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ACFM) 특별 세션에선 의외의 기업이 참가해 영화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현대차그룹 광고 계열사 이노션, 방산·에너지·조선 등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에 뿌리를 둔 한화그룹이 그 주인공이었다. 전 세계 58국에서 3000여 명의 영화 산업 관계자가 영화 제작과 투자를 논의하는 ACFM에 두 기업이 참석한 이유는, 영화 때문이다. 이노션은 이 자리에서 브랜드와 감독을 연결해 영화를 제작하는 신사업의 첫 파트너로 한화그룹을 선정하고, 한화의 ‘우주 태양광’ 사업을 소재로 감독 3명이 각각 만든 단편영화를 내년 중 국내외에서 공개하기로 했다.
이노션이 12일 부산 벡스코에서 ‘시네마바이브랜드(Cinema by Brand)’의 진행 상황과, 감독 라인업을 처음 공개하고 있다. (왼쪽 두번째부터) 김정아 이노션 대표, 박지영 한화커뮤니케이션위원회 부사장, 김영덕 ACFM 위원장. 그리고 영화 제작을 맡게 된 홍의정 감독, 이진호 감독, 에드먼드 여. / 이노션광고 업계가 브랜드 로고나 제품을 미디어에 노출하는 전통적인 사업 방식에서 벗어나고 있다. 감독과 브랜드의 의견을 조율해 ‘광고 티가 안 나는’ 광고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하나의 예시다. 광고 회사들은 생성형 AI(인공지능)가 일상에서 확산되자, AI와 대화에서 고객사의 브랜드가 더 잘 노출될 수 있도록 컨설팅까지 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더 이상 기존 대기업 일감만으로 생존하기 어려워지자,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영화, 광고 산업 새 돌파구 되나
이날 특별 세션에서 공개된 이노션의 영화 신사업의 정체는 ‘시네마바이브랜드’다. 현대자동차와 함께 2024년 제작한 단편 영화 ‘밤낚시’처럼 광고 티가 안 나는 영화를 기업과 함께 매년 정기적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밤낚시는 현대차의 전기차 ‘아이오닉5′에 내장된 카메라 7대로 촬영해, 정작 광고 대상인 ‘아이오닉5’의 모습은 영화에 제대로 나오지 않는 영화다. 이노션은 이 영화로 세계 3대 국제 광고제인 ‘칸 라이언즈’에서 엔터테인먼트 부문 그랑프리 등을 받았다.
시네마바이브랜드는 광고주가 감독 1명과 접촉하는 기존의 광고 캠페인과 달리, 영화 단체인 ACFM이 보증하는 500명 이상의 글로벌 영화 감독에게 특정 브랜드를 소재로 기획안을 공모받는 것이 특징이다. 매년 5월 브랜드를 선정해 8월 작품 숏리스트(최종 후보자군) 10명을 추리고, 9월 최종작을 선정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발표할 계획이다. 올해 한화그룹의 ‘우주 태양광’ 영화 공모엔 8국 60명의 감독이 기획안을 보냈고, 3명(에드먼드 여·홍의정·이진호)이 선정됐다. 영화는 내년 중 국내외에서 극장 또는 OTT를 통해 공개된다.
이노션은 이 같은 감독 선정부터 실제 영화 제작, 그리고 마케팅 과정 전반에 참여해 브랜드와 감독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당장의 매출 증대를 넘어, 미래의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다. 이노션 김정아 대표이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광고와 콘텐츠를 구분해서 보지 않는다. 광고도 영화보다 재미있으면 보고, 영화도 광고보다 지루하면 보지 않는다”며 “광고라고 규정지은 카테고리와 매체들을 스킵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시네마바이브랜드가) 광고 에이전시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한화그룹은 시네마바이브랜드를 통해 처음 브랜드 영화를 만들게 된다. 일반 소비자와 접점이 적은 B2B(기업 간 거래) 사업이 대다수인 만큼, 자연스러운 홍보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박지영 한화커뮤니케이션위원회 부사장은 “B2B 사업이 큰 기업 입장에선 영화라는 형식으로 (기업의) 스토리를 전달하는 게 하나의 실험이라고 생각한다”며 “우주 태양광이라는 개념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영화를 통해 이 개념을 한화가 제일 먼저 선점하고 싶다”라고 했다.
◇AI 컨설팅까지 손 뻗는 광고업계
이런 움직임의 배경엔 광고 시장의 변화가 있다. 광고 시장에서 영화, 드라마 PPL 같은 전통적인 사업이 저무는 대신, 온라인 공간에서 화제가 될 수 있는 콘텐츠의 힘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기업의 브랜드를 소재로 한 영화 역시 이 점을 공략하는 것이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 따르면, 작년 국내 총 광고비는 약 17조3000억원으로 전년(약 17조1000억원) 대비 소폭 늘었지만, 방송 광고비(약 2조8000억원)는 이 기간 13% 줄었다. 온라인 광고비(약 10조7000억원)는 같은 기간 6% 늘었다.
최근 광고 업계에선 AI 역시 신사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제일기획은 올 들어 배너 제작비를 90% 이상 줄여주는 AI 배너 자동화 서비스, 그리고 생성형 AI에 특정 질문을 했을 때 기업의 제품이 얼마나 노출되는지를 분석하는 설루션 ‘제일 GEO(생성형 엔진 최적화) 오케스트레이터’를 잇따라 내놨다. 소비자가 챗GPT, 제미나이, 퍼플렉시티 등 AI에 질문을 던졌을 때 자사 브랜드가 얼마나, 어떤 순위로 등장하는지 분석한 뒤 고객사에 그에 맞는 마케팅 전략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HSAD는 광고 회사 외부에서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는 브랜드 맞춤형 AI 에이전트를 운영 중이다. 소비자와 AI의 대화를 분석해, 브랜드 전략 수립부터 콘텐츠 제작까지 전략을 짜준다. 이노션 역시 자체 GEO 설루션 기술을 바탕으로 광고주에게 AI 활용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단순 광고 제작 대행을 넘어, 고객사의 모든 마케팅 과정에 참여하는 광고 업체들의 실험이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