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가 뭘 알아” '끼리끼리 문화' 싫어 미국행…‘벌레잡이’로 대박냈다
대학 카르텔에 막힌 문과생 연구원, 마흔에 미국행
손 마비될 만큼 닭 잘라 영주권…“뭘 해도 먹고 살겠다”
가족도 숨기고 싶어한 ‘벌레잡이’, 오기로 ‘벌레박사’ 창업
코로나 5000건 방역…“쓸모없다던 자격증이 사람 살려”
썬박 벌레박사 대표가 한 공장에서 방역을 하는 모습. 독자 제공“자기들끼리 쑥덕쑥덕 얘기하다가, 제가 지나가면 입을 딱 다물어요. 업무 절차나 노하우도 안 가르쳐주고. 대학 카르텔이 정말 만만치 않았죠.”
지금은 미국에서 한해 200만달러씩 매출을 찍는 우량기업의 대표가 돼 미국 상원의원으로부터 표창도 받았지만, 어째선지 벌써 30년도 넘은 예전 직장생활은 쉽게 잊혀지지가 않는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한인 최대 해충 방역·소독 전문 회사 ‘Anteater Pest Contro’(한국명 벌레박사)를 운영하는 썬 박 대표 얘기다. 지금은 세계한인경제무역협회(월드옥타) 글로벌스타트업위원장까지 맡아 후배 사업을 도울만큼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수십년 전 자동차회사 연구소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는 그 역시 ‘사회 초년생’에 불과했다.
"불어 잘하면 인기 많을 것 같아서"...평범했던 문과 소년그의 삶은 처음부터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별로 없었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 위원장은 스스로를 “문과형 인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는 이과를 택해야 했다. 1980년 전후에는 “공대를 가야 먹고산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학교에서도 성적이 괜찮은 학생들을 이과로 밀어넣다시피 했다고 한다. 대학 입시를 치른 뒤 학교는 연세대와 고려대 이공계 진학을 권했지만 그는 원서조차 내지 않았다.
대신 그가 택한 곳은 한국외대 불어교육과. 고등학교에서 배운 외국어는 독일어였고, 프랑스어에 남다른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유를 묻자 박 위원장은 “그때 어문계열에 여학생이 많았다”면서 “마초보다 젠틀한 남자가 왠지 인기가 많을 것 같았는데… 불어를 하면 좀 멋있어 보일 것 같았다”고 웃었다. 그는 아들이 좋은 이공계 대학 원서를 마다했다고 못마땅해할까, 입시 서류를 어머님께 숨겼다고 회고했다.
철부지 같은 선택은 훗날 뜻밖의 기회로 돌아왔다. 1988년께 쌍용자동차가 지프 중심의 사업에서 벗어나 승용차 양산을 추진하며 프랑스 르노와의 협력을 검토하고 있었고, 불어를 할 줄 아는 인력이 필요했다. 마침 프랑스대사관에서 비서로 근무하던 대학 동기가 도움이됐다. “사람을 뽑는다는데 내가 추천해주겠다”는 것. 그렇게 불어교육과 졸업생으로 쌍용차 연구소에 들어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막상 들어간 회사는 ‘끼리끼리 문화’가 보통이 아니었다. 공대에서 자동차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가 즐비한 조직. 연구소의 공대 선후배간 결속력은 만만치 않았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어느 지역 출신인지에 따라 무리가 갈리는 그곳에서 한국외대 불어교육과를 나온 그는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에서 그치면 다행이었다. 같은 학교 출신 선배 하나 없는 그는 업무를 배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외대출신인 그는 진급시험에서 영어 성적이 좋은 것마저 눈치를 봐야 했다. 박 회장은 “나는 외대 출신 문과생이고 자기들은 공대 출신 그룹이라는 식으로 배척하니 손쓸길이 없었다”면서 “그때 참 서러웠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뒤처지지 않으려고 자동차공학을 공대생 수준으로 독학했다. 엔지니어들과 대화하려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부터 알아야 했으니까. 그는 “내 전공도 아닌 일을 하면서 생존한다는 게 참 어려웠다”고 떠올렸다.
