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대통령 국무회의서 언급
성남시장 시절 채무탕감 모델
반도체 등 세수확대 활용할듯
금융권 “신용사회 근간 훼손”
이재명 대통령이 시중의 악성 연체채권을 정부가 직접 매입해 소각하는 포용금융 정책을 제안해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반도체 수출 호황 등으로 확보된 재정으로, 과거 성남시장 시절 공동은행장을 맡았던 ‘주빌리은행’의 채무 탕감 모델을 전국적인 국가 정책으로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금융권과 학계에서는 대통령의 구상이 자칫 신용 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전날 국무회의에서 구조적 장기 고금리 시대를 우려하며 “정부 차원에서 시중 연체채권을 원금의 5% 수준에 직접 매입해 정리하자”고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연체채권이) 원금의 1∼2%만 받고 거래돼 결국 사채업자 비슷한 대부업체나 추심 전문업체로 가지 않나”라며 “그러면 (채무자를) 괴롭혀 돈을 받는 그런 문제들에 더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재정 여력이 있으니 정부 차원에서 시중에서 매입해도 되지 않나, 우리가 복지 지출도 하는데 효율적으로 쓰면 정부 재정도 훨씬 아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구상의 배경에는 반도체 산업 호황 등으로 늘어난 세수가 깔려 있다. 이 대통령 본인이 성남시장 시절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부실채권을 매입해 소각했던 ‘주빌리은행’의 방식을 이제는 풍부해진 국가 예산을 투입해 전국 단위로 실행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의 구상은 대부업체로 가기 전 시중은행에서 정부가 직접 연체채권을 매입한다는 점에서, 이미 20년 이상 연체돼 원금을 받을 가능성이 없는 악성 채권을 소각하는 기존 채권소각 방식과도 차이가 있다.
금융권에선 이 대통령의 아이디어에 대한 반발 기류가 일고 있다. 코로나19나 금융위기 등 한시적 배드뱅크를 넘어, 정부가 상시로 개입해 빚을 탕감해 줄 경우 기본적인 신용 질서가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관계자는 “대부업체나 카드론에서 15∼17%의 고금리로 돈을 빌린 채무자가, 연체 시 정부가 5%에 채권을 사들여 빚을 없애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누가 빚을 갚겠느냐”라며 “빚을 갚지 못해도 국가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개인회생, 개인워크아웃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채무조정 제도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대부업체와 채권추심업 등의 존립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도 우려했다. 조성목 서민금융연구원장도 “새도약기금의 경우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 원 이하 채권을 대상으로 하는 등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적·금액적 허들을 두고 있다”며 “대통령의 발언처럼 시중 연체채권을 정부가 매입해 탕감한다면, 굳이 시중은행이나 신용평가사, 합법적 채권추심업 등 민간 금융회사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 용어설명
◇주빌리은행=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인 2015년 공동은행장을 맡아 장기 부실채권을 원금의 3∼5% 가격에 사들인 뒤 빚을 탕감해 주는 시민단체 기구. 시민과 기업 후원금, 금융사 부실채권 기부 등으로 재원을 충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