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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석 조명희 ‘근대문학의 개척자’이자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조명희. |
| ⓒ 국가보훈부 |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은 이인직의 '혈의 누', 첫 번째 근대소설은 이광수의 '무정', 자연주의 소설 효시는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최초의 신체시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자유시는 주요한의 '불놀이' 문예지 1호는 '창조'….
50대 이상이라면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운 기억이 어렴풋이 날 만한 한국 근대문학 여명기의 각종 기록이다. 최초의 창작 희곡 '김영일의 사(死)'를 발표하고 미발표 창작 시를 모아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처음으로 펴낸 조명희의 업적은 빠져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작가로 활동하다가 적성국 소련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이자 프롤레타리아문학(프로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소설 '낙동강'도 한동안 금서로 묶여 있다가 1987년 9월 30일 재출간돼 비로소 독자와 떳떳이 만날 수 있었다. 냉전과 독재가 쳐놓은 가림막 속에서 조명희란 이름과 그의 작품이 독자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동안 이인직, 이광수, 최남선, 김억 등 친일파 문인들의 기록과 작품은 버젓이 교과서에 실려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조명희는 근대문학의 개척자이자 프로문학의 대표 작가로 문학사에 또렷한 발자취를 남겼을 뿐 아니라 망명 이후 교육자이자 언론인으로도 활동하며 숱한 후진을 길러내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총칼 대신 펜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그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북경사관학교 진학 좌절되자 일본 유학
조명희는 1894년 8월 10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숫말(수암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병행과 어머니 연일 정씨 사이의 4남 3녀 가운데 막내였다. 호는 포석(抱石)이고 적로(笛蘆), 목성(木星) 등의 필명도 썼다. 선대에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이고 살림도 넉넉한 편이었으나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세가 기울었다. 진천의 신명학교를 거쳐 1910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그해 여름에 닥친 경술국치는 의협심 강하고 감수성 예민한 그를 교실에만 안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군인이 되어 무력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는 뜻을 세우고 중국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하기로 한 것이다. 1914년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서울을 떠나 걸어서 국경을 넘으려다가 평양에서 둘째형 경희에게 붙들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5년간 집에서 칩거한 조명희는 국내외 소설과 문예지 등을 탐독하며 군인 대신 문인을 꿈꿨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불길이 충북으로도 번지자 3월 15일 진천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려고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석 달간 옥고를 치른 뒤 실력을 기르기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19년 가을 도쿄의 도요(東洋)대 동양철학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김우진, 최승일, 김영팔 등 동포 유학생들과 극예술협회를 결성해 근대 민족극 운동을 펼쳤다. 일본의 한인 유학생과 한인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가 회관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극예술협회에 고국 순회공연을 제안하자 조명희가 쓴 희곡으로 무대에 올린 작품이 한국 근대연극의 서막을 연 '김영일의 사'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도쿄 유학생 김영일이 길에서 우연히 큰돈을 주웠다가 고민에 빠지고, 이를 계기로 동료 유학생 간에 사상 논쟁과 격투가 벌어져 일본 경찰의 탄압을 받는다는 것이 기둥 줄거리다. 1921년 7월 9일부터 40여 일 동안 부산, 서울, 평양, 함흥 등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관객의 갈채를 받았다. 연극의 파급력을 깨달은 조명희는 희곡 '파사(婆娑)' 등을 집필하고 유학 후 조선에서도 '불개미극단'을 조직했다.
유학 시절 그는 조선인을 모욕하는 일본인을 응징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할 목적으로 황석우·박열 등이 조직한 의권단(義拳團)에 가입해 활동하는가 하면 박열·정태성·김약수 등이 이끄는 무정부주의 단체 흑도회(黑濤會)에도 관심을 두었다.
문학사적 가치 우뚝한 희곡집과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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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문학사의 기념비 조명희가 펴낸 희곡집 ‘김영일의 사’, 소설 ‘낙동강’, 시집 ‘봄 잔디밭 위에’ 표지(왼쪽부터). |
| ⓒ 포석조명희문학관 |
귀국 후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1923년 희곡집 '김영일의 사'와 1924년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발간했다. 최초의 희곡집으로 꼽히는 김영보의 '황야에서'(1922년)는 5편 모두 외국 작품을 번안한 것이고 공연 시기가 '김영일의 사'에 실린 것보다 늦다. 근대 시집의 효시인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1923년)도 이미 발표된 작품들을 엮은 것이어서 미발표 창작시 100여 편을 수록한 '봄 잔디밭 위에'보다 문학사적 가치가 덜하다.
조명희는 1925년 KAPF 창립회원으로 가입해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다졌다. 그즈음 발표한 '땅속으로', 'R군에게', '저기압', '농촌 사람들', '마음을 갉아먹는 사람', '새 거지' 등은 모두 궁핍한 소시민이나 농촌에서 쫓겨난 도시 빈민의 애환을 그린 소설이다. 톨스토이 희곡 '산송장'과 투르게네프 소설 '그 전날 밤'도 우리말로 옮겨 펴냈다.
