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귀 뒤 과잉 대비 ‘수송 안보’ 챙길 때
중동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에 발이 묶인 선박들. [로이터 연합뉴스]14년째 같은 차를 몬다. 2012년식이다. 굴러가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해마다 떨어지는 가치에 이제 큰 고장이라도 나면 폐차를 고민해야 할 나이가 됐다.그런 내게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아쇼카호의 매각 소식은 낯설었다. 2010년 건조돼 내 차보다 두 살 많은 배가 지난달 1억3000만달러(약 1747억원)에 팔렸다. 새 배 값과 맞먹는다. VLCC 10년 중고선 가격은 신조선가보다 약 25% 비싸졌다. 10년 된 중고선 가격이 새 배보다 비싸진 것도 2002년 집계 시작 이후 처음이다.
이유는 ‘시간’이다. 지금 새 배를 주문해도 빨라야 2028년에 받는다. 중동전으로 운임이 치솟자 선사들은 기다릴 여유가 없다. 택시 요금이 급등했는데 새 차를 받기까지 2년을 기다려야 한다면, 당장 손님을 태울 수 있는 낡은 택시에도 웃돈이 붙지 않겠는가.국내 조선사들은 수년 치 일감을 확보했고 실적도 좋아지고 있다. 그러나 배를 잘 만드는 것과 위기 때 필요한 배를 확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원유의 60% 이상을 중동에서 들여오는 한국에서는 해상 운송 차질이 정유사 원가 상승을 넘어 물가 부담으로 번질 수 있다.
수년간 누적된 발주 공백에 중동전까지 겹쳐 선박 부족이 심해졌다. 반면 올해 쏟아진 주문은 2028년 이후 공급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오늘의 품귀가 내일의 과잉으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는 원유 수송을 물류가 아닌 에너지 안보 문제로 다뤄야 한다. 국적선 숫자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비상시 활용할 수 있는 수송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조달처 다변화에 따른 운송비와 전쟁 위험 보험료 부담에도 대비해야 한다. 조선업계도 호황만 보고 무리하게 설비를 늘릴 일이 아니다. 생산 효율과 친환경 선박 기술로 다음 경쟁을 준비해야 한다.내 차는 앞으로도 값이 떨어질 것이다. 낡은 배가 새 배보다 비싼 현상도 영원할 수는 없다. 2008년 호황 뒤 찾아온 긴 불황과 구조조정은 되새길 교훈이다. 뒤늦게 허둥대지 않으려면 축배보다 호황이 끝난 뒤를 먼저 준비해야 한다.
박대의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