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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9월 1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송전망 건설 수용성 제고 방안 발표 브리핑을 하고 있다. |
| ⓒ 기후에너지환경부 |
지난 9월, 기후에너지환경부(아래 에너지부)는 송전망 건설 과정에서 불거지는 주민 반발과 갈등을 해결하겠다며 '송전망 건설 수용성 제고방안'이라는 새로운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이 대책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이렇습니다.
"첫째, 새롭게 건설하는 철탑을 최대한 줄일 계획이다. 신설 선로(2회선)를 기존 선로(2회선)와 합쳐 하나의 철탑(4회선)으로 통합하고, 별도로 계획된 신설 선로 역시 하나의 철탑에 통합 설치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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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민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송전망을 건설하겠다는 기후에너지환경부의 보도자료. 하지만 주민 피해 최소화는 불가능합니다. |
| ⓒ 기후에너지환경부 보도자료 |
정부는 이렇게 선로를 합치면 개별 건설 방식보다 신설 철탑을 최대 40%(약 2214기)나 줄일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철탑 수가 획기적으로 줄어드니 자연스레 건설 비용도 절감되고 주민 피해도 최소화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4회선 통합, 지중화… 현실성 없는 대책들
일단 흉물스러운 철탑 수가 줄어든다니 솔깃합니다. 보도자료 내용만 언뜻 보면 기존 2회선 철탑에 전선 두 줄만 더 얹으면 되는 간단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기존 2회선 철탑을 완전히 철거하고, 그 자리에 4회선용 철탑을 새로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2회선과 4회선 철탑은 전선 하중 자체가 달라 구조와 크기부터 완전히 다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신설 선로를 기존 선로와 통합해 철탑과 비용을 줄이겠다는 정부 주장이 현장의 기술적 한계를 철저히 외면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기존 2회선 철탑을 헐고 대형 4회선 철탑을 새로 세우려면, 공사가 진행되는 수개월 동안 기존 선로의 전기를 끊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국가 간선망은 여유 전력이 부족해 장기간 송전을 중단하는 것 자체가 수급상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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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심을 가로지르며 서있는 송전탑. 이것도 부족해도 더 많은 송전탑을 세우겠다고 합니다. |
| ⓒ 이봉렬 |
결국 공사 중에도 전력을 계속 공급하려면 새 철탑이 완공될 때까지 전기를 임시로 우회시킬 가철탑 선로를 주변에 따로 지어야 합니다. 철탑을 덜 지어 돈을 아끼겠다던 정부 계획이, 우회용 임시 철탑을 짓느라 막대한 토지 보상비와 추가 시공비를 쏟아부어야 하는 모순으로 이어지는 셈입니다.
게다가 4회선 철탑은 기존 2회선보다 높이가 대략 20m 이상 높아지고 기초 면적도 훨씬 넓어집니다. 이미 수십 년간 철탑 피해를 겪어온 인근 주민들에게 짐을 덜어주기는커녕, 훨씬 거대하고 위압적인 괴물을 새로 안겨주는 꼴입니다.
안전 문제 또한 심각합니다. 산불이나 벼락으로 이 거대 철탑 딱 하나만 쓰러져도 4개 선로가 동시에 끊깁니다. 2회선이라면 남은 선로와 인근 계통이 충격을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지만, 4회선이 통째로 끊기면 대규모 전력이 주변 선로로 급격히 쏠리면서 연쇄 과부하와 차단으로 이어집니다. 순식간에 도시 전체의 불이 꺼지는 대형 정전 참사가 현실화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연쇄 붕괴를 막으려면 4회선의 경우는 평소에도 전기를 제 용량대로 다 보내지 못하고 송전량을 억지로 낮춰 운전해야 합니다. 2 더하기 2를 해도 4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여기에 사고 충격을 줄이기 위한 고가의 초고속 차단 장치 등 특수 설비까지 추가해야 하니, 유지·보수 비용 역시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정부가 또 다른 대안으로 내세운 지중화 확대 역시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전선을 땅에 묻으려면 대규모 굴착과 전력구 구조물 공사가 필요해 지상 철탑 대비 건설비가 최소 8배 이상 듭니다.
