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월 30일(이하 현지 시간) 국가두마(하원) 개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크렘린궁 제공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월 30일(이하 현지 시간) 국가두마(하원) 개원식에서 강조한,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연설 중 일부 대목이다. 러시아 국가두마는 9월 18~20일 실시된 선거에서 새로 선출된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식을 가졌다. 푸틴 대통령을 지지하는 집권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은 전체 의석 450석 가운데 349석을 차지해 개헌선(301석)을 훌쩍 넘으며 압승했다.
복지·교육 예산 줄여 전시 경제체제 상시화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처음 치른 이번 선거에는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 루한스크, 헤르손, 자포리자주 등 4개 지역 주민들도 참여했다. 선거 결과에 고무된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과 점령지 병합을 정당화하면서 전쟁 승리를 위해 국가적인 단결 강화와 함께 총력전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푸틴 대통령은 10월 1일 내년 국방예산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최대 규모로 편성해 국가두마에 제출했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내년 국방비가17조 루블(약 278조7700억 원)이며 이는 당초 예산안에 잡혀 있던 13조5000억 루블(약 213조4400억 원)보다 27%나 늘어난 규모라고 지적했다.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7% 이상으로 추정되는 내년 국방예산은 올해 12조1000억 루블(약 191조3010억 원)보다 41%나 증가한 규모다. 로이터통신은 치안 유지, 점령지 지원 등 전쟁 관련 비용까지 합치면 실제로 내년에 집행될 국방예산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며 향후 3년간 국방비 총액은 50조 루블(약 790조5000억 원)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의 국방예산 증액은 전쟁 승리를 위해 전력을 대폭 강화하려는 의도다. 다시 말해 러시아가 평시 경제로 복귀하는 것을 포기하고 사실상 전시 경제체제를 상시화하겠다는 의미다.
러시아 정부는 다른 분야들의 예산을 대거 감축하고 세수를 확대하는 조치에도 나서고 있다. 연금, 출산 수당 등을 포함한 복지예산을 7%, 교육예산을 6%, 의료예산을 6.8% 감축할 계획이다. 도로 건설 등 인프라 보조금도 7.4%나 삭감했다. 각종 세금은 인상한다. 세계 2위 금 생산국인 러시아는 내년부터 금 생산업체에 20%, 금속업체에 30% 초과 이익세를 새로 부과한다. 예금이자와 주식 매매차익 같은 개인 금융소득에 누진세도 매긴다. 또 서방 등 ‘비우호국’ 투자자가 받는 배당금 세율을 15%에서 35%로 2배 넘게 올리기로 했다. 이와 함께 전기·가스·수도 등 종합 공공서비스 요금을 평균 11%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국민은 반발하지만 통합러시아당의 대승으로 국가두마는 내년 국방예산 등 예산안과 세수 증액안을 그대로 승인할 것으로 전망된다. 야니스 클루게 독일국제안보연구소(SWP) 연구원은 “이 조치들을 모두 합치면 GDP의 0.5%p 안팎이 걷힌다”며 “큰 액수는 아니지만 러시아 재무부는 추가 세수를 찾으려 돌멩이 하나까지 뒤집어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2024년 9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버스 정류장에서 한 남성이 러시아군 복무 계약을 독려하는 모병 광고판 옆에 서 있다. 뉴시스 |
러시아 정부가 ‘마른 수건 짜내기’에 나서는 이유는 국가 재정의 핵심축이던 석유·가스 수출이 서방의 제재 영향으로 감소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제재를 피해 수출하더라도 할인 판매가 불가피해 수익성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러시아 경제는 전쟁 초기 군수산업 확대에 힘입어 높은 성장률을 유지했다. 2023년과 2024년에는 각각 4% 성장해 유로존 평균을 웃돌았지만 지난해 성장률은 1%로 둔화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6년 러시아 경제성장률을 0.8%로 낮춰 전망했다. 소비지표도 악화하고 있다. 신차 판매는 지난해 38% 급감했고, 올해 들어서도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다. 공식 물가상승률은 5%대 중반이지만 체감 물가는 이보다 훨씬 높다. 알렉산더 콜리안드르 유럽정책분석센터 선임연구원은 “러시아 정부가 전쟁 비용을 충당하려고 국가 경제 미래를 담보로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최근 군 병력 정원을 확대하는 조치도 내렸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군 전체 정원을 244만1630명으로 늘리고, 전투 병력을155만500명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러시아 독립 언론매체 메두자 집계에 따르면 3·6·7월에 이은 네 번째 증원으로, 7개월 동안 늘어난 군 병력 정원은 모두 5만500명에 달한다. 러시아군 병력 정원은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반년 뒤인 2022년 8월 115만 명이었는데 4년 만에 40만 명(35%)이 늘어났다.
서방 군사 전문가들은 이를 “사실상의 동원령”이라고 지적한다. 러시아 정부는 징집 기피를 억제할 목적으로 18~30세 남성에 대해 부동산 거래 등에 병역 돤련 서류 제출을 요구하는 규제를 추가 도입했다. 해당 대상자는 주택담보대출을 받거나, 부동산을 사고팔거나, 사업체 소유자 등록을 할 때 반드시 병역 관련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러시아 병역의무법 제22조에 따르면 병역 등록을 했거나, 병역 등록 의무가 있지만 등록하지 않았고 예비역에도 속하지 않은 18~30세 남성은 군 복무를 위한 징집 대상이다. 이 같은 조치는 대규모 군사 동원을 준비하는 러시아 정부의 사전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군은 최근 들어 보충되는 신규 병력보다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 영국 국방정보국이 9월 28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이날을 기준으로 24시간 동안 2090명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군의 하루 사상자 중 가장 큰 규모다. 영국 국방정보국은 “러시아군의 사상자 발생률이 여름 이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며 “러시아가 공격 작전을 대폭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군 총참모부도 러시아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친 9월 인명 손실을 4만6230명으로 추산했다. 이는 올해 들어 월간 최대치로, 1월보다 45.8% 늘어난 수치다. 이에 따라 러시아군의 누적 사상자 수는 150만 명을 넘어섰다.
병력 손실에 정원 확대… ‘스텔스 동원’ 관측서방 정보기관들은 러시아 정부가 은밀하게 병력 충원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병력 동원령을 내리면 일부 국민이 외국으로 탈출할 것이 분명한 만큼 러시아 정부로선 비밀리에 병력 충원에 나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러시아가 2022년 부분 동원령을 내렸을 당시 러시아인 100만여 명이 국외로 떠난 것으로 추산됐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숙련 인력이었으며, 이후 러시아로 돌아온 사람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푸틴 대통령이 앞으로 공식 발표 없이 병력을 추가로 끌어모으는 이른바 ‘스텔스 동원령’을 준비하고 있다고 서방 정보기관들은 지적했다. 계약병 모집을 늘리거나 재판 대기자, 채무 연체자, 대학 부적응자 등을 강제로 입대시키는 계획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연말까지 30만 명, 내년에도 30만 명을 추가 동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북한이 러시아의 요청으로 병력 1만 명을 추가로 파병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이 이처럼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방비 증액과 병력 증원, 세수·국가부채 확대 등을 동원해 전쟁에 ‘올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월 30일(이하 현지 시간) 국가두마(하원) 개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크렘린궁 제공
2024년 9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버스 정류장에서 한 남성이 러시아군 복무 계약을 독려하는 모병 광고판 옆에 서 있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