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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 과학도 처음엔 금기였다…지금, 한국의 금기는 무엇인가

요약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바탕으로 사상과 언론의 자유의 중요성을 고찰하고, 과거 소크라테스와 기독교 박해 등 역사적 금기와 이견 탄압의 사례를 통해 현대 사회의 억압과 표현의 자유 문제를 되돌아보는 기사이다.

[오정환의 시대통찰] 금지된 것과 이를 어긴 이들의 역사

● “정부든 대중이든 의견 발표를 막아선 안 돼”
● 목숨으로 신념 지켰던 기독교가 이견을 탄압
● 과학도 금기를 깬 선구자들의 희생으로 발전
● 표현의 자유 외치던 이들이 권력 잡자 벌어진 일
● 대한민국의 금기와 이에 맞서는 이들의 역할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맨 왼쪽)가 기원전 399년, 감옥에서 슬퍼하는 친구들과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독이 든 잔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묘사한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1787년 작품. Gett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맨 왼쪽)가 기원전 399년, 감옥에서 슬퍼하는 친구들과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독이 든 잔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묘사한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1787년 작품. Gettyimage
두 세기 전 정치철학서 내용이 우리의 현실을 꿰뚫는 듯 예리하게 다가온다.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닌 듯하다. 근대 이후 정치사를 통해 우리가 이뤄놓은 발전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축적한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의견 발표 막는 강제, 누가 하든 부당하다”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자유주의 이념의 기초를 세운 고전으로 꼽힌다. 1859년 출판된 이 책에서 밀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개인의 사상, 표현, 삶의 방식에 사회나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다.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획일화의 압박’을 경계한 것이다.

제2장 ‘사상과 언론의 자유’ 첫 문단에서 밀은 “입법부, 행정부가 대중에게 의견을 지시하고 어떤 논의를 청취해도 되는지 결정하는 체제에 반대하는 노력이 이제는 필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라고 썼다. 절대군주제를 무너뜨려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고, 산업혁명을 통해 사상 초유의 번영을 누리며, 자본가 노동자 계층의 대타협을 이루었던 영국 전성기의 정신적 여유를 보여준다. 어떤 논의는 듣는 것조차 허용할 수 없다며 입법부, 행정부가 금지하는 나라의 국민이 들으면 부럽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밀은 ‘자유론’에서 의견 발표를 통제하려는 강제력은 정부에 의한 것이든 대중에 의한 것이든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강제력이 공공 여론에 반대해서 행사될 때보다 그것에 편승해 행사될 때 더 유해하다고 봤다. “전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오직 한 사람만 반대 의견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한 사람이 권력으로 전 인류를 침묵시키는 게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그 한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도 부당하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가 성숙한 사회의 표징이라고 믿었다. Gettyimage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가 성숙한 사회의 표징이라고 믿었다. Gettyimage
누구도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의견이 아무리 강력하고 국가와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해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못하게 방해한다면 그는 ‘무오류성’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두 개의 대립하는 근거 사이의 균형에 의존한다. 심지어 자연철학에서도 동일한 사실에 대한 상이한 설명이 항상 가능하다.” 밀의 논지다. 밀은 뉴턴의 이론조차 의문을 허용했기 때문에 인류가 그것이 진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뉴턴의 운동법칙을 흔들기 훨씬 전에 그에 대한 의문을 허용해야 한다고 본 밀의 예지가 놀랍다.

오류는 경험과 토론을 통해 교정될 수 있다. 여기에도 주의점이 있다. “토론에서 저질러질 수 있는 가장 사악한 공격은, 반대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을 악하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일이다.” 주로 소수자나 권력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이 희생자다. “이 규범을 준수하는 많은 토론자가 있고, 더 많은 사람이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밀이 제2장을 끝맺은 문장이다. 이 역시 우리 현실에 비추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도시의 신을 의심한 죄로 사형당한 소크라테스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법의 힘으로 최고 지성의 이견마저 금지했던 예로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를 들었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신성모독’과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올림포스의 신들도 인간처럼 질투하고 복수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신은 도덕적으로 완벽하며 오직 선만을 행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아테네 시민들이 사제를 통해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반면, 그는 우리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젊은이들에게 지도자와 전통, 신에 대한 통념 등 기존 권위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라고 가르쳤다.

기소된 소크라테스는 목숨을 애걸하지 않았다. 배심원단 1차 투표에서 가까스로 유죄 평결이 나왔다. 당시 아테네 재판은 유죄가 결정되면 원고와 피고가 제시한 형량 가운데 하나를 배심원단이 선택했다. 그가 사과하고 적당한 형량을 제시했으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본인이 옳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도시의 신을 의심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순순히 독이 든 잔을 마시고 죽음에 이르렀다.