또한 땅속은 공기 중보다 열 방출이 어려워 과열을 막기 위해 송전 용량을 제한할 수밖에 없고, 사고가 나도 파손 지점을 즉각 확인하기 어려워 복구에 긴 시간이 걸립니다. 지상 수십 미터 위에 걸리는 송전탑과 달리 도로 바로 아래 수 미터 깊이에 묻히다 보니, 보행자가 지상 철탑 주변보다 더 강한 전자파에 노출될 위험마저 있습니다. 도심지 장기 굴착 공사로 인한 교통 체증과 상권 피해는 덤입니다.
결국 정부는 이러한 근본적 모순을 덮어둔 채, '계통 햇빛소득마을'을 조성해 가구당 최대 연 300만 원을 지급하고 설명회를 2회에서 3회로 늘리겠다는 식의 땜질 처방으로 주민 반발을 무마하려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상처를 남긴 밀양 송전탑 사태를 기억합니다. 삶의 터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송전탑 문제는 푼돈 보상이나 요식행위 설명회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송전탑을 세워야 할 이유를 없애자
| ▲ 붉은 점선 안이 삼성전자가 들어 설 용인반도체 클러스터 예정지다. |
| ⓒ 최병성 |
애초에 이렇게 무리해서 거대 송전탑을 전국에 꽂아 넣어야 하는 근본 원인부터 짚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국가 전력을 블랙홀처럼 집어삼킬 용인 시스템반도체 국가산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2023년 윤석열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이후 여전히 첫 삽조차 뜨지 못했고, 한때 18%를 넘겼던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점유율마저 6% 아래로 내려앉은 지금, 사업의 타당성 자체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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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년 2분기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한 때 18%를 웃돌던 삼성전자는 6%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파운드리 팹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수요가 부족해서 삼성전자는 기존의 파운드리 팹조차 메모리 팹으로 바꾸고 있는 실정입니다. |
| ⓒ 트랜드포스 |
무엇보다 기후위기 시대 반도체 산업의 생존 문법이 바뀌었습니다. 전력을 막대하게 소모하는 반도체 팹의 특성상, 사용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는 RE100 달성은 기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당장 2030년 이후 애플, 구글 등 글로벌 빅테크에 반도체를 납품하는 길 자체가 막힙니다.
부지가 비좁고 여건상 재생에너지 확대에 한계가 뚜렷한 수도권에 굳이 거대 팹을 고집하는 것은 글로벌 산업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처사입니다. 메모리 호황기에 팹 건설이 필요하다면 기업의 생존과 수출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부권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공장이 전기가 생산되는 지역을 찾아가는 '지산지소(地産地消)' 원칙을 따른다면, 수백 킬로미터 산하를 가로지르는 송전 철탑을 무리하게 세울 이유 자체가 사라집니다.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공장을 굳이 전력 여건이 열악한 수도권에 밀어 넣으려다 보니, 4회선 통합이나 지중화 작업 같은 비현실적인 꼼수 대책만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미 답은 나와 있습니다.
"호남의 재생에너지를 수도권까지 끌고 올라온다. 그거 사실 비상식적인 일이죠. 정책 역량을 최대한 동원해서 해당 지역에서 쓰는 게 기업에도 이익이 되게 하는 게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할 것 같다." (이재명 대통령의 9월 29일 국무회의 발언)
대통령의 이 발언에 맞는 정책을 만들고 따르면 됩니다. 모순으로 점철된 거대 철탑 건설을 강행할 때가 아닙니다. 국가 균형 발전과 RE100 대응을 위해 대규모 전력 소비 산업을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방으로 분산하고, 장거리 송전탑 수요 자체를 원천 차단하는 근본적인 정책 전환,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