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려오지 말고 직접 가자”, 칠드런스퓨처·한국 의료진·PCMC ‘삼각 협력’
휴가 반납한 9인의 ‘K-하트’ 마취과 공백에도 “남은 아이 끝까지 수술”
일회성 봉사 넘어 자생력 심다 “수술 대기 줄 줄여 아이들에게 미래를”
서동만(왼쪽) 교수를 비롯한 한국 의사들이 6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 케손시티 PCMC에서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하고 있다. 6일(현지시간) 오전 7시 30분, 필리핀 케손시티의 필리핀국립아동병원(PCMC) 3번 수술실 문이 열리자 현지 의료진들이 하나둘 들어서며 기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들 틈에 한국에서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양국 의료진은 수술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선천성 심장병을 앓는 도이도이 자일베(2)양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수술실로 들어섰다.
아이가 차가운 수술대에 눕자 마취과 전문의 이윤경 교수는 모니터 속 심전도와 맥박산소포화도 수치를 매초 예의주시하며 조심스럽게 마취제를 투여했다. 최하영 간호사가 멸균 소독된 수술 기구를 가지런히 정돈하는 사이, 현지 체외순환사는 인공심폐기 점검을 마쳤다는 사인을 심장혈관 흉부외과 김상필 교수에게 보냈다.
최하영(오른쪽) 간호사가 멸균 소독된 수술 기구를 정리하던 중 필리핀 의료진과 대화하고 있다. 수술 준비에만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오전 8시 22분, 집도의 서동만 이화여대 명예교수(부천세종병원 진료 교수)가 수술실로 들어서며 “굿모닝”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국경을 넘어 꺼져가는 심장들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온 ‘소아 심장의 대가’다.
서 교수는 전날인 5일에도 이미 두 아이의 심장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작은 심장을 잠시 멈춘 뒤 체외 순환기로 피를 돌리며 좁아진 혈관을 넓히고 심장에 뚫린 결손 부위를 메우는 정밀한 수술이 마침내 시작됐다.
이번 수술의 첫 환자로 선정돼 전날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중환자실(ICU)에서 회복 중인 안젤로 에반겔리오(9)군의 삶은 필리핀 환아들의 시린 현실을 대변한다.
안젤로는 심실중격결손 등 복합 기형을 안고 태어났다. 통상 만 3세 이전에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차례를 얻지 못했다. 조산아로 태어나 폐렴까지 앓았던 아이는 늘 숨이 차 친구들과 뛰어놀지도, 학교에 제대로 가지도 못했다.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일하는 아버지 아나클레토(45)씨와 주부인 어머니 마리셀(43)씨에게 수술비는 닿을 수 없는 장벽과도 같았다.
김대환(왼쪽) 필리핀 선교사가 6일 필리핀 마닐라 PCMC에서 안젤로의 어머니 마리셀씨에게 서울 주님의교회가 준비한 위로금을 전달하고 있다. “돈이 없어 병원에선 손을 못 쓴다는 걸 알면서도 늘 병원에 가 증상만 누그러뜨리는 약을 타 먹였습니다. 가슴의 구멍은 약으로 막을 수 없는데…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매일 눈물만 삼켰습니다.” 어머니 마리셀씨의 말이었다.아버지는 “그저 아이가 건강히 회복해 집으로 함께 돌아가는 게 유일한 기도”라고 했고, 어머니는 “이제 친구도 사귀고 학교도 갈 수 있게 돼 꿈만 같다. 커서 자신처럼 아픈 아이들을 돕는 의사나 봉사자로 자라길 바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인구 1억 2000만 명을 웃도는 필리핀에서는 해마다 2만여명의 선천성 심장병 환아가 태어난다. 하지만 적기에 수술을 받는 비율은 15%를 밑돈다. 열악한 인프라와 의료진 부족, 비싼 병원비 탓에 해마다 수천 명이 수술 대기 줄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목숨을 잃는다.
마취과 전문의 이윤경(가운데) 교수가 6일 필리핀 PCMC에서 심전도 기계를 응시하며 마취제를 조심스럽게 주입하고 있다. 한국 의료진이 마닐라 수술대에 서기까지는 국경을 넘은 헌신과 ‘삼각 협력’이 있었다. 저개발국 어린이를 돕는 재단법인 칠드런스퓨처(이사장 김도묵)는 지난 3년간 필리핀 환아 9명을 한국으로 초청해 수술을 지원했고 서 교수 역시 집도의로 힘을 보태왔다.그러나 1인당 수천만 원에 달하는 비용과 비자 발급, 이동 중 환아의 상태 악화 등 국내 초청 방식은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이에 ‘아이들을 데려오는 대신 우리가 직접 현지로 가 더 많은 생명을 살리자’는 뜻이 모였다.
심장혈관내과 양현숙 교수가 PCMC와의 가교를 놓았다. 한국 의료진은 필리핀 전문직규제위원회(PRC)로부터 특별임시허가(STP)를 취득해 합법적 의료 절차를 마쳤다.
지난달 초에는 PCMC 간호사 3명이 부천세종병원에서 사전 연수를 받으며 손발을 맞췄다. 여기에 서울 주님의교회(김화수 목사)가 김대환 선교사를 통해 환아 가정에 격려금을 전하며 힘을 실었다.
한국 의료진은 닷새간 10명의 어린이를 수술할 계획이었으나 한국 마취과 교수의 귀국 일정과 현지 대체 인력 공백으로 수술은 7명으로 조정됐다. 그러나 서 교수는 남은 아이 3명을 두고 발길을 돌릴 수 없어 홀로 현지에 남아 현지 수술팀을 직접 꾸려 끝까지 집도하기로 했다.
이번 미션에는 서동만 김상필(경희대병원) 교수와 건국대병원 양현숙 이윤경 교수 등 의사 4명과 정옥연(경희대병원) 간호사를 비롯해 이화여대 서울병원 최하영 이재영 이문정 간호사, 엄명옥 체외 순환사 등 9명이 휴가를 반납하고 동행했다.
서동만(왼쪽) 교수가 6일 필리핀 PCMC에서 이 병원 의사와 대화하고 있다. 서 교수는 “PCMC는 지난 5년간 소아 심장 수술을 60건 남짓밖에 하지 못했는데 현지 의사들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스템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단발성 봉사로 끝내지 않고 칠드런스퓨처의 비전과 양국 협업을 통해 이 모델을 안착시키는 바람이 있다”고 강조했다.세실리아 간 PCMC 병원장 역시 “이번 협업을 통해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위한 양국 협력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아이들이 건강을 되찾아 가족과 지역사회가 다시 일어설 희망도 봤다”며 감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