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사건들을 통해 한국 개신교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본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한국 사회에서 종교, 특히 개신교의 적절한 위치와 바람직한 역할이 무엇인지, 이를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통일교에 또 메스
운영책임자와 여신도 구속
세칭 통일교 사건으로 교주 문선명씨 외 5명의 간부가 병역법 위반의 혐의와 여신도를 간음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통일교는 사교냐 아니냐에 대하여 비상한 세론을 일으키고 있거니와 12일 하의 치안당국에서는 동교회 운영책임자 유효원(42세)씨를 문서위조혐의로 그리고 최순실(여, 22세)를 음행매개혐의로 구속하여 수사진행에 커다란 관심을 모으게 하고 있다. 치안당국에서 음행매개 혐의로 여신도를 구속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담문한 바에 의하면 최는 모여대 재학중 통일교 신자라하여 출교처분을 받은 자라하는데 이로써 동교회 관계자로 구속된 자는 7명이다. - <경향신문> 1955.07.14.
1955년 3월, 통일교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연희대(현 연세대) 영문학과 박상래 교수와 이화여대 교수 5명(양윤영, 한충화, 김영운, 최원복, 이정호)이 강제 퇴직했고, 이대생 14명과 연희대생 2명이 제적되었다. 5월 14일, 이 사실이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왔다.
주류 개신교 교단들은 성명서를 통해 통일교에 대한 비판과 경계의 수위를 높였지만, 통일교와 일부 언론은 종교 문제로 교수와 학생을 징계한 것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는 사설 등을 통해 학칙이나 법적 근거 없이 개인의 종교적 신앙을 이유로 학생을 퇴학시키거나 교수를 해임한 조치가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와 '학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사회적 파장이 커지자 경찰은 7월 4일 통일교 교주 문선명과 그의 제자 4명을 병역법 위반 및 사회 풍기 문란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하지만 약 3개월 간의 구속 재판에서 문선명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고, 함께 구속 송치된 이들도 사교·음행 스캔들과는 무관하게 병역법 위반이나 문서위조 혐의로 가벼운 처벌만 받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통일교는 세간의 엄청난 이목을 끌었으며, 통일교에 대한 기존 교단들의 비판과 경계심이 크게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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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년 9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문선명(사진 속 X 표시)과 측근들이 병역법 위반 및 사회 풍기 문란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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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1954년 5월 1일, 문선명은 서울시 성동구 북학동(현 신당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를 창립했다. 이 무렵 이화여대 음악과 전임강사 양윤영이 통일교 신자의 소개로 문선명을 만난 후 입교했다.
1954년 후반, 문선명은 교세 확장을 위해 서대문구 북아현동으로 본거지를 옮겼는데 인근에 있던 연희대와 이화여대 교수 및 학생들을 상대로 집중적인 포교가 이루어졌다. 이때 이화여대 양윤영 이 핵심 역할을 했다. 이화여대와 연희대에서 강의했던 양윤영을 통해 두 대학 교수 일부가 통일교로 개종했으며, 이후 이들의 적극적인 포교 활동으로 이대 영문과, 기독교학과, 음악과, 약학과 학생들 사이에서 통일교가 빠르게 확산했다.
1954년 하반기, 음악과 전임강사 양윤영이 북학동 및 북아현동의 통일교 모임에 열성적으로 출석하며 학내 학생들을 포교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화여대 당국은 이 신흥 종교의 정체를 파악하고 양윤영을 설득·교정하기 위해 기독교학과 김영운 교수에게 조사와 검증을 부탁했다.
하지만 양윤영은 오히려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김영운을 자신의 북아현동 자택 모임 및 통일교 강론 장소로 적극 안내했다. 또한, 김영운이 문선명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자리도 마련했다. 통일교의 오류를 밝혀내기 위해 가진 이 만남에서, 김영운은 문선명과 당시 그가 집필 중이던 <원리해설>(원리강론의 전신)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후, 양윤영의 지속적인 설득과 교리에 매료된 김영운은 1954년 후반 자발적으로 통일교 신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양윤영, 한충화 교수(음대 학장) 등과 함께 이화여대 내 통일교 포교 활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화여대 당국은 김영운에게 교리 철회 및 탈퇴를 권고했지만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1955년 3월 24일 자로 김영운과 관련 교수 4명이 파면되었다.
연희대의 경우, 양윤영이 평소 친분이 깊었던 영문학과 조교수이자 교목실 직원이었던 박상래 교수를 북아현동 모임으로 인도했다. 이후, 박상래는 주로 신학과와 영문과 등 문과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별 면담이나 소규모 성경 공부 모임을 통해 통일교 교리를 전파했다.
