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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나려 할수록 더 흔들린다…탈석유의 ‘역설’ [페트로-일렉트로]

요약
  • 선진국들이 에너지 전환을 위해 정제능력을 축소한 가운데 두 번의 전쟁으로 석유제품 공급난이 심화되는 '탈석유의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
  • 반면 정제능력을 유지·확대해 온 중국과 한국은 공급 충격을 흡수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 탈석유 흐름 속에서도 전환기 동안 화석연료의 안정적인 관리를 위한 '질서 있는 퇴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3줄 요약
*정제능력 줄인 선진국, ‘두 개의 전쟁’ 겹치며 석유제품 공급 충격 확대
*中·韓은 정제능력이 ‘방파제’…디젤·항공유 공급망서 존재감
*탈석유는 계속되지만, 전환기 맞아 화석연료 ‘질서 있는 퇴장’ 필요

미국과 이란,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개의 전쟁’이 계속해서 에너지 시장에 충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원유에 이어 휘발유와 경유(디젤), 항공유 같은 석유제품까지 공급난에 휩싸인 건데요. 그런데 에너지 전환 차원에서 이런 석유제품들을 생산하는 능력, 즉 정제능력이 축소되는 현상이 공급난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한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지금처럼 공급 차질이 발생했을 때 충격을 흡수할 여력이 작아지기 때문입니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과도기에 전쟁으로 인한 예상 밖의 위기와 만나면서 에너지 공급망에 대한 큰 타격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에너지 전환에 속도를 내 정제능력을 빨리 축소한 지역이 석유제품 공급 충격을 더 크게 받는 탈(脫)석유의 역설도 발생하고 있는데요. 석유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석유의 힘’은 오히려 더욱 세진 셈입니다.

3일(현지 시간) 이탈리아의 한 농촌 지역에서 농민들이 급등한 연료비에 반발해 트럭을 몰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3일(현지 시간) 이탈리아의 한 농촌 지역에서 농민들이 급등한 연료비에 반발해 트럭을 몰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수요는 느는데 정제능력은 줄었다
영국 에너지 연구기관인 에너지 인스티튜트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 동안 세계 정제능력은 연평균 0.6% 증가했습니다. 같은 기간 석유제품 소비량이 1% 증가한 것과 차이가 나는데요. 지난해 한 해만 놓고 보면 석유제품 소비는 1.3% 늘어난 데 반해 정제능력은 0.3% 감소했습니다. 수요는 늘었는데 이를 받쳐줄 수 있는 공급 여력은 작아졌다는 뜻입니다.

정제능력 축소는 특히 서구권 선진국에서 두드러집니다. OECD 국가들 기준으로 정제능력은 2015~2025년 동안 연평균 0.2% 역성장했는데요. 유럽 27개 국가가 속해 있는 유럽연합(EU, -0.7%)을 비롯해 호주(-6.9%), 일본(-1.8%), 미국(-0.1%)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처럼 취약해진 공급능력은 올해 2월 발발한 미·이란 전쟁과 만나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디젤과 항공유 가격이 급격히 뛰고, 올 6월 유럽 항공유 재고가 30일분 미만으로 낮아졌던 것 기억하실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충격, 우크라이나의 반격으로 정유설비에 큰 타격을 입은 러시아가 석유제품 수출 제한에 들어가면서 ‘병목’은 디젤로 옮겨 갔죠. 중동과 러시아산 디젤 공백으로 세계 최대 디젤 수출국인 미국산 디젤 수요가 급격히 커졌고, 이에 따라 미국 디젤 재고(올 9월 기준)가 1982년 이후 최저로 내려가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미국 정유소들이 97%에 달하는 가동률로 ‘풀가동’에 나서고 있는데도요. ‘디젤 수출을 막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엄포에 이달 2일(현지 시간) EU를 포함한 주요 7개국(G7)이 디젤과 원유 1억 배럴을 공동 방출하기로 한 배경입니다.

