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4개사 가격재결정 명령 집행정지…출판계 반발
"피해액 4000억원 이상" 주장…13일부터 소송 참여사 모집
12월 손해배상 청구 예정…국회에 제도 개선 촉구4년 가까이 이어진 제지업계의 가격 담합으로 인쇄용지 가격이 71% 오른 가운데 출판계가 제지사들을 상대로 공동 손해배상 소송에 나선다. 공정거래위원회가 3383억원의 과징금과 가격재결정 명령을 내렸지만, 일부 제지사가 법원에서 집행정지 결정을 받아내면서 가격 정상화에 제동이 걸린 데 따른 것이다. 출판계는 담합에 따른 피해 규모가 4000억원을 웃돌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제지사 담합 출판계 공동손해배상소송 추진 기자회견'에서 출판계 관계자들과 국회의원들이 인쇄용지 가격 정상화와 피해 배상을 촉구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보경 추진위 대변인, 김승욱 추진위원, 강완구 추진위원장, 한창민 사회민주당 의원, 수어통역사, 김재원 조국혁신당 의원, 이은우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대한출판문화협회'제지사 담합 출판계 공동손해배상소송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는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지업체들을 상대로 한 공동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에는 강완구 추진위원장과 김보경 대변인, 사회민주당 한창민 의원, 조국혁신당 김재원 의원 등이 참석했다.
추진위는 13일부터 11월 15일까지 소송에 참여할 출판사를 공개 모집하고, 12월 중 소장을 제출할 계획이다. 소송은 법무법인 지향이 대리한다. 앞서 대한출판문화협회와 한국출판인회의 등 출판 관련 19개 단체가 지난 9월 공동소송 방침을 밝힌 데 이어 구체적인 참여 절차와 제소 일정이 마련된 것이다.
이번 소송의 출발점은 지난 4월 공정위가 적발한 대규모 인쇄용지 가격 담합이다. 공정위 조사 결과 한솔제지, 무림P&P, 무림페이퍼, 무림SP, 한국제지, 홍원제지 등 6개 업체는 2021년 2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최소 60차례 이상 회합하며 7차례에 걸쳐 가격 인상을 합의하고 실행했다.
담합 방식도 조직적이었다. 제지사들은 인쇄용지의 기준가격을 올리거나 할인율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판매가격을 조정했다. 담합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공중전화와 식당 전화, 다른 부서 직원의 휴대전화 등을 이용했고, 거래처에 가격 인상을 통보하는 순서를 동전이나 주사위로 정하기도 했다.
이들 6개 업체의 국내 인쇄용지 판매시장 점유율은 약 95%에 달한다. 담합 기간 인쇄용지 평균 판매가격은 톤당 84만1000원에서 143만9000원으로 약 71% 상승했다. 공정위가 산정한 담합 관련 매출액은 약 4조300억원이다.
공정위는 이 같은 담합 행위에 대해 총 3383억25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한국제지와 홍원제지 등 2개 법인을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담합으로 형성된 가격을 바로잡기 위해 각 업체가 가격을 독자적으로 다시 결정하고 향후 3년간 반기마다 변경 내역을 보고하도록 하는 시정명령도 내렸다. 공정위가 가격재결정 명령을 내린 것은 2006년 밀가루 담합 사건 이후 20년 만이었다.
그러나 제지사들이 행정소송과 함께 집행정지를 신청하면서 가격 정상화 조치는 차질을 빚고 있다. 서울고법은 지난 8월 무림SP와 무림페이퍼, 무림P&P 등 3개 업체가 제기한 가격재결정 명령 집행정지 신청을 일부 인용했다. 한국제지의 신청도 별도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따라 6개 업체 중 4곳에 대한 가격재결정 명령과 관련 보고 명령의 효력이 본안 소송 판결 이후 30일까지 정지됐다.
재판부는 명령이 즉시 집행될 경우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했다. 공정위는 이에 불복해 재항고하는 한편 본안 소송에서 처분의 적법성을 입증하겠다는 입장이다.
출판계는 담합으로 상승한 종잇값이 충분히 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추가 가격 인상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지난 9월 출판단체 19곳은 일부 제지사 제품에 대해 최대 13%의 추가 인상 방침이 거래처에 통보됐다며 공정위의 엄격한 검증을 촉구한 바 있다.
추진위는 이번 담합에 따른 출판업계와 소비자의 피해액을 4000억원 이상으로 추산했다. 추진위는 공정위의 가격재결정 자료와 계량경제학적 분석을 활용해 담합이 없었을 경우 형성됐을 경쟁가격을 산정하고, 실제 거래가격과의 차이를 근거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방침이다. 과징금은 국가가 부과하는 행정제재인 만큼 이를 납부하더라도 피해 출판사에 손해액이 직접 배상되는 것은 아니다.
강완구 추진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제지업계는 부당이득 뒤에 숨어 행정소송으로 시간을 끌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사과하고 합리적인 피해 배상안을 즉각 제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회에서도 제도 개선 필요성이 제기됐다. 한창민 의원은 반복되는 제지업계의 담합으로 출판·인쇄업계뿐 아니라 책을 구매하는 국민에게도 부담이 전가된다며 집단적 피해 구제와 담합 억제력을 강화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재원 의원 역시 가격재결정 명령의 이행 지연과 추가 인상 움직임을 지적하며 공정위의 책임 있는 대응을 요구했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도 지난달 28일 반복 담합 근절을 위한 입법 추진방안을 발표하면서 가격재결정 명령의 법적 근거를 공정거래법에 명시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담합 자진신고 사업자에 대한 시정조치 감면 혜택을 폐지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출판계는 이번 공동소송과 별개로 공정위에 가격재결정 명령의 엄정한 집행을 촉구하고, 제지사들이 제출하는 원가와 가격 결정 자료를 수요자 단체도 검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향후 소송에서는 각 출판사가 실제로 부담한 초과 비용을 어느 범위까지 입증할 수 있는지가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