얼마 후, 연희대 학생들이 기존 교회를 이탈해 신흥 종교 집회에 출석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교목실과 이사회가 자체 조사를 실시했다. 박상래가 학내 포교의 중심임을 확인하고, 그에게 통일교 신앙을 포기하고 포교 활동을 중단하도록 강력히 권고했다. 하지만 박상래는 끝까지 통일교 교리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권고를 거부했다.
결국, 연희대 당국은 학교의 설립 이념과 정통 기독교 신앙을 위배했다는 이유로 1955년 3월 박상래 교수를 해임했다. 이후, 학생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고, 끝까지 탈퇴를 거부한 학생 14명이 1955년 7월 최종 제적(퇴학) 처리되었다.
갈등
그렇다면, 왜 기성 개신교회는 통일교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통일교의 기본 교리와 흉흉한 소문, 기존 교회들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으로 보인다.
통일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영적 구원'은 완성했지만 '육적 구원'은 실패했고, 미완으로 남은 육적 구원의 완성을 위해 '재림주'가 한반도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와서 참부모가 되어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성경이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어, 이를 풀어낸 새로운 계시(원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인류의 원죄를 청산하기 위해 교주와의 신체적 접촉(혼음)을 통해 혈통을 바꿔야 한다는 이른바 '피가름' 교리를 가르친다는 소문이 기독교계와 언론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으며, 통일교로 개종한 이화여대·연희대 교수 및 학생들이 학업과 가정을 뒤로하고 집단생활에 몰입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또한, 비신자보다 기성 교회(특히 감리교, 장로교) 내의 열성적인 교인, 신학자, 지성인 청년들을 주요 포교 대상으로 삼았기에, 교회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에, 예수교 장로회, 기독교 장로회, 감리교 등 한국의 주요 기성 교단들이 1950년대 후반부터 교단 총회를 통해 통일교를 공식적으로 '이단' 및 '출교 대상'으로 결의하고 신도들의 접촉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후
이화여대에서 파면·해임된 교수들은 이후 통일교의 교리를 체계화하고 해외로 교세를 넓히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예를 들어, 기독교학과 교수였던 김영운은 1959년 최초의 미국 파견 선교사로 유타주와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에 참여했고, 영어판 <원리강론> 번역과 미국 내 교세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음악과 전임강사였던 양윤영은 통일교 초기 찬송가 제작 및 음악 관련 활동을 주도했고, 영문학과 교수였던 최원복은 초기 통일교의 문서 선교 및 대외 교류, 영문 출판 및 번역 사업 등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반면, 연희대 교수였던 박상래는 면직 직후 통일교 교단 내에서 교리 연구 및 신학적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으나, 교단 측과의 견해차 등으로 2~3년 만에 통일교를 떠났다. 이후, 박상래는 문선명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에 입교했다.
한편, 퇴학 처분을 받았던 학생들은 대부분 통일교에 남아 '36쌍 축복 가정' 등 교단 내 최고 위상의 초기 입교자 집단을 형성했으며, 1960~1970년대 통일교가 설립한 선화예술중·고등학교, 선문대학교, 세계일보, 통일그룹 계열사 등의 주요 임원 및 지부장으로 근무하며 교단의 기둥 역할을 했다.
1955년 사건은 통일교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무엇보다 기존 개신교계(장로교, 감리교 등) 및 교계 학교와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면서, 통일교는 개신교의 한 분파가 아닌 신흥 종교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되었다. 동시에, 이대 교수 출신들과 지식인들의 합류로 교리서 <원리강론>의 체계화가 가속화되었으며, 당시의 대대적인 언론 보도로 통일교에 대한 전국적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또한, 퇴학 사태 이후 '성화학생회'와 '원리연구회(CARP)' 등 대학생 선교 조직을 본격적으로 가동하여 청년·지성인 포교에 집중했으며, 1959년 일본 및 미국 선교사 파견을 시작으로 활동무대를 전 세계로 확장했다. 국내에선 일화(식음료), 통일중공업(자동차 부품), 세계일보(언론), 선문대, 선화예고(교육) 등을 아우르는 통일그룹을 형성하며 거대종교·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1955년 통일교 사건'은 통일교가 기성 개신교회와 결별하고, 신종교로서 독자적인 노선을 개척하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동시에, 이화여대와 연희대가 종교적인 이유로 교수와 학생을 징계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도 발생했다. 수많은 사립학교를 보유한 한국 개신교가 장차 반복해서 직면하게 될 난제(難題)가 등장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원장이자 백향나무교회 담임목사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B.A.),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미국 예일대학교(S.T.M.), 드루대학교(Ph.D.)에서 공부했다. <전광훈 현상의 역사적 기원> 등을 썼고 <월터스토프 하나님의 정의>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