국가에 의한 종교적 신념 탄압의 대표적 예가 로마시대 기독교 박해다. 서기 64년 네로 황제부터 시작해 약 250년 동안 로마의 지배자들은 끊임없이 기독교인을 색출해 처벌했다. 그 수가 많게는 수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로마는 다른 종교에 지극히 관대했다. 피정복민의 신을 제국의 신전에 모실 정도였다. 다만 전통 신들과 황제에 대한 숭배는 종교를 넘어 시민의 의무이자 충성의 표시로 여겼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국가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다.

16세기 초, 종교개혁 시기 목숨을 걸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던 윌리엄 틴들은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체포돼 종교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Gettyimage 16세기 초, 종교개혁 시기 목숨을 걸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던 윌리엄 틴들은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체포돼 종교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Gettyimage
로마에서 순교했던 기독교가 성경 번역을 탄압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것보다 사회질서에 복종하도록 만들고 싶어 했다. 요구는 간단했다. 로마 신상 앞에 향을 피우거나, “황제는 주님이시다(Dominus Caesar)!”라고 외치면 됐다. 그런데도 수많은 기독교인이 이를 거부하고 화형당하거나 맹수에게 희생됐다.

이들의 굳건한 신앙심은 로마 대중에 깊은 감동과 존경심을 일으켰다. 제국 말기의 혼돈 속에서 사람들은 평등과 내세 구원을 약속하는 기독교 교리에 희망을 걸게 됐다. 여기에 사회통합을 위해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던 황제들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기독교는 유럽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그리고 박해받는 피지배자의 종교에서 점점 지배자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라틴어 성경만 인정했다.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신부들뿐이었고, 일반인들은 신부를 통해서만 하느님의 언약을 접했다.

16세기 초 영국의 윌리엄 틴들이 여기에 도전했다. 틴들은 종교학자이자 8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학자였다. 그는 “쟁기질하는 소년이 성직자보다 성경을 더 잘 알게 만들겠다”면서 성경 번역을 선언했다. 성직자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틴들은 독일로 망명해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왕비와의 이혼을 반대한 탓에 영국의 헨리 8세와도 사이가 틀어졌고, 그가 보낸 스파이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체포돼 종교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틴들은 순교했지만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죽고 불과 3년 뒤 헨리 8세가 모든 영국 교회에 영어 성경을 비치하도록 허용했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도 영어 성경 보급에 힘썼다. 1611년 제임스 1세는 당대 역량을 총동원해 모든 종파가 수용할 수 있는 성경을 편찬했는데 그 역시 틴들의 번역을 기반으로 했다.

영국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을 반대하며 교황 외에 누구도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다 참수형을 당했다. Gettyimage  영국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을 반대하며 교황 외에 누구도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다 참수형을 당했다. Gettyimage 
금기와 그에 대한 저항은 일방적이지 않다. 틴들이 영국에서 박해받을 때 토머스 모어는 엄격한 재판관으로서 개신교 탄압에 일익을 맡고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모어는 금욕적 생활과 공정한 재판, 빈자에 대해 배려로 런던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재상이 돼 헨리 8세의 친 가톨릭 정책을 보좌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카탈리나 왕비와의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절연하자 토머스 모어는 하루아침에 반역자가 됐다. 헨리 8세는 카탈리나가 낳은 메리 공주 대신 앤 불린의 자식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왕위계승법을 제정한 뒤 신하들에게 이를 지키겠다는 서약을 강요했다. 모어는 끝까지 거부하다 런던탑에 수감돼 15개월을 보낸 뒤 처형당했다.

1535년 사형대에 선 모어는 군중을 향해 “나는 왕의 충실한 종 이전에 하느님의 종으로 죽는다”고 외쳤다. 먼 훗날 모어는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됐고, 1980년 성공회에서도 성인으로 추대됐다. 종교갈등의 파고 속에 희생된 그가 400년 만에 화해의 상징으로 부활한 것이다.