지난달 16일(현지 시간)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어부들이 디젤유 가격 급등에 어업 허용 일수를 줄인 정부 조치에 반발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달 16일(현지 시간)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어부들이 디젤유 가격 급등에 어업 허용 일수를 줄인 정부 조치에 반발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정유 방파제’
그런데 모든 나라가 석유제품을 만드는 능력을 축소한 것은 아니죠. 대표적인 나라로 중국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중국의 연평균 정제능력은 과거 10년(2015~2025년) 사이 2.3% 증가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산유국이 아닌 중국이 미·이란 전쟁 기간 동안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렛대로 작용했습니다.

중국은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된 직후인 올 3월 석유제품 수출 제한 조치를 긴급하게 내렸고, 이후 수출량을 서서히 푸는 식으로 시장 영향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수입 원유 가운데 40% 이상이 중동산일 정도로 의존도가 커서 미·이란 전쟁의 최대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죠. 그리고 이달부터 다시 석유제품 수출 금지령을 내리면서 호주와 베트남, 일본, 인도네시아 등 중국산 수입국들은 벌써 공급 차질을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중국은 치솟는 디젤 가격을 진정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짚었습니다.

물론 중국이 석유제품 수출에 다시 빗장을 건 것은 자국 내 사정, 즉 미·이란 전쟁 장기화로 석유 재고가 급격히 낮아진 것과도 연관성이 큽니다. 당장 자신들도 쓸 연료를 확보해야 하는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중국이 에너지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정제능력이 충격의 강도를 상대적으로 덜하게 만든 완충 역할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중국의 에너지 시장 통제는 원유 공급 조절을 통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영향력 행사와 유사한 효과를 내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분석했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도 정제능력이 석유제품 충격을 일정 정도 흡수한 사례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한국은 상위 수준의 정제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에너지 인스티튜트 집계로 지난 10년(2015~2025년) 동안 한 해 평균 1.3% 성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 정제품 공급 차질을 줄이는 방파제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난달 유럽이 수입한 한국산 항공유는 하루 평균 12만 9000배럴로 2022년 10월 이후 가장 많은 수준으로 뛰기도 했죠.

*자료: 에너지 인스티튜트, AI 생성 이미지. *자료: 에너지 인스티튜트, AI 생성 이미지.탈석유에도 필요한 ‘질서 있는 퇴장’
우리나라도 원유 전량을 사실상 수입에 의존하는 에너지 취약국으로 중동 사태에 따라 실물 경제가 타격을 입고, 금융시장의 경우 다른 나라보다 더 큰 변동성을 겪었죠. 하지만 석유제품을 놓고 보면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앞으로도 탈석유 흐름은 뒤집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됩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 전 세계 에너지 투자가 사상 최고치인 3조 4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는데요. 그러나 이 가운데 화석연료에 대한 투자 비중은 35%인 1조 2000억 달러에 그칩니다. 나머지 2조 2000억 달러는 재생에너지, 원자력, 전기화 등 청정 기술에 집중될 것으로 보입니다. IEA는 또 석유제품 수요는 당장 내년 정점을 찍을 것으로 전망되며, 시장은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의 전기차 전환 속도를 주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도 최근 몇 년으로 범위를 좁히면 정제능력은 하루 330만~360만 배럴로 정체 수준입니다. 양적 팽창보다 질적 전환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은 에너지 전환을 진행하더라도 안전 장치가 꼭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정제능력은 공급망이 흔들리는 순간 디젤과 항공유 부족을 막는 ‘완충재’가 됐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정제능력을 먼저 줄인 지역은 원유가 있어도 이를 필요한 연료로 바꿔줄 다른 나라를 찾아야 했죠. 연재를 통해 전해드린 바 있듯, 이 또한 에너지 전환기를 맞아 화석연료의 ‘질서 있는 퇴장’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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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Petro)에서 전기(Electro)까지. 에너지는 경제와 산업, 국제 정세와 기후변화 대응을 파악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기자 구독, 또는 [조양준의 페트로-일렉트로] 연재 구독을 누르시면 에너지로 이해하는 경제 인사이트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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