단편소설 '낙동강'은 1927년 월간지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됐다. 낙동강 어부의 손자이자 농부의 아들 박성운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일제의 갈대밭 강탈에 맞서 투쟁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의 젖줄이자 삶의 터전인 강을 무대로 내세운 최초의 근대소설로 이기영의 '두만강',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에 영향을 미쳤고 멀리는 조정래의 '한강'에까지 맥이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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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동강에 대한 노래 충북 진천의 포석조명희문학관 전시실. 관람객이 헤드셋을 쓰고 조명희 대표작 ‘낙동강’에 등장하는 노래를 들어볼 수 있도록 꾸몄다. |
| ⓒ 진천군 |
조명희는 몇 달 동안 낙동강 하구 구포벌을 답사하며 민요를 채집하고 생활상을 보고 들은 뒤 낙동강 유역 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압축적으로 그려냈다. 유물사관과 계급 의식을 선명히 드러내면서도 서정적 배경 묘사, 억센 경상도 사투리, 정감 넘치는 민요 노랫말 등으로 독자를 감상에 젖게 만들어 좌우 양쪽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같은 해 발표한 '동지', '한여름 밤', '춘선이'에도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 의지가 진하게 배어 있다.
고려인 하나로 만든 저항시 '짓밟힌 고려'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면서 일제의 감시와 탄압도 집중됐다. 결국 1928년 8월 소련 연해주로 건너가 최초의 망명 작가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그해 1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한글신문 '선봉'에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발표해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는 동포들의 참상을 고발하고 승리를 향한 희망을 북돋웠다.
일본 제국주의 무지한 발이 고려의 땅을 짓밟은 지도 벌써 오래다.
그놈들은 군대와 경찰과 법률과 감옥으로 온 고려의 땅을 얽어 놓았다.
칭칭 얽어 놓았다 - 온 고려 대중의 입을, 눈을, 귀를, 손과 발을.
그리고 그놈들은 공장과 상점과 광산과 토지를 모조리 삼키며 노예와 노예의 떼를 몰아 채찍질 아래에 피와 살을 사정없이 긁어먹는다.
보라! 농촌에는 땅을 잃고 밥을 잃은 무리가 북으로 북으로, 남으로 남으로, 나날이 쫓기어가지 않는가?(후략)
34행으로 이뤄진 이 저항시는 이국땅에서 숨죽이며 살던 동포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어 연해주 전역은 물론 중국 만주로도 퍼져 나갔다. 훗날 연해주 한인(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뒤에도 고려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애송시가 됐다. 장편소설 '붉은 깃발 아래서'와 '만주의 빨치산', 산문집 '두 얼굴의 조각 그림' 등도 집필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만주의 빨치산'은 홍범도 장군을 다룬 것으로 알려졌으나 1937년 소련 비밀경찰(KGB)에게 체포될 때 유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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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 가르치는 조명희 포석조명희문학관 전시실의 디오라마. 조명희가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육성농민청년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문학을 가르치는 장면을 모형으로 전시해놓았다. |
| ⓒ 진천군 |
그는 우수리스크 육성농민청년학교 조선어 교사, 조선사범학교와 고려사범대 교수로 재직하며 민족 계몽과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선봉' 편집자, 망명 문예지 '노력자의 고향'과 '노력자의 조국' 주필 등을 맡아 고려인 문단의 토대를 만들었다. '선봉'에 문예면을 신설해 후배 문인들에게 발표 기회를 제공하는가 하면 1936년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에 고려인 문예 크루소크(동호회)가 결성되자 멘토로 나섰다.
그가 길러낸 제자 강태수·리시연·문금동·최영근·김부르크 등은 고려인 문학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냈다. 현경준이나 김학철 등 만주의 조선족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재미동포 강용흘이 영문소설 '초당'을 미국에서 출간한 것이 1931년이니 조명희를 '디아스포라 문학의 선구자'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항일 작가에게 씌워진 '일본 첩자 협력죄'라는 누명
그의 망명 활동은 10년도 채 되지 않아 막을 내렸다. 스탈린 정권이 1937년 10월 고려인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킬 때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지도자급 인사 2500여 명을 체포해 처형하는 과정에서 조명희도 9월 18일 투옥됐다. 소련작가동맹 원동(극동)지부 간사를 맡을 정도로 소련 당국의 신임을 받고 있던 그로서는 뜻밖의 횡액이었고, '일본 첩자에게 협력한 죄'라는 혐의는 얼토당토않은 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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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인번호 167 조명희 1937년 9월 소련 KGB에게 체포돼 하바롭스크 KGB본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모습이다. 당시 연도(1938)와 수인번호(167)가 적혀 있다. |
| ⓒ 국가보훈부 |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고 5월 11일 하바롭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 집권한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에 나서면서 명예 회복의 길이 열렸다. 소련 극동주 군법재판소가 1956년 7월 20일 조명희 복권을 선언한 데 이어 소련과학원은 1959년 '조명희 선집'을 출간했다.
