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서린동 SK그룹 사옥. 뉴스1 |
고려 태조 왕건이 통치 유훈으로 남긴 ‘훈요10조’ 중 제5조 내용이다. 후세 왕들이 수도 개경(개성)에만 머물지 말고 일정 기간 서경(평양)에 머물면서 지기(地氣)를 받으라는 내용이다. 이 글에서 사중은 12지 중 자(子)년, 오(午)년, 묘(卯)년, 유(酉)년을 의미한다. 즉 4년에 한 번은 100일 이상 서경에 머물라고 당부한 것이다.
고려 왕들의 순주(巡駐)에 담긴 뜻고려 15대 왕 숙종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고려 땅에는 3곳의 서울이 있다. 11~2월에는 중경(개성), 3~6월에는 남경(한양), 7~10월에는 서경(평양)에서 지내면 36개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는 도참(예언)을 받아들여 한양에 새로운 수도 남경을 건설했다.
고려 인종(16대), 의종(17대), 명종(18대) 등도 개성 안팎의 지기 좋은 터에 여러 궁궐을 짓고 옮겨 다니며 머물렀다. 이처럼 왕이 본디 궁궐을 벗어나 다른 곳을 돌아다니면서 일정 기간 머무는 것을 ‘순주’라고 한다. 이는 땅의 기운을 받아 왕조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순주는 풍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무리 빼어난 명당터라도 발복(發福)이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명당 발복을 받았다는 명문세족이나 부호가문이 영원히 계속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땅 기운, 즉 지기는 주기성을 갖고 있다. 시간의 규칙적 흐름에 따라 지기가 발현해 흥성하는 때가 있고, 반대로 쇠퇴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는 뜻이다. 이를 땅의 운, 즉 지운(地運)이라고 한다. 현대까지 이어진 여러 풍수학 유파 가운데 지운을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학파는 현공풍수다. 이 유파 이론에 의하면 지운은 20년마다 방위를 바꿔가며 이동해 모두 9차례에 걸쳐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의 주기는 180년(20년×9)이다. 이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23년까지 20년 동안 8운의 지운이 발동했고, 지금은 9운의 지운(2024~2043)이 발동하고 있다.
이 같은 지운의 주기성을 잘 활용하면 기업 경영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한 지역의 명당 기능이 쇠퇴해질 무렵, 지운이 왕성해지기 시작하는 다른 터에 사업장을 마련하면 기업의 안정적이고 확장적인 경영이 가능해질 수 있어서다. 이와 관련해 SK하이닉스의 행보가 주목된다. 최근 서울 강남 부동산업계에서는 SK그룹이 옛 르메르디앙 호텔 부지(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120)에 SK하이닉스 신사옥 건립을 추진한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SK하이닉스 ‘강남 시대’ 열까당초 SK그룹은 본사인 서울 종로구 서린빌딩에 SK하이닉스 서울 사무실과 영업 조직 등을 배치하는 방안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이천시에 본사를 두고 있는 SK하이닉스의 주요 사업 조직을 서린빌딩에 배치해 그룹 내 다른 회사들과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구상이었다. 그러다 최근 들어 인공지능(AI) 발전 흐름을 타고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메모리 반도체 분야가 그룹의 핵심 사업으로 떠오르면서 SK하이닉스만의 독립적인 서울 거점이 필요해졌다고 한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뉴스1 |
이를 풍수적으로 해석하면 서울 청계천변 SK그룹 본사(서린빌딩) 건물과 SK텔레콤 본사(SK T-타워) 터의 지기 도움을 받아 SK하이닉스가 성장세를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지운으로는 8운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다 2024년부터 시작된 지운 변화를 계기로 SK하이닉스 본사 이전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현재 유력하게 검토되는 옛 르메르디앙 호텔 부지는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 사옥이 모여 있는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일대와 약 1㎞ 떨어져 있다. 삼성타운보다 높은 지형에 위치한 이 호텔 부지는 새롭게 변화하는 9운의 지운에 최적화된 곳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곳에 SK하이닉스 사옥이 들어선다면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와 더불어 반도체 경쟁력에 한층 더 탄력이 붙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최근 대기업의 신사옥 이전이 부쩍 많아졌다. 오랜 기간 머물렀던 낡은 사무실을 벗어나 새롭게 단장한 둥지로 거점을 옮기는 기업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주된 이유는 조직을 정비하고 임직원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최첨단 오피스를 앞세워 뛰어난 인재를 유치하고, 글로벌 고객을 상대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다. 이때 지운이 달라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서울 중구 삼양라운드스퀘어 빌딩. 삼양식품 제공 |
그러다 올해 초 서울 중구 명동 신사옥(삼양라운드 스퀘어 빌딩)으로 본사 사무실을 옮겼다. 묘하게도 하월곡동 사옥의 지운이 쇠퇴하는 것과 맞물려 9운 지운이 형성되는 곳으로 사옥을 이전한 것이다. 명동은 김정수 삼양식품 회장이 불닭볶음면의 아이디어를 처음 구상한 역사적 장소라고 한다. 터의 인연은 이렇게 이어지는 모양이다.
이외에도 유진그룹, 쿠팡, 넷마블 등 국내 여러 굵직한 기업이 사옥을 이전했거나 옮길 예정인데 그 미래가 자못 궁금해진다. 이처럼 기업의 사옥 이전을 통해 기업 미래를 예측해보는 것도 풍수의 별미라고 할 것이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그룹 사옥. 뉴스1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뉴스1
서울 중구 삼양라운드스퀘어 빌딩. 삼양식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