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의 모습. 2025.10.24 ⓒ 뉴스1 이호윤 기자한국거래소가 시가총액이 기준에 못 미치는 기업을 증시에서 퇴출시키는 절차를 7일 전면 중단했다. 지난 2일 법원이 이 제도가 위법하다고 판단하며 제동을 걸자 내린 조치다. 정부가 자본시장 선진화의 핵심으로 내세웠던 부실기업 퇴출 정책이 시행 석 달 만에 멈춰 선 것이다.
거래소는 이날 보도자료에서 “관리종목 지정 후 후속 상장폐지 절차는 이달 2일부터 진행하지 않고 있고, 향후에도 유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관리종목은 ‘퇴출 후보’를 뜻하는 경고 딱지다. 7일 오후 기준 시총 미달로 관리종목에 지정된 상장사는 유가증권시장 19곳, 코스닥 40곳이다. 이들은 거래정지나 정리매매 같은 다음 단계로는 넘어가지 않는다.
문제는 이미 문이 닫힌 기업이다. 거래소는 지난 2일 이전에 상장폐지가 결정돼 거래가 멈춘 8곳은 매매거래정지 상태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유가증권시장 2곳(주연테크·SHD)과 코스닥 6곳(신라에스지·골드앤에스·케이엠제약·핀텔·세진티에스·에이에프더블류)이다. 주주들은 주식을 팔 길이 막힌 채 상장폐지도 되지 않은 상태로 묶였다. 같은 기준에 걸린 기업이 며칠 차이로 거래 유지와 정지로 갈리자 졸속 탁상행정 비판이 나온다.
법원 “이의신청 기회도 없이 시행 앞당겼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2일 주연테크와 케이엠제약이 거래소를 상대로 낸 상장폐지 결정 효력정지 가처분을 각각 받아들였다. 두 회사의 퇴출은 본안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멈추고 정리매매도 진행되지 않는다. 재판부는 시총만 미달했을 때 이의신청과 소명 기회를 막은 조항, 적용 시기를 앞당긴 부칙 조항이 비례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봤다. 비례의 원칙은 ‘목적이 정당해도 수단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법 원칙이다.
재판부는 그 근거로 먼저 “기준을 대폭 올리면서도 의견진술이나 이의신청 기회를 주지 않았고, 이는 상장사의 절차참여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점을 들었다. 시총 미달은 숫자만 보고 자동으로 퇴출하는 사유여서 이의신청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회생 조건의 타당성이 부족한 점이 지적됐다. 관리종목이 된 기업은 시총을 기준 위로 되돌려야 딱지를 뗄 수 있다. 예전에는 90거래일 안에 시총이 기준을 넘은 날이 연속 10거래일을 포함해 누적 30거래일만 되면 됐다. 바뀐 규정은 기준을 넘는 상태를 45거래일 연속 유지하도록 했다. 재판부는 거래소가 이 45거래일이 왜 타당한지 실증 자료를 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은 시행 시기다. 거래소는 코스닥 200억원과 코스피 300억원 기준의 적용일을 모두 내년 1월에서 지난 7월로 앞당겼다. 코스닥 300억원과 코스피 500억원 기준도 2028년 1월에서 내년 1월로 1년 당겼다. 규정은 지난 5월 개정돼 두 달 만에 시행됐다. 재판부는 “공익적 목적이라는 추상적 설명 외에 구체적 필요성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했다. 기존 일정에 맞춰 시총 회복 계획을 세운 기업이 차질을 빚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정부가 지난달 4일 추가 상향 적용을 내년 7월로 다시 미룬 사실도 근거로 들었다. 급하다며 당겼다가 다시 미룬 것이 조기 시행의 명분을 스스로 허물었다는 뜻이다.
“트로피만 노리고 서두르다 체해”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당국이 준비가 덜 된 정책을 성급하게 밀어붙이다가 엎어졌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김용범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 1월 28일 “대통령이 세계 최고 수준의 자본시장 제도를 목표로 제도 전반을 점검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다음 날 구윤철 전 경제부총리는 확대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부실기업 신속 퇴출 방침을 내놨다. 이재명 대통령은 같은 날 오후 본인 X 계정에 그 기사를 공유했다. 증권거래소를 일종의 백화점에 비유하며 “상품 가치 없는 썩은 상품, 가짜 상품이 많으면 누가 가겠느냐”고 했다. 이어 “상품 정리부터 확실히 하고 좋은 신상품을 신속 도입해 고객 신뢰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라고 적었다.
2주 뒤인 지난 2월 12일 금융위원회와 거래소는 상향 주기를 1년에서 반년으로 줄인 상장폐지 개혁 방안을 내놨다. 법원이 위법으로 본 부칙이 이때 만들어졌다. 코스닥 시총 기준은 작년 말까지 40억원이었다가 지난 1월 150억원, 지난 7월 200억원으로 일곱 달 만에 다섯 배 강화됐다. 이 대통령은 지난 7월 15일 금융위 업무보고에서도 “거의 돌덩이가 돼버린 기업은 골라내야 하지만 저항 때문에 쉽지 않다”며 “그래도 과감하게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반드시 필요한 조치는 저항이 있더라도 신속하게 도입해야 한다”고도 했다. 다만 같은 자리에서 부작용이나 혼란이 예상되는 사안은 신중히 접근하라고도 했다.
거래소가 재판에 낸 자체 분석으로도 2024년 말 기준으로 300억원에 못 미치는 코스닥 상장사는 94곳이었다. 문제는 이 기업들의 생사를 시총이라는 단순한 지표 하나로 재단하려 했다는 점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좀비 기업을 걸러내야 한다는 방향 자체는 맞지만 금융당국이 준비 없이 트로피만 노리고 서두르다 체한 것”이라고 했다.
정책 신뢰 흔들, 소송 확산 가능
미숙한 졸속 행정에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퇴출 대상 기업의 법적 대응은 번지고 있다. 법원이 개별 회사의 사정이 아니라 규정 자체의 절차를 문제 삼은 만큼, 같은 규정으로 퇴출 절차를 밟는 기업이라면 주연테크·케이엠제약처럼 퇴출을 멈출 수 있다. 핀텔과 골드앤에스도 이미 거래소의 상장폐지 결정에 가처분을 냈다.
정부의 쭉정이 솎아내기 정책이 성공하면 코스닥이 오를 걸로 보고 들어온 개인 투자자들도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한 투자자는 “정치적 업적 추진 과정에 코스닥 투자자들만 놀아난 꼴”이라고 말했다.
거래소는 법원 결정에 이의신청을 내겠다는 입장이다. 법원이 관리종목 지정의 효력을 멈춰달라는 부분은 기각하고 상장폐지 결정에 대해서만 받아들였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지난 7월 시행된 관리종목 지정 기준은 그대로 적용된다. 시총이 유가증권시장 300억원, 코스닥 200억원을 30거래일 연속 밑돌면 관리종목이 된다는 규정이다. 앞으로 관리종목은 계속 늘어난다는 뜻이다.
주가 1000원 미만인 ‘동전주’를 퇴출하는 규정도 그대로다. 7일 기준 동전주 사유로 관리종목에 지정된 상장사는 유가증권시장 6곳, 코스닥 32곳이다. 시총과 주가 두 기준에 모두 걸린 기업은 유예와 무관하게 퇴출 절차를 밟을 수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업의 절차적 권리를 어디까지 보장할지 논란이 불거진 만큼 제도 보완 가능성이 커졌다”며 “법원의 본안 판단과 거래소의 대응에 따라 상장폐지 제도의 향방이 갈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