조명희는 소련에서 사후 18년 만에 복권됐으나 대한민국의 명예 회복 조치는 훨씬 더뎠다. 정부가 조명희와 함께 월북 문인들의 해방 이전 작품을 공식적으로 해금한 것이 1988년 7월이었으니 사후 50년 만이고 망명 60년 만이었다.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기까지는 그로부터 31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재외동포청은 지난 8월 조명희를 '이달의 재외동포'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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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명희와 가족의 행적도 포석조명희문학관 광장에 설치해놓은 행적도. 조명희의 유학길과 망명길, 조명희 가족의 강제 이주 행로 등을 그려놓았다. |
| ⓒ 독립기념관 |
조명희는 13살 때 민식과 결혼해 2남 2녀를 낳았다. 37세이던 193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황명희와 재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망명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러시아식 관습에 따라 조 발렌티나 명희 예브나, 조 미하일 명희 예위츠, 조 블라디미르 명희 예위츠란 이름으로 신고했지만 맏이인 딸과 둘째인 장남에게는 선아와 선인이란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앞에 성을 붙이면 각각 조선아와 조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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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명희 망명 유가족 조명희가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해 새로 이룬 가족으로 1938년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뒤에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부인 황명희, 장녀 조선아(발렌티나), 차남 조블라디미르. 장남 조선인(미하일). |
| ⓒ 포석조명희문학관 |
황명희는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는 남편을 남겨둔 채 아이들과 함께 강제로 유배 열차에 태워졌다. 차남 블라디미르는 생후 4개월밖에 안 됐고 발렌티나도 5살에 지나지 않았다.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동안 노인과 유아가 숱하게 죽어 나갔으나 이들 3남매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지도층으로 성장해 고려인의 롤모델이 됐다.
타슈켄트의 문학기념실과 충북 진천의 문학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나보이 국립문학박물관 4층에는 조명희 문학기념실이 꾸며져 있다. 딸 발렌티나가 주도해 1988년 문을 열었다. 육필 원고와 편지, 작품집, 신문기사, 가족사진 등을 전시해놓았다. 맨 가운데 흉상을 세워놓았고 뒤편에는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락동강"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문구와 달리 조명희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타슈켄트 남쪽에는 조명희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연방대 과학박물관 앞뜰에는 2006년 포석 조명희 문학비가 세워졌다. 2017년 9월 극동연방대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현지 동포의 권유에 따라 급히 일정을 바꿔 문학비를 깜짝 방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 조명희 문학비 200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연방대에 세워진 포석 조명희 문학비. 왼쪽의 설명석은 2020년에 설치했다. |
| ⓒ 주블라디보스토크한국총영사관 |
조명희의 출생지인 충북 진천에는 2015년 포석 조명희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차남 블라디미르가 20만 달러를 기부해 마중물을 부었고 국비 12억, 도비 9억, 군비 9억 등 30억 원을 들여 건립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에 연면적 970㎡(약 300평) 규모로 전시실을 비롯해 문학 사랑방, 창작 사랑방, 문학연구실,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진천군은 1994년부터 매년 10월 포석 조명희 문학제도 열어 그의 항일 정신과 문학 세계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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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석조명희문학관 전경 2015년 출생지인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 건립된 포석조명희문학관. 건물 앞에 세워진 동상은 진천 출신 조각가 정창훈의 작품이다. |
| ⓒ 재외동포청 |
조명희가 2년간 살다가 생을 마친 하바롭스크에는 그의 발자취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콤소몰스카야 89번지에 그가 살던 소련작가연맹 작가의 집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철거되고 새 건물이 들어섰다.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해 처형된 사람들이 묻힌 카를 마르크스 거리의 시립공동묘지에도 그의 무덤은 없다. 검은색 기념비에 빼곡히 새긴 4300여 명의 명단 가운데 러시아어로 적힌 이름을 간신히 찾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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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바롭스크 공동묘지 1930년대 스탈린에게 처형된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러시아 하바롭스크 시립공동묘지. 희생자 명단 가운데 조명희 이름은 있으나 무덤은 찾을 수 없다. 묘지 입구 정면에 기도실과 양옆으로 세워진 검은색 기념비가 보인다(왼쪽 위), 희생자 명단을 새긴 왼쪽의 기념비와 오른쪽 무덤군(왼쪽 아래). 러시아어로 새겨진 이름 가운데 세 번째가 조명희다(오른쪽). |
| ⓒ 이희용 |
국립한국문학관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을 연구하고 작가들을 발굴하는 연구 조직을 내년에 출범하기로 하고 지난 6월부터 가칭 해외동포작가연합 추진위원회를 가동하고 있다. 근대문학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낡은 이념의 잣대로 재단돼 홀대받았던 조명희가 디아스포라 문학사에서는 제대로 대접받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낙동강>
<포석 조명희 노트>
<독립유공자 공훈록>
<그돌의 문학과 생애 조명희>
<포석 조명희 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