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성 육필 초고·1926년 '훈맹정음' 공개…고치고 덧댄 흔적까지
눈으로만 보는 점자전의 모순 피했다…자료 촉각 모형·음성해설 마련종이는 낡았고, 글씨는 반듯하지 않다. 검은색과 파란색 펜으로 고친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칸이 모자라자 다른 종이를 덧대 붙였다. 한글 점자를 만든 박두성(1888~1963)이 남긴 '한글점자의 유래' 초고본이다. 완성된 문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문자를 만들기 위해 지우고 고치고 다시 생각했던 사람의 손이다.
박두성이 1946년 작성한 국가등록문화유산 ‘훈맹정음의 유래’ 초고본 일부. 훈맹정음을 만들 때 고려한 원칙과 기준을 육필로 정리한 자료로, ‘배우기 쉬워야’ ‘점 수효가 적어야’ ‘서로 헷갈리지 않아야’ 등의 원칙이 적혀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점 여섯 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여섯 자리의 조합으로 글자가 되고 문장이 된다. 지금은 당연하게 쓰이는 한글 점자 '훈맹정음'도 처음부터 완성된 체계였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한글의 소리와 구조를 점으로 옮기기 위해 수없이 표를 그리고 규칙을 세웠다.
훈맹정음 반포 100주년을 맞아 그 과정이 한자리에 펼쳐진다. 국립한글박물관과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송암점자도서관이 7일부터 인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여는 특별전 '점에서 세상으로: 훈맹정음 100주년'이다. 전시는 내년 2월14일까지 이어진다.
훈맹정음은 1926년 11월4일 박두성이 만든 한글 점자다. 이름부터 훈민정음을 닮았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였던 '훈민정음'에서, 보지 못하는 이들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맹정음'으로 이어졌다. 전시는 이 둘 사이 480년의 시간을 문자에 접근할 권리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묶는다.
대한맹인사업협회가 시각장애인 교육의 필요성과 단체 설립 취지를 알리기 위해 제작한 홍보문 ‘앞 못 보는 이와 그의 가족 친구에게 드림’. 박두성은 1940년 조선맹아사업협회를 조직해 점자통신교육을 실시했다. 국립한글박물관핵심 전시품은 1926년 제작된 국가등록문화유산 '훈맹정음'이다. 한 장의 종이에 세로줄로 자음, 가로줄로 모음을 놓고 각각에 해당하는 점자를 배열했다. 아래에는 약자와 장음, 숫자 표기도 들어 있다. 한글이라는 소리 문자를 여섯 점의 체계 안으로 옮긴 일종의 설계도다.
완성품보다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초고다. '한글점자의 유래'에는 한글 점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가 박두성의 육필로 남아 있다. 교정 흔적이 많고, 부족한 지면에는 종이를 이어 붙였다. 1946년 작성한 '훈맹정음의 유래' 초고에는 '맹인과 문자', '점자연구회와 고찰들' 같은 항목이 400자 원고지 위에 정리돼 있다.
문자를 만든다는 것이 글자 몇 개의 모양을 정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여기서 보인다. 어떻게 배우기 쉬워야 하는지, 한글의 구조를 어떻게 점으로 대응시킬지, 실제 사용자는 어떤 방식으로 읽고 써야 하는지를 하나씩 검토해야 했다. 점 하나의 위치에도 생활이 걸려 있었다.
점자 인쇄에 사용된 족답식 제판기와 이를 손으로 만져 구조를 확인할 수 있도록 제작한 촉각 모형. 특별전은 주요 전시품을 촉각 모형으로 재현해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박두성의 작업은 1926년에서 멈추지 않았다. 전시장에는 그가 1954년 미국해외맹인재단의 볼터 박사에게 보낸 영문 점자 편지도 나온다. 한국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체계와 통신강좌, 점자기기의 필요성을 설명한 편지다. 1940년 조선맹아사업협회를 조직해 점자통신교육을 시작했던 그의 활동이 문자 발명 이후 교육과 보급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이 전시에서 자료만큼 중요한 것은 전시 방식이다. 점자의 역사를 유리장 안에 넣어 눈으로만 감상하게 한다면 꽤 이상한 전시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주요 자료와 족답식 제판기, 점자 타자기 미니피히트 등은 촉각 모형으로 다시 만들었다. 관람객은 전시품의 형태와 구조를 손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사말과 설명은 점자와 음성해설로 제공하고 시각장애인 관람객을 위한 전문해설도 운영한다. 전시의 주제가 '접근 가능한 문자'라면 전시 자체도 접근 가능해야 한다는 당연하지만 자주 잊히는 원칙을 지켰다.
훈맹정음 반포 100주년 특별전 ‘점에서 세상으로: 훈맹정음 100주년’ 포스터. 전시는 7일부터 내년 2월14일까지 인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열린다. 국립한글박물관포스터 역시 영리하다. '점에서 세상으로'라는 한글 제목과 'FROM DOTS TO THE WORLD'라는 영문 제목을 검은 점들로 찍어냈다. 글자를 읽기 전에 점의 존재부터 보인다. 장식처럼 흩어진 원들은 점자가 문자가 되는 최소 단위를 확대해 놓은 듯하다.
훈맹정음을 단순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편의 수단'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도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문자를 배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교육과 정보에 접근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전시는 훈맹정음을 한글의 구조를 점자로 옮긴 문자체계이자 시각장애인의 사회 참여를 넓힌 소통 수단으로 조명한다.
올해는 첫 '가갸날'이 만들어진 지 100년이자 훈맹정음 반포 100년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날 제정 100주년과 훈민정음 반포 580돌, 훈맹정음 반포 100주년이 겹치는 올해를 '한글의 해'로 정하고 관련 전시와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전시는 한글 점자의 완성된 체계만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박두성이 이를 고안하고 수정해나간 과정, 이후 점자교육과 보급 활동까지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주요 자료를 촉각 모형으로 제작하고 점자·음성해설을 제공해 전시 내용과 관람 방식에서도 접근성이라는 주제를 연결했다.
'점에서 세상으로: 훈맹정음 100주년'은 7일부터 내년 2월14일까지 인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