금기의 철폐는 선구자의 희생을 요구한다우리가 지금 우주의 기원을 알고 각종 과학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데는 진리를 목숨과 맞바꾼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이 근세 초까지 이어진 지동설 탄압이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는 가톨릭 신부였다가 칼빈주의로 개종했지만 신·구교 모두의 배타성에 실망해 등을 돌렸다. 영국 옥스퍼드대 등에서 강의하면서 브루노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 그는 또 지동설을 넘어 “우주는 무한하며 수많은 태양계가 존재한다”며 후세에 강한 영감을 준 주장을 폈는데,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우주 무한론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8년간의 종교재판 끝에 화형을 당한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과학자 조르다노 브루노. Gettyimage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우주 무한론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8년간의 종교재판 끝에 화형을 당한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과학자 조르다노 브루노. Gettyimage
브루노는 종교재판에 회부돼 8년 동안 혹독한 심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처형된 로마 캄포데 피오레 광장에는 오늘날 동상과 함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브루노, 그가 예견했던 세기가 화형의 불길이 타올랐던 바로 이곳에.”

천문학뿐만이 아니다. 헝가리 의사 이그나즈 제멜바이스는 1840년대 의사들이 더러운 손으로 산모를 진료하면서 산욕열을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손을 소독하면 산모 사망률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의료계 주류는 질병이 ‘나쁜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고 믿고 있었고 제멜바이스를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했다. 점점 고립된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돼 폭행과 감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1930년대 소련 공산당은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식 학설을 지지했다. 그에 반대하는 과학자 수천 명이 ‘반동’으로 몰려 해고되고, 일부는 투옥되거나 처형당했다.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식물유전학 대가였는데 1940년 체포돼 감옥 안에서 굶어 죽었다. 미국에서 유전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솔로몬 레비트와 이스라일 아골은 미국 스파이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그 결과 검증되지 않은 학설이 농업에 적용되면서 대기근의 원인이 됐고, 20세기 중반 서구의 DNA 구조 발견, 교잡종 개발, 분자생물학 등 눈부시게 발전한 유전학에서 공산권 전체가 완전히 소외됐다. 스탈린 사후 소련도 1960년대부터 멘델 유전학을 복원했지만 과학과 농업 기반을 회복하는 데 수십 년의 시간과 막대한 자원을 소모해야 했다.

1884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갑신정변 주요 인물들. 앞줄 중앙이 박영효, 뒷줄 왼쪽에서 4번째가 유길준이다. 동아DB 1884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갑신정변 주요 인물들. 앞줄 중앙이 박영효, 뒷줄 왼쪽에서 4번째가 유길준이다. 동아DB
대한민국에 어둠처럼 내려앉은 ‘두 가지 금기’조선도 근대화를 통해 국권을 유지할 기회가 있었다. 1880년대 한반도 주변 열강이 균형을 이루고 일본과 러시아의 영토 야욕도 아직 본격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에는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군이 주둔하며 내정에 간섭했고, 민씨 정권은 체제를 온존한 채 일부 서양 문물을 도입하는 데 그쳤다.

개화파 청년들은 더는 견딜 수 없었다. 1884년 그들은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거사했다. 그러나 미숙한 정세 판단이 일을 그르쳤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상이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 10년 뒤 봉기한 동학군이 창의문에 “우리 성상(고종)은 어질고 자애하며 지혜가 있으니 요순의 덕화와 문경의 다스림을 가히 바랄 수 있다”라고 쓸 정도로 조선 백성들은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패한 혁명의 결과는 참혹했다. 갑신정변 주모자와 직계 가족들은 처형되거나 굶어 죽었다. 고종은 김옥균, 홍영식의 집터를 파 연못으로 만들었다. 민중도 그들을 역적으로 봤고, 박영효 복권 시도가 만민공동회의 붕괴 원인이 됐다. 그래도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이후 한민족의 근대화는 정확히 그들이 제시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남로당(남조선로동당)과의 유혈 투쟁을 거쳐 세워졌다. 건국 3년 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에서 200만 명 넘는 국민이 희생됐다. 공포의 기억 속에 우리는 수십 년간 레드콤플렉스에 갇혀 살았다. 그래서 시인 김수영은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라는 시를 숨어서 써야 했다.

민주화가 되고 김수영의 꿈은 이뤄졌다. 그러나 이 땅에 새로운 금기가 나타났다.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갈구하던 이들이 권력자가 되자 달라졌다. 그들도 국민이 입을 다물고 자신들의 뜻대로 생각하길 원하는 것 같다.

필자가 몇몇 언론사에 글을 싣기 시작할 때 누군가 조언했다. “다 써도 되지만 두 가지는 언급도 하지 마라.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 권력의 제지를 받거나 필화에 휘말리지 않았다. 갈등을 피하려던 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오늘 그 두려움을 이기고 금기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용기를 내 그들에게 깊은 존경과 성원을 보낸다. 금기에 맞섰던 이들로 인해 나의 자유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마저 하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까지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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