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공급가격 묶이고 수출도 제한…해외 호황 활용에 제약
담합 재판에 정유 4사 CEO 국감 출석…경영 부담 가중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고유가에 실적 개선을 기대하는 정유업계가 마냥 웃지 못하고 있다. 석유 최고가격제가 7개월째 이어지며 국내 판매가격이 묶인 가운데 손실을 얼마나, 언제 보전받을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수출 제한으로 해외 시장의 호황을 충분히 누리기 어려운 데다 담합 의혹을 둘러싼 재판과 국정감사까지 앞두고 있다. 고유가에 따른 수익성 개선에도 정부의 가격 통제와 사법적 불확실성이 경영 부담을 키우고 있다.손실 추산 7조~8조…실제 지급액은 안갯속
6일 업계에 따르면, 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는 석유 최고가격제에 따른 손실보전 규모와 지급 시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가 손실을 보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지만 산정 기준을 둘러싼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실제 지급액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는 지난달 19일부터 적용한 10차 석유 최고가격을 리터(ℓ)당 휘발유 1784원, 경유 1773원, 등유 1380원으로 동결했다. 지난 7차부터 네 차례 연속 같은 가격이다. 국제유가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소비자 부담을 고려해 가격 상한을 묶어둔 것이다.
국제유가는 중동의 지정학적 불안 속에 여전히 배럴당 100달러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에 따르면, 지난달 16일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배럴당 128달러까지 치솟았다. 같은 날 브렌트유는 105.8달러,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102.4달러를 기록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동서 송유관 피격과 후티 반군의 홍해 봉쇄 위협으로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진 영향이다.
이후 상승세가 다소 꺾였지만 불안 요인은 여전하다. 지난 1일 두바이유는 배럴당 113.6달러, 브렌트유는 102.3달러, WTI는 92.9달러를 기록했다. 미국과 이란의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데다 미국 내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제품 재고가 줄면서 유가를 떠받치고 있다.
정부는 최고가격제가 물가 안정에 효과를 거뒀다는 입장이다. 산업통상부는 지난 3~8월 제도 시행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평균 0.6%포인트 낮아진 것으로 분석했다. 국제유가 급등이 국내 기름값에 곧바로 반영되는 것을 막아 가계와 산업계의 부담을 덜었다는 설명이다.
반면 정유업계의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난 3월 13일 약 30년 만에 부활한 최고가격제가 7개월째 이어지면서다. 당초 중동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한시적 조치였지만 국제유가가 다시 오르는 상황에서도 국내 공급가격은 그대로 묶여 있다.
정부와 업계가 맞서는 지점은 손실 산정 방식이다. 정부는 정유사의 실제 제조원가에 적정 마진을 더해 보전액을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업계는 싱가포르 국제 석유제품 가격(MOPS)과 국내 공급가격의 차액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유사들이 통상 MOPS를 기준으로 판매가격을 결정하는 만큼 가격 통제로 포기한 이익도 손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업계의 산정 방식을 토대로 최고가격제 시행 이후 누적 손실이 7조~8조원에 달한다는 추산도 나온다. 다만 국제 제품가격과 국내 공급가격의 차이에 판매 물량을 적용한 개략적인 수치로, 정유사들이 실제 집계한 손실액은 아니다.
정부가 손실보전을 위해 편성한 예산은 약 5조6500억원이다. 올해 추가경정예산에 2·3분기 지원분 4조2000억원을 반영, 내년도 예산안에도 4분기 지원분 1조4497억원을 포함했다. 국제 석유제품 가격을 기준으로 추산한 손실액에는 못 미치는 규모다. 실제 보전액은 정부 검증과 정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확정되는 만큼 손실 인정 범위를 둘러싼 진통이 예상된다.
정산 일정도 차질을 빚고 있다. 정부는 당초 6월 말과 9월 말, 11월 말 등 세 차례에 걸쳐 손실을 보전할 계획이었지만 아직 첫 정산조차 끝내지 못했다. 현재는 오는 11월 손실 규모를 확정하고 연내 첫 지급을 마친다는 방침이다.
