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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오디세이>는 10월 1일 누적관객수 1185만 7160명을 기록했다. 아이맥스(IMAX) 상영관에서도 인기를 이어가며 역대 최다 관객을 모았다. |
| ⓒ 연합뉴스 |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킬링타임용으로, 어떤 이는 메마른 감정을 촉촉이 적시기 얻기 위해서, 어떤 이는 혼자 있는 어두운 공간이 필요해서,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풀리지 않는 실마리를 영화 속 타인의 인생을 통해서 찾기 위해서.
극장을 대신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늘어난 탓에, 앞서 언급한 이유는 다소 퇴색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만의 방에서도 비슷한 만족과 감동을 누릴 수 있다면 굳이 번거롭게 극장에 갈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극장에 간다면, 왜일까? 그것은 영화관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맥스(IMAX) 극장의 커다란 화면을 꽉 채운 스펙터클한 풍광, 집안의 작은 스피커로는 담아낼 수 없는 음악이나 효과음. 박진감 넘치는 사건의 전개에 필수적인 압도적 영상과 음향이 가정용 TV 화면이나 스피커로는 전달이 되지 않는 경우처럼 말이다.
현대인의 생활 반경은 의외로 좁다. 집, 학교, 직장, 마트, 그리고 어쩌다 주말에 자동차나 열차를 타고 다녀오는 근교 여행. 현대인의 생활 또한 그 루틴이 뻔하다.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패터슨>이나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가 인기를 누린 이유 또한 그 뻔한 생활의 루틴을 시 혹은 음악으로 채우는 버스 기사나 화장실 청소부 같은 평범한 주인공의 일상이, 우리들 자신의 일상에 잔잔한 빛을 던져주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는 모험의 시대가 아니다.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거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행위를 가리키는 모험은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가상의 모험,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모험을 즐긴다.
모험이 스스로 위험 속으로 찾아 나서는 행위라면, 재난이나 불행은 외부에서 들이닥치는 사건이다. 재난과 불행은 우리 자신의 것이라면 끔찍한 무엇이지만, 우리가 관조할 수 있는 가상 현실 속의 일인 한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극장에서 우리의 만족도는 가상 현실 속 사회적 재난이나 타인의 불행에 비례한다. 그 재난이나 불행이 마침내 해피엔드로 해결될 때, 그 결말이야말로 모든 관객이 기대해 마지않는 무의식중의 소망이다.
원작에는 없는 전쟁 영웅의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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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오디세이>의 포스터는 불타는 트로이 앞에 서 있는 오디세우스를 통해 화염에 휩싸인 전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 ⓒ 유니버설 픽처스 |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는 지난 8월 5일 개봉한 이후 1100만 명 넘는 관람객을 채웠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 것일까? 또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물론, 전 과정 IMAX-70mm 필름, 컴퓨터그래픽(CG)을 배제한 실사 구현, 그리스, 모로코, 아이슬란드 등지의 현지 로케, 고대를 연상시키는 악기와 선박 등의 갖가지 영화 소도구, 맷 데이먼, 앤 해서웨이 등의 유명 배우뿐 아니라 흑인 랩 가수, 성전환수술 배우, 헬레나역의 흑인 여배우 등 논란과 화제의 중심에 있는 배우들의 존재가 한몫 했을 것이다.
원작인 호머의 <오디세이>에는 '전쟁, 모험, 사랑, 성장'이라는, 이야기가 담을 수 있는 모든 요소가 담겨 있다. 모험 속 재난과 불행 그리고 행복한 결말까지 관객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는 이야기. 하지만 영화 <오디세이>가 세계의 수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낸 것은,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에는 원작 서사시에는 없는 게 있다. 그것은 참회, 바로 전쟁 영웅의 참회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IMAX 영화관 스크린을 꽉 채운 해안가에서 시작한다. 넓고 황량한, 바닷물결이 덧없이 밀려왔다 밀려 나가는 해안가에 덩그러니 놓인 목마. 실물 크기의 목마는 넓은 화면 속에선 버려진 나무토막 같다. 파도가 휩쓸릴 때마다 나무 조각이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위로 강렬하면서도 원시적인 북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시, "한 얼굴, 한 함대, 한 전쟁, 한 남자, 한 생각, 한 계략"
이것은 이타카 왕궁 연회장에서 노래하는 음유시인의 시이다. 이 시와 트로이 해안가의 영상을 교차 편집한 장면은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짧은 순간, 어떤 의미로 완성된다. 오디세우스가 지략으로 승리한 전쟁, 그것은 저 넓고 황량한 바닷가에 왜소하게 놓인 트로이목마처럼 덧없다는 것. 음유시인의 노래 속 '한 남자'의 의미는 오디세우스가 신도 영웅도 아닌, 한 인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원작인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모험 속에 빠지고, 자신의 정복욕과 오만 탓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고난을 자초한 인물이다. 놀런의 <오디세이>는 다르다. 요정 칼립소의 품에서 깨어나는 오디세우스는 기억을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는 기억 상실자이다.
그가 조금씩 되찾아 가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펼쳐지는 모험은, 원작과 달리 '부족한 식량과 물'을 구하기 위해서 시작되었고 인간의 왜소함, 탐욕, 어리석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암울한 전시장 역할을 한다.
