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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협객인데 그림엔 왜 두 명?”…작품 ‘상자’에 담긴 비밀

요약
  • 간송미술관은 전형필 탄생 120주년을 맞아 미술품을 담은 오동나무 상자의 기록인 '상서'를 주제로 한 기획전 '상서, 컬렉션을 읽다'를 개최한다.
  • 이번 전시에서는 상서와 유물 총 106점이 공개되며, 작품의 수집 내력과 제작 배경 등 간송 컬렉션의 형성 과정을 조명한다.
간송미술관 ‘상서(箱書), 컬렉션을 읽다’
상서·유물 등 106점…간송 정신 보여줘
“상서는 간송이 남긴 ‘조용한’ 편지”
김정희 ‘직성수구’. [간송미술문화재단] 김정희 ‘직성수구’. [간송미술문화재단]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곧은 소리는 대궐 아래 머무르고(直聲留闕下) 빼어난 구절은 하늘 동쪽에 가득하다(秀句滿天東).”

‘직성수구’는 추사 김정희가 30대 중반이던 1820년 무렵, 청나라 문인 고순에게 보낸 행서 대련이다. 황제에게 곧은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고순을 흠모하던 김정희는 직접 시를 지어 그에게 전했다. 묵직한 필치의 서예는 일제강점기 최남선의 매부였던 박석윤이 북경의 시장에서 구입한 뒤, 1939년 이전에 간송 전형필이 입수했다.

하나의 미술품이 간직한 오래된 이야기와 여정은 작품을 담은 오동나무 상자를 통해 알려졌다. 뚜껑 위와 안쪽을 빼곡하게 채운 글씨에는 작가명, 작품명부터 제작 기법, 재료, 평가, 전래 내력까지 담겨 있다. 상자를 열기도 전에 그 안에 담긴 작품의 생애를 읽을 수 있는 ‘상서(箱書)’다.

간송미술문화재단과 간송미술관은 올해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 탄생 120주년을 맞아 오는 7일부터 12월 6일까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보화각에서 2026년 가을 기획전 ‘상서(箱書), 컬렉션을 읽다’를 개최한다.

김영욱 간송미술관 전시교육팀장은 6일 기자간담회에서 “간송이 어떤 경로를 통해 유물들을 입수했고,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등을 살펴보면서 2024년 미술관 재개관 이후 간송 컬렉션의 형성 과정을 추적해 온 3개년 기획전을 매듭짓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전시는 유물 자체를 넘어 유물을 담은 ‘상자’와 그 위의 ‘기록’으로 시선을 확장하며 수집과 보존에 얽힌 숨은 역사를 조명한다.

일본으로 유출되던 문화유산을 지켜낸 간송은 스승 오세창의 엄격한 감식을 거쳐 유물의 가치를 바로잡은 뒤, 그 이야기가 후대에 온전히 전해지도록 오동나무 상자 위에 기록을 남기는 ‘상서’ 제작을 기획했다.

그는 전문 장인들에게 각 유물의 규격에 맞는 오동나무 상자 제작을 의뢰했다. 상자 하나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20~200원대로, 당시 쌀 수십 가마니 값에 달했다.

오세창-장오원신선도쌍폭(장승업-송하녹선, 추정귀선 상서). [간송미술문화재단] 오세창-장오원신선도쌍폭(장승업-송하녹선, 추정귀선 상서). [간송미술문화재단]

1930년부터 간간이 쓰이던 상서는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조성하고 종로 본가에 있던 소장품을 이전하면서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오동나무 상자는 700여 건이며, 이 중 지금까지 확인된 상서는 약 258건이다. 이번 전시에선 상서 30건 61점과 유물 21건 45점 등 총 51건 106점이 공개된다. 상서의 필적은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자 간송의 스승인 오세창과 서화계 중진 이도영, 안목 높은 이한복, 일본의 한학자 나가오 우잔 등 네 사람이 주로 남겼다.

김 팀장은 “상서는 상자를 열지 않아도 그 안에 보관된 유물을 짐작하게 하며, 연대가 적힌 상서는 작품 제작 연대의 하한을 알려 주고 감식가의 필적과 인장은 진위 판단의 강력한 근거가 된다”며 “수장자의 의도와 형성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문서화된 공인 체계”라고 설명했다.

상서는 작품 고유의 제목이 만들어진 과정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산수’, ‘인물’처럼 포괄적인 명칭으로 작품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나, 상자에 적힌 글을 통해 구체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대표적으로 김시의 ‘선록완월’은 그동안 단순히 ‘신선도’로 불리다가 상서에서 ‘고사완월’이라는 본래 이름을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를 통해 현재의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재료를 보여준 사례도 있다. 이징의 ‘고사한거’를 보관한 상자에는 ‘이징이 금가루로 산수화를 그렸다’는 글씨가 적혀 있다.

오원 장승업의 작품은 상서가 단순한 작품 목록을 넘어 미술사의 빈틈을 메우는 기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상서에는 장승업이 ‘풍진삼협도’(어지러운 세상의 세 협객)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정작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두 명뿐이다. 이에 대한 답은 안중식의 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안중식이 ‘한 명의 협객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오원은 ‘규염객인데 뒤에 있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답했다.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림에서는 통상 세 인물이 등장하지만 장승업의 작품에는 두 명만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조석진이 중국 고사 속 인물과 일화를 그린 ‘인물고실지도(人物故實之圖)’는 1907년 간송의 첫돌 사진 뒤편에 세워져 있던 12폭 병풍으로 확인된 작품이다. 이는 간송이 훗날 수집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1907년 이전부터 종로 본가에 소장되어 있었던 귀중한 초기 유물임을 증명한다.

조석진 ‘인물고실지도’. [간송미술문화재단] 조석진 ‘인물고실지도’. [간송미술문화재단]

김홍도의 ‘낭원투도’에 남겨진 오세창의 상서는 “단원 인물의 걸작으로, 근래 보기 드문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극찬을 담고 있다.

안중식의 ‘한산충무’는 보름달이 뜬 밤 한산도 진영의 수루에 홀로 앉아 시름에 잠긴 이순신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오세창과 정대유가 이순신의 공적을 기리는 글을 남겼고, 안중식의 제자 이한복이 상서를 남겼다.

전영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은 이번 전시에 대해 “아버님은 유물을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름과 내력을 기록으로 남겨 우리 문화의 가치를 후대에 전하고자 하셨다”며 “상서는 단지 상자에 적힌 글이 아니라, 아버님께서 먼 훗날의 우리에게 남기신 조용한 편지이자 문화에 대한 믿음의 증언”이라고 밝혔다.

전인건 간송미술관 관장은 “그동안 간송 컬렉션을 대표하는 작품 자체를 조명해 왔다면, 이번 전시는 컬렉션이 어떠한 기준과 체계 속에서 형성·공인·전승됐는지를 보여준다. 학술적이면서도 학술의 바탕이 되는 간송의 정신을 보여주는 전시”라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함께 교류한 사람들과 간송의 마음, 그 당시의 정신을 보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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