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기·LG이노텍, 합작사 등 밸류체인 내재화 속도
SKC, 앱솔릭스에 5900억 투입…연내 기술검증 전망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인공지능(AI) 반도체 성능을 좌우할 차세대 유리기판 시장에 중국 디스플레이 패널 업체들이 대거 뛰어들며 한·중 간 초기 선점 경쟁에 불이 붙었다. 턱밑까지 추격해 온 중국의 공세에 맞서 국내 기판 제조사들은 당장 수요가 폭발한 기존 패키지기판을 풀가동해 시장을 방어하고, 유리기판은 공급망 내재화로 승부를 띄우는 투트랙 전략으로 응수하는 모양새다.턱밑까지 쫓아온 중국
14일 전자부품 업계에 따르면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업체 비오이(BOE) 천옌순 회장은 최근 베이징 행사에서 유리기판 캐리어 양산라인 투자를 공식화하며 상용화 채비에 나섰다. 이는 기존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을 장악하며 쌓아온 대형 유리 정밀 가공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미 3년 전부터 물밑에서 기술을 축적해 온 결과다.
실제 BOE는 자체 파일럿 라인을 구축하고 잠재 고객사에 유리코어 샘플 공급을 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최근에는 유리를 관통해 미세 회로를 잇는 TGV 공정을 24층까지 적층한 대면적 시제품을 내놓고, 중앙처리장치(CPU) 등을 패키징해 실제 서버 구동까지 검증 중이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 등은 이 같은 진척도를 근거로 BOE의 본격 양산 시점이 2028년 이후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여기에 차이나스타(CSOT)와 비전옥스 등 현지 후발주자들까지 전담 조직을 꾸려 파일럿 라인 구축에 가세하면서 한·중 간 2028년 선점 레이스가 궤도에 오르자 삼성전기와 LG이노텍 등 국내 주요 부품사도 속도전 대신 전략적 시간표 재조정에 들어갔다.
우선 삼성전기는 당초 2027년이던 유리기판 양산 목표를 2028년으로 늦추는 대신 일본 동우화인켐과 3191억원을 출자해 세종 사업장 기반의 합작법인 '글라셈'을 세우고 핵심 소재 자립에 집중하고 있다. 고객사 신뢰성 검증이 길어지는 차세대 제품에 매몰되기보다 하반기 가동률 90%를 돌파하며 수요가 공급을 앞지른 고부가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 증설에 먼저 전력을 쏟아 물량을 확보하겠다는 판단으로 여겨진다.
LG이노텍 역시 지난달 기판 전시회(KPCA 쇼)에서 AI 가속기용 대면적 기술을 선보인 데 이어 문혁수 대표가 직접 2028년 양산 목표를 재차 공식화하며 구미 4공장 내 시범 라인 가동에 속도를 붙이는 양상이다. 문 사장은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전자전(KES) 2026'에서 유리기판 공급 시기에 대해 "2028년쯤 가능할 것으로 본다"며 "아직 공급이 아닌 개발 단계"라고 설명했다.
SKC는 자회사 앱솔릭스에 총 3731억원의 실탄을 수혈한 것은 물론 확보한 자금 중 5900억원을 향후 3년간 유리기판 사업에 집중 투입하며 양산 기반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재 미국 조지아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의 신뢰성 평가를 진행하고 연내 기술검증(PoC) 진입을 추진하는 등 수율 극대화에 매진하는 모습이다.
AI칩 구원투수된 '유리'
삼성전기 유리기판./사진=삼성전기업계가 유리를 차세대 반도체 기판으로 점찍은 이유는 인공지능 연산 고도화와 직결돼 있다. 방대한 데이터를 순식간에 처리하려면 칩의 면적이 커지고 신호를 주고받는 미세 회로를 훨씬 촘촘하게 깔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막대한 열이 발생하는데, 기존에 쓰던 플라스틱 기반 기판은 고온을 견디지 못하고 휘어지거나 팽창하는 한계를 노출했다. 뜨거운 국물을 얇은 플라스틱 용기에 부으면 모양이 찌그러지듯 열에 약한 기존 소재로는 고성능 칩의 성능을 100% 끌어올리기 어렵다.반면 유리는 펄펄 끓는 고열에도 형태를 꼿꼿하게 유지하는 성질을 지녔다. 표면이 거울처럼 매끄럽고 단단해 기존 기판보다 회로를 훨씬 정밀하고 얇게 새겨 넣을 수 있다. 또 데이터가 오가는 길을 거미줄처럼 미세하게 깔 수 있어 신호 지연이나 전력 손실이 크게 줄어든다.
여러 개의 칩을 하나의 널찍한 기판 위에 이어 붙이는 대형화에도 최적화된 소재로 꼽힌다. 시장조사업체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에 따르면 디스플레이·태양광용 등을 포함한 세계 유리기판 시장 규모는 올해 79억1000만 달러(한화 약 10조6000억원)에서 2034년 106억3000만 달러(약 14조3000억원)로 연평균 3.77% 성장할 전망이다.
이승우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부회장은 “유리기판은 베젤 없는 화면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를 구현하기 위한 핵심 기술이자 반도체 분야로 시장을 확장할 기회”라며 “초기 단계부터 선제적인 투자와 정책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