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가 10월 5일 도쿄 국회에서 소신표명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일본은 국제사회의 법의 지배를 일관되게 중시하며, 그 역할을 맡는 ICC를 지지한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가 9일 미국이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데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다”며 X(옛 트위터)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또, “아카네 도모코(赤根智子) ICC 소장 및 관계국과 소통하면서 ICC가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이날 ICC에 대한 제재를 발표하며 동맹국들도 동참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동맹국이 따르지 않더라도 미국은 ICC 해체를 위한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런 가운데 다카이치 총리가 미국의 제재에 우려를 표명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재판소의 활동을 뒷받침하겠다는 뜻을 명시한 것이다.
다카이치 총리의 이번 대응은 지난 8월 미국이 일본인인 아카네 소장을 개인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을 때와 대비된다. 당시 다카이치 총리는 제재 발표 이튿날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답하는 데 그쳤다. 여야 의원들 사이에서도 일본 정부의 대응이 미온적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번에는 달랐다. 미 국무부가 9일 제재를 발표하자, 다카이치 총리는 불과 10분 뒤 인 오후 11시25분(일본 시간) ICC 지원 입장을 올렸다. 총리의 게시물에 이어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외무상도 “(미국의 결정은) 일본의 일관된 입장과 양립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내놨다. 다만, ICC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으려면 ICC와 당사국들이 재판소가 안고 있는 과제에 대처하고, 적정하게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마이니치신문은 “지난 8월 국내외에서 ‘저자세’라는 비판을 받은 점도 의식해, 이번에는 신속한 입장 표명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나비 필라이가 10월 9일 독일 뉘른베르크의 국제뉘른베르크원칙아카데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한편, 트럼프 행정부가 9일 발표한 조치는 ICC 기관 전체를 겨냥했다. 미국 기반 금융서비스와 기술기업에 대한 접근, 달러 사용 등을 차단하는 내용이다. ICC와 거래하는 미국 기업·개인에게는 기존 거래를 정리할 수 있도록 6개월의 유예기간을 뒀다. 재판소의 자금 결제와 업무 시스템 등 운영 기반을 압박하는 조치다. 미국은 ICC가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전쟁범죄 의혹을 수사하고 이스라엘 지도부에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을 문제 삼아왔다.
제재 발표는 ICC 판사를 지낸 남아프리카공화국 법률가 나비 필라이의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 몇 시간 뒤 나왔다. 국제사법의 역할을 인정한 노벨위원회의 결정과 재판소를 압박하는 미국의 조치가 같은 날 나온 것이다.
9일 수상 발표 뒤 독일에서 열린 행사에서 청중의 박수가 이어지자 “조금만 더 박수를 쳐주시면 트럼프와 이 상을 나눌지도 모르겠다”라고 농담했던 필라이는 10일 오슬로 노벨평화센터 행사에 화상으로 참여해 “판사들이 사법적 판단을 내렸다는 이유만으로 한 나라가 제재를 발표했다. 전례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대해 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뉴욕주 시러큐스 중간선거 유세 등을 통해 수상자 선정에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여러 전쟁을 막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번 결정을 노벨위원회의 “지울 수 없는 오점”이라고 비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 10일 미국 테네시주 클라크스빌의 F&M 뱅크 아레나에서 선거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한편 러시아도 ICC 관계자들에 대한 압박에 나섰다. 러시아 검찰은 8일 아카네 소장과 카림 칸 전 수석검사 등 총 9명의 신병 인도를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 요청했다고 발표했다. 아카네 소장은 2023년 우크라이나 아동 불법 강제이송 혐의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재판부에 참여했다. 러시아는 자국이 ICC 비당사국인데도 러시아 국민을 불법으로 기소하고 체포영장을 발부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오자키 마사나오(尾崎正直) 일본 관방부장관은 9일 러시아의 조치에 대해 “부당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