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탄생 120주년 기념전…유물 45점·상서 61점 등 106점 선보여
전시 전경(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6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전시 된 오동나무 상자들. 2026.10.6. laecorp@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보호를 위해 사재를 털어 수집에 나섰던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자신이 모은 문화유산을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 수집한 유물에 맞춰 오동나무 상자를 만들었다.
1930년대 경성의 장인들이 유물의 크기와 모양에 꼭 맞게 만든 상자는 개당 20∼200원에 달하는 비용이 들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이 20∼28원 정도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동나무 상자는 단순한 보관함이 아니었다. 간송의 스승인 오세창을 비롯해 이도영, 이한복, 일본 한학자 나가오 우잔 등 당대 감식가들은 간송의 부탁을 받아 작가와 작품 이름, 재료, 전래 내역, 입수 경위, 감상평 등을 상자에 먹글씨로 남겼다.
이처럼 미술품을 담은 상자에 남겨진 이 기록을 '상서(箱書)'라고 한다.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오동나무 상자는 약 700건이고 이 중 상서가 확인되는 것은 258건이다.
작품뿐 아니라 그 작품을 담았던 상자와 상서에 주목한 전시 '상서(箱書), 컬렉션을 읽다'가 오는 7일부터 12월 6일까지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열린다. 간송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로, 2024년 재개관 이후 이어온 3개년 기획전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유물 45점과 상서 61점을 비롯해 모두 106점을 선보인다.
김홍도 작 '낭원투도'[간송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단원 김홍도의 '낭원투도'는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이 불로불사의 복숭아를 얻는 장면을 묘사한 인물화다. 단원은 동방삭의 얼굴을 과도하게 긴 중국풍 신선의 기형적 모습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평범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간송은 1934년 이 그림을 오세창에게 보여줬고, 오세창은 작품을 감식한 뒤 "근래 보기 드문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오세창은 작품을 보관하는 상자 뚜껑 안쪽에 '단원 인물의 걸작으로 근래 보기 드문 가품(佳品)이다. 갑술년 초경, 비 내리는 창가에서 위창이 제하다'고 적었다.
안중식 작 '한산충무'[간송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안중식의 1918년 작 '한산충무'는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친 이순신을 그린 작품이다.
화면에는 전립을 쓰고 군복을 입은 이순신이 옆을 바라보는 모습이 담겼다.
이순신 초상은 전래 예가 극히 드문 데다 초상화의 대가 안중식이 남긴 작품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이순신은 안중식 특유의 둥글고 풍성한 얼굴과 치켜 올라간 눈매로 표현됐다.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안중식이 왜적의 침입에 맞서 나라를 지킨 이순신을 통해 민족정신을 표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오세창이 찬문을, 안중식에게 그림을 배운 이한복이 상서를 남겼다.
한 작품을 놓고 작가의 화제와 당대 감식가의 글, 제자의 상서가 함께 남아 있어 작품의 제작과 전승 과정을 보여준다.
김정희 작 '차호호공'[간송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도 있다. 30대에 쓴 '직성수구'에서는 역동적인 필치가 돋보이고, 50대의 '신취미태사잠유시첩'에서는 유려한 필치가 두드러진다. 60대의 '차호호공'에서는 무르익은 추사체의 개성이, 70대의 '호고연경'에서는 원숙한 예서의 경지를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을 담은 상자에는 오세창의 상서가 있다. 오세창은 단순히 작품의 제목만 적은 것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의 이름, 제작 시기, 재료와 형식, 작품을 감상하고 평가한 사람, 소장 경위 등의 정보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작품 자체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정보까지 상자에 남겨 작품의 이력과 가치를 후대에 전했다. 상서가 한 점의 작품에 대한 '이력서' 역할을 한 셈이다.
김시 작 '선록완월'[간송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 밖에도 신선도로 불리던 김시의 '선록완월', '이허주니금산수도'라는 상서를 통해 금가루를 사용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징의 '고사한거', 간송의 첫돌 사진 뒤편에 걸려있는 조석진의 '인물고실지도' 등도 만날 수 있다.
한편 간송미술관 보화각 정문에서는 조선시대 '석호상' 한 쌍을 만날 수 있다. 그동안 이곳을 지키던 것은 청나라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석사자상이었다. 간송미술관은 지난 1월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이 석사자상을 중국에 기증했고, 석사자상은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자리를 대신해 들어온 것이 석호상이다.
공처럼 둥근 얼굴에 몸을 한껏 세워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호랑이 '더피'를 닮았다.
이 석호상은 간송이 1935년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일본인 수집가 와타나베 가문으로부터 당시 1천200원에 구입한 것으로, 간송이 조선의 석조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수집에 나섰던 사례를 보여준다.
간송미술관 보화각 석호상(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보화각 정문에 놓인 석호상 한 쌍의 모습. 2026.10.6. laecorp@yna.co.kr
laecorp@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