 등 정부 대책 법안 부결
◆…주택난 대책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스페인 시민들. 사진=로이터통신 ◆…주택난 대책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스페인 시민들. 사진=로이터통신

스페인에서 치솟는 임대료와 주택 부족에 대한 불만이 대규모 거리 시위로 번졌다. 고령 세입자의 강제 퇴거 사건이 기폭제가 된 가운데 정부의 세입자 보호 법안까지 의회에서 좌절되면서 주거 문제가 페드로 산체스 총리 정부의 새로운 정치적 부담으로 떠올랐다.

3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BBC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스페인 전역 50여개 도시에서 주택난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수도 마드리드 집회에만 당국 추산 7만명, 주최 측 추산 최대 50만명이 거리로 나왔다. 마드리드 중심부 푸에르타델솔 광장에서는 약 2000명의 시민이 천막을 치고 7일째 노숙 농성을 이어갔다.

시위대는 임대료 인하와 강제퇴거 중단, 투기성 자금의 주택시장 유입 규제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까지 촉구했다. 청년 세입자들의 주거비 부담이 특히 큰 상황이다.

마드리드 시위에 참가한 사서 마르코스 사인스(26)는 AFP통신에 "최근 마드리드에서는 방 1개짜리 집의 월세가 1000유로(약 150만원)에 달하는 경우가 많다"며 "주거비 급등을 누군가 규제할 때까지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참가자인 난도 데 앙굴로(26)는 로이터에 "정치인들이 국민이 원하는 것에 맞춰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이 정당에 맞추길 바란다"고 비판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충돌도 발생했다. 남동부 도시 발렌시아에서는 시위대가 문화 복합시설인 '예술과학도시' 진입을 시도하자 경찰이 최루가스와 고무탄을 동원해 강제 해산에 나섰다. 마드리드에서는 시위대에 접근하려던 극우 단체 회원 3명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 87세 세입자 강제퇴거가 도화선

이번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달 23일 마드리드에서 발생한 87세 여성 마리카르멘 아바스칼의 강제 퇴거 사건이었다.

아바스칼은 부모가 1956년 임대차 계약을 맺은 아파트에서 약 70년을 거주해왔다. 그러나 2018년 해당 아파트를 매입한 부동산 투자회사는 부모 사망 후 이어진 계약 승계의 효력을 문제 삼으며 법적 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새 소유주는 기존 500유로(약 76만원)이던 월세를 2650유로(약 402만원)로 올리려 했다.

스페인 대법원은 지난 3월 소유주 측의 손을 들어줬고 결국 지난달 퇴거가 집행됐다

거동이 불편한 아바스칼이 들것에 실려 집 밖으로 나오는 모습과 이를 저지하려던 주민들을 경찰이 해산하는 장면이 TV로 방송되면서 여론의 분노가 확산했다. 이후 아바스칼은 병원에 입원했고, 소유주는 거센 여론의 압박 속에 낮은 임대료로 다시 거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바스칼의 사례는 급격히 치솟은 임대료와 부족한 주택 공급으로 세입자들의 주거 불안이 커진 스페인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스페인 부동산 정보업체 이데알리스타에 따르면 주택 공급 부족과 단기 관광 임대 증가가 맞물리면서 스페인의 평균 임대료는 최근 10년간 거의 두 배로 치솟았다. 일간지 엘파이스는 마드리드에서만 하루 평균 3건의 강제 퇴거가 집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 세입자 보호 법안 부결…정부도 해법 못 내놔

시위가 확산한 또 다른 배경에는 주거비 상승에 대한 불만뿐 아니라 정부의 정책 대응이 의회에서 좌절된 상황도 자리 잡았다.

산체스 총리가 이끄는 좌파 연립정부는 전날 의회에 세입자 보호를 강화하는 긴급 주택 대책을 제출했지만 부결됐다. 법안에는 2028년까지 임대차 계약 자동 연장, 단기 임대 규제 강화, 투기성 투자펀드의 주택시장 투자 제한, 취약계층 세입자의 퇴거 제한 등의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카탈루냐 분리주의 성향 정당인 준츠 등 야권이 "과도한 규제가 임대주택 공급을 오히려 위축시켜 가격 상승을 부추길 것"이라며 반대표를 던져 최종 부결됐다. 협조적이었던 분리주의 정당들마저 지지를 철회하면서 법안 처리에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세입자연합은 정부 대책이 좌절된 만큼 거리 투쟁을 이어간다는 입장이다. 발레리아 라쿠 세입자연합 대변인은 노동조합 등 다른 단체들과 총파업 일정을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각종 비리 의혹과 세우타 월경 사건 등으로 정치적 압박을 받아온 산체스 총리에게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주거권 이슈를 전면에 내세워 부패 스캔들에 쏠린 유권자의 관심을 돌리고, 법안 부결의 책임을 야권에 돌리면서 좌파 지지층을 다시 결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오리올 바르토메우스 바르셀로나자치대 정치학 교수는 "주거 문제는 정치적으로 부패 이슈보다 정국을 주도하기에 훨씬 유리한 프레임"이라고 꼬집었다.
그냥 목록으로
원문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