정산이 늦어지는 데는 복잡한 원가 구조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조원가에 포함할 비용과 적정 마진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데다 정유사마다 회계 처리 방식도 달라 손실액을 산출하고 검증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원가에 어떤 항목을 포함하고 적정 마진을 어디까지 인정할지 등 세부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며 "업체마다 자료를 정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정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선 가격 묶이고 해외선 수출 막히고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손실은 결국 정유사들이 떠안아야 한다. 반대로 보전 범위를 넓히면 민간기업의 손실을 세금으로 메우는 데 따른 재정 부담이 커진다. 최고가격제 시행이 길어질수록 정부와 업계 모두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출 제한도 정유업계의 수익성을 제약하는 요인이다. 정부는 지난 3월 최고가격제 도입과 함께 석유제품 수출량을 지난해 같은 달의 100% 이내로 제한, 국내 공급량은 전년 동기의 90% 이상으로 유지하도록 했다. 해외 판매를 제한해 국내 수급 안정을 꾀하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국내 판매가격이 묶인 사이 해외에서는 수출 기회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은 러시아와 중동의 정제시설 가동 차질로 석유제품 공급이 빠듯해졌고 미국도 자국 내 공급 안정을 위해 경유 수출 제한을 검토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경유 수출 금지 방안을 매우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은 세계 주요 경유 수출국 중 하나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정유 4사의 석유제품 수출량은 4억8535만배럴로 이 가운데 경유가 2억237만배럴을 차지했다. 대미 수출량도 전년보다 14.7% 증가한 4961만배럴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정유업계는 국내 공급에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고도 수출을 늘리기 어렵다는 점을 문제로 꼽는다. 중동 전쟁 이후 원유 도입량이 다소 줄었지만 수입선 다변화와 우회 운송 등을 통해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더욱이 건설·산업 경기 부진으로 국내 석유제품 수요가 전년보다 감소하면서 팔리지 않은 물량이 재고로 쌓일 가능성도 커졌다.
또 다른 관계자는 "국내 정유사들은 통상 매출의 절반 이상을 수출에서 올린다"며 "국내 공급을 충족하고도 수출할 여력이 있는 만큼 업체별 재고와 실제 수급 상황을 고려해 수출 제한을 탄력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로서도 중동 전쟁의 향방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규제를 섣불리 풀기는 부담스럽다. 원유 도입에 추가 차질이 생길 가능성에 대비해 국내 공급 물량을 우선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격 통제가 장기화하면서 단계적인 정상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제유가 상승분이 국내 판매가격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으면 소비자가 가격 부담을 체감하기 어려워 석유 소비를 줄일 유인도 약해지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물가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휘발유와 경유의 최고가격을 싱가포르 국제 석유제품 가격에 점진적으로 연동하는 방안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담합 의혹에 주유소 거래 관행까지…정유 4사 전방위 검증
가격 통제와 수출 제한에 이어 담합 의혹을 둘러싼 사법적 판단도 정유업계의 부담을 키우고 있다. 검찰은 지난 7월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를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두 회사가 2024년 7월부터 가격 정보를 교환하고 올해 미국·이란 전쟁 발발 직후에는 석유제품 공급가격의 인상 시기와 폭을 사전에 조율했다는 혐의다.
검찰이 산정한 직접 담합 관련 거래 규모는 14조2000억원이다.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이 인상된 가격을 따라간 데 따른 시장의 경쟁제한 효과까지 고려하면 약 26조원에 이른다는 게 검찰 측 판단이다. 다만 이 금액은 담합의 영향을 받은 거래 규모로 향후 부과될 과징금이나 손해배상액과는 구분된다.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은 직접적인 가격 협의 정황이 확인되지 않아 해당 혐의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다만 주유소에 특정 정유사 제품만 취급하도록 하는 전량구매계약과 공급 당시 가격을 확정하지 않고 나중에 정산하는 사후정산제 등 거래 관행을 둘러싼 혐의는 정유 4사 모두에 적용됐다.
정유업계는 검찰의 판단에 반발하고 있다. 경쟁사의 가격 동향을 파악하는 통상적인 영업활동과 가격 인상 시기·폭을 사전에 합의하는 담합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유사마다 공급 조건과 사후정산 방식이 달라 실제 판매가격에도 차이가 있다는 입장이다. 지난 8월 첫 공판에서도 혐의를 부인한 가운데 재판부는 오는 11월 주요 증인신문에 들어갈 예정이다.
국회에서도 정유사들의 가격 결정 구조가 도마에 오른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지난 1일 전체회의에서 김종화 SK에너지 대표와 송명준 HD현대오일뱅크 대표, 허세홍 GS칼텍스 대표, 안와르 알히즈아지 에쓰오일 대표 등 정유 4사 최고경영자(CEO)를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했다.
이번 국감에서는 담합 의혹과 함께 유류세 인하분의 판매가격 반영 여부, 정제마진의 적정성, 정유사와 주유소 간 거래 관행 등이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최고가격제 시행에 따른 손실을 세금으로 보전하는 것이 타당한지, 전속거래가 주유소의 가격 경쟁을 제한하는지에 대해서도 질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각종 규제와 사법적 불확실성에도 당장의 실적 전망은 나쁘지 않다. 정유 4사는 올 상반기 중동 전쟁에 따른 정제마진 상승으로 수익성이 개선됐다. 3분기에도 글로벌 석유제품 공급 부족으로 높은 정제마진이 유지되면서 국내 판매 부문의 부담을 수출 실적으로 일부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실적 호조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전쟁이 갑작스럽게 끝나 국제유가가 급락하면 높은 가격에 확보한 원유와 석유제품에서 재고평가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손실보전 규모와 담합 재판 결과에 따라 추가적인 재무 부담을 떠안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