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감서 ‘리밸런싱 유예’ 공방…야당 “정치적 개입 의혹”·공단 “장기 수익 고려”
14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와 코스닥지수 등이 표시되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0.44% 하락하며 6008.81에 마감했다. 연합뉴스 코스피가 급락세를 이어가는 가운데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매수 여력이 제한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가가 치솟던 시기에 주식 보유 비중을 줄이는 대신 자산배분 기준을 완화한 결정이 하락장에서 부담으로 돌아왔다는 분석이다.
15일 한국거래소 등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거래가 포함된 투자자 분류인 ‘연기금 등’은 8월부터 14일까지 유가증권시장에서 약 1조3천억원어치 주식을 순매도했다.
같은 기간 코스피는 6천~7천선에서 등락을 거듭했지만 연기금은 국내주식 보유 규모를 줄이는 흐름을 보였다.
최근 증시가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매수 규모는 제한적이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각각 7%대와 10%대 하락한 13일 연기금 등의 순매수액은 514억원에 머물렀다. 외국인 투자자가 코스피 주식을 1조원 넘게 순매도 한 14일에도 연기금 등의 순매수 규모는 151억5원에 그쳤다.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상승장에서 국내 주식 비중을 조정하지 않은 것이 최근 매수 여력을 제한하는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이 나온다.
국민연금은 주식과 채권 등 자산별 투자 비중이 목표 수준에서 벗어나면 보유 자산을 사고팔아 비중을 맞추는 자산 재배분, 이른바 ‘리밸런싱’을 운용에 활용해 왔다.
일반적으로 주가 상승으로 특정 자산의 비중이 커지면 일부를 매도하고, 하락으로 비중이 낮아지면 매수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 국내 증시가 급등하자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의 목표 비중을 기존 14.90%에서 20.80%로 상향했다. 전략적 자산배분 허용 범위도 종전 ±3%포인트(p)에서 ±6%p로 넓혔다.
주가 상승으로 국내 주식 평가액이 불어난 상황에서 보유 비중을 낮추기 위한 매도를 서두르지 않도록 운용 기준을 조정한 셈이다.
문제는 증시가 하락세로 돌아선 뒤에도 국내 주식 비중이 목표 수준을 웃돌고 있다는 점이다.
7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 비중은 24.87%로, 올해 목표치인 20.80%보다 4.07%포인트 높았다.
이에 따라 주가가 떨어지더라도 국내 주식을 적극적으로 사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는 국민연금의 리밸런싱 유예 결정에 대해 “시장 신뢰를 저버리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적절한 시점에 자산 비중을 조정하지 않은 결과 개인투자자들이 고점에 매수한 주식을 처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고 지적하며, 연기금 운용의 독립성과 정책적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국민연금이 주가 하락을 막기 위해 주식을 매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기관인 만큼 증시 방어보다 장기적인 수익성과 기금의 안정적인 운용이 우선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과거 대규모 금융위기 당시 국내 주식 매수를 늘리면서 결과적으로 시장의 하락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약 18조원, 2011년 유럽 재정위기 때는 약 13조원 규모의 국내 주식을 순매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민연금의 자산배분 기준 변경을 둘러싼 논란은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이어졌다.
14일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은 리밸런싱 유예와 국내 주식 목표 비중 확대 과정에 정부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은 국민연금이 주식시장 부양 수단으로 활용돼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비판하며, 올해 1월 관련 결정을 내린 기금운용위원회 회의록 제출을 요구했다.
같은 당 보건복지위원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자산배분 조정 과정에 정치적 개입이 있었는지와 위험관리가 적절하게 이뤄졌는지 등을 확인해야 한다며 국정조사를 촉구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기금운용위원회 회의 내용을 공개할 경우 금융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반박했다.
서영석 민주당 의원은 회의록 비공개가 국민연금법에 근거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리밸런싱 유예가 증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야당의 주장대로라면 관련 회의 내용을 공개하라는 요구는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이인영 민주당 의원 역시 지방선거를 고려해 자산 재배분을 미뤘다는 의혹에 반론을 제기했다. 선거를 의식했다면 오히려 선거 전에 성과를 내는 방향으로 자산배분을 조정하는 편이 유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국내 증시 전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전문가들의 판단에 따라 유예 결정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또 시장 상황에 맞춰 주식을 빈번하게 매매하면 거래 비용이 늘어나 장기 수익률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운용 결정의 배경을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