처음 도착한 섬의 동굴 속 실물과 같이 만들어진 외눈박이 괴물을 두고 나누는 오디세우스와 부하의 대화, "(괴물이) 개미(인간인 우리)와는 대화를 안 한다"라는 말은 괴물의 시선에서는 인간이 개미처럼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은회색 판금 갑옷을 입은 식인 거인족에게 쫓기는 오디세우스와 그 부하들의 모습은 판금 갑옷에 쉽게 바스러질 왜소하고 허약한 인간 존재를, 마녀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에게 했던 항변, "(돼지로 변한) 당신 부하들은 강간하고 약탈하러 온 탐욕스러운 자들이에요"라는 말은 전쟁의 폭력성과 탐욕을 일깨워준다.
키르케의 조언으로 망자의 해변 하데스에 가게 된 오디세우스는 죽은 시논을 만난다. 시논, 그는 오디세우스 죄책감의 트리거이다. 영화의 첫 장면 트로이의 목마 곁에서 등장했던 그는 귀족 안티노오스 대신 참전한 양치기 아들이면서 자신의 목숨과 그 대가로 기대한 부친의 목숨마저 잃었던 전쟁의 희생자, 대부분의 전쟁에서 희생되기 마련인 가진 것 하나 없는 양민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트로이목마를 선물로 위장하기 위해 쓰인 미끼임을 뒤늦게 알게 된 시논의 항변은 오디세우스에게 트로이전쟁의 부도덕함을 환기하고 동시에 그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게 한다.
이후 세이렌이 노래하는 바다를 지나갈 때 기둥에 묶인 채 오열하는 맷 데이먼의 리얼한 연기, 거대한 소용돌이 카리브디스와 바다 괴물 스킬라가 있는 바다를 통과하면서 부하의 절반을 잃는 장면, 태양신의 섬에서 금기를 어기고 소를 잡아먹는 부하들을 대변하여 에우릴로코스가 했던, "어차피 굶어 죽으나 신의 노여움을 사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말 등은 모두 생존에 내몰린 인간의 한계상황을 말해준다.
이타카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하데스에서 만난 아가멤논의 충고에 따라 자신을 걸인으로 위장한 채 페넬로페를 대면한다. 마침내 오디세우스는 털어놓는다. "그가 목마의 배를 열고 나와서 트로이의 성문을 열었을 때, 10년간 쌓인 분노가 하룻밤 사이에 도시로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면요? 바로 그날 밤, 그가 깨달아버렸다면요? 불길과 무질서와 고통 사이를 걸어가면서, 그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아버렸다면요?"
무엇을 상상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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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귀향하는 길에 고난과 모험을 겪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오디세우스가 전쟁에 대한 죄책감에 기억을 잃어버린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전쟁 후 외상증후군을 앓는 사람처럼,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늘 짓눌린 표정을 하고 있다. |
| ⓒ 유니버설 픽처스 |
전쟁 승리자이자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느꼈던 통렬한 죄책감. 그가 페넬로페를 찾아서 귀향하는 과정은 사실은 전쟁 승리자이자 가해자로서 자신이 깊이 묻어둔 죄책감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영화는 구혼자들과의 싸움 끝에 등에 창을 맞고 페넬로페 품에서 죽어가는 오디세우스를 보여준다. "(죽는 게 아니라) 떠나는 거요"라는 그의 말과 교차 편집된, 페넬로페와 함께 서쪽 나라로 가는 배 위에 몸을 실은 오디세우스의 쓸쓸한 눈빛. 그 눈에 비친 왕위를 물려받은 아들 텔레마코스의 모습.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무엇을 상상해야 할까?
전쟁에 대한 처절한 참회와 죽은 자들에게 못다 한 애도? 평화로운 권력 이양에 대한 환상? 20년을 기다린 페넬로페와의 사랑의 완성? 사랑의 완성이라기엔 쓸쓸하고 평화로운 권력 이양으로 보기에는 구혼자를 물리친 싸움에서의 피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영화 <오디세이>에 대한 관객들의 열광에는 기상천외한 고대의 모험담이 안겨주는 탐험과 전쟁과 파괴의 대리만족과 함께, 전쟁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왜소함, 어리석음, 탐욕, 그리고 파괴와 살육에 대한 통렬한 참회 욕구라는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욕구의 만족이 있다.
IMAX 상영관의 커다란 화면과 CG가 아닌 실사로 구현되어 실제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영상이, 왜소해진 현대인의 눈앞에, 고대 영웅의 모험과 참회를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현재의 일처럼 펼쳐놓는 것이다. 그런데 모험과 결합한 전쟁 참회라니, 그것은 가능한 것일까?
여기에는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세계 곳곳에서 국지전으로 저질렀던 전쟁의 참화와 이에 대한 미국인의 죄책감이 겹쳐 보인다. 그 참회가 가해자의 가증스러운 기만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그나마 가해자 안에 한 조각 남은 양심이라고 보아야 할까? 또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 안에서 가슴 조이는 모험을 느낄까? 아니면 전쟁에 대한 뼈아픈 참회를 느낄까? 이것을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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