직장인의 일상은 고됐다. 오전 7시까지 출근해 직원들과 국군도수체조를 하고 밤 9시30분, 10시가 돼서야 퇴근하는 날이 흔했다. 과장급 선임연구원까지 올라갔지만 어린 자녀가 자라는 모습조차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남들이 보면 번듯한 대기업 연구원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전형적인 샐러리맨의 모습으로 나이만 먹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공대생 카르텔에 지친 문과생, '아메리칸 드림' 찾아 미국으로박 위원장은 쌍용차 연구소에서 7년가량 기획 업무를 맡았다. 이후 현대정공이 갤로퍼를 앞세워 사륜구동(4X4) 자동차 사업을 확대하던 시기 현대정공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겉으로 보면 순탄한 경력이었지만 그는 점점 다른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부모와 형제들은 먼저 미국으로 건너간 상태였다. 결혼하면서 세대가 분리된 박 위원장이 부모 초청으로 영주권을 얻으려면 10년 정도 기다려야 했다.
그 시절 회사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은 기술잡지가 박 회장의 인생을 바꿨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창업가들이 회사를 만들고 벤처캐피털(VC)이 이들의 꿈에 투자한다는 내용이었다. 직장인들이 모이면 주식 얘기를 하던 시절, 잡지 속 미국에서는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회사를 만들고 있었다. “미국은 꿈이 있는 나라구나 싶었다”면서 “막연했지만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고 말했다.
마침 회사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지사장 발령 이야기도 나오고 있었다. 가족은 위험하다며 반대. 그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회사가 싫어서 도망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미국에서 지금과 다른 삶, 내가 주체적으로 사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때가 2003년, 만 나이 마흔이었다. 그는 아내와 초등학교 4학년 딸, 1학년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향했다. 아내와 자녀는 “미국에 간다” “공부 안해도 된다”며 싱글벙글할 뿐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서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도착한 미국. 하지만 현실에서 처음 마주한 것은 펜실베이니아의 닭공장이었다. 당시 영주권을 받고 미국에 빠르게 정착할 수 있는 취업이민 프로그램 가운데 닭 가공공장에서 일정 기간 일하는 방법이 있었다. 부모 초청을 기다리면 쉰 살이 넘어야했으니, 박 회장은 10년을 기다리는 대신 몸으로 부딪쳐보기로 한 것.
가족은 커다란 검은 이민가방을 끌고 펜실베이니아 산골로 들어갔다. 박 회장은 “뉴욕처럼 번쩍번쩍한 미국을 생각했는데 도착하고 보니 첩첩산중이었다”면서 “미국인데 미국인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공장 안에는 중남미 출신 노동자와 영주권을 얻으러 온 이민자가 많았다.
"하루 닭 10만마리씩 다듬어...출신 대학, 직장, 그런 건 소용없었다"
썬박 벌레박사 대표가 미국 생활 초기에 일했던 닭공장의 모습. 직원들의 머리 위로 셀수없이 많은 닭들이 보인다. 독자 제공공장에서는 하루에 닭 10만 마리를 처리했다. 트럭에서 닭이 쏟아져 내려오면 도살과 가공 작업이 이어졌다. 털을 제거하는 등의 공정은 기계가 맡았지만 사람이 직접 전동가위로 닭의 목과 날개 부위를 자르고 손질해 포장하는 작업도 적지 않았다. 박 위원장이 근무한 곳은 유대교 율법에 맞춘 코셔(Kosher) 식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어서 작업 기준도 까다로웠다. 고기가 상하지 않도록 공장 내부는 여름에도 냉장고처럼 추웠다.
한국에서는 대기업 자동차 연구소의 과장급 선임연구원이었다. 미국에서는 차디찬 공장에서 닭을 잘랐다. 학력도 직함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미국에는 전 세계에서 이민자들이 온다”면서 “자기가 무슨 대학 나왔다느니, 무슨 직장을 다녔다느니 하는 것은 한국에서나 먹히지, 미국에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만 있을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하루 종일 서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손 전체에 염증이 생겼고 나중에는 신경이 마비될 정도가 됐다. 그는 “오죽 힘들면 영주권을 주겠느냐는 말도 했다”며 “내가 방위 출신이기는 하지만, 아마 다른 사람도 ‘군대보다 힘들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견디지 못해 두 차례 공장을 뛰쳐나왔지만 다시 돌아갔다. 아내와 두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그만둔 기간을 포함해 닭공장에서 보낸 시간은 1년6개월가량이었다.
썬박 벌레박사 대표가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 일했던 닭공장의 모습. 직원들 사이로 셀수없이 많은 닭들이 보인다. 독자 제공닭공장을 벗어날 무렵 박 위원장에게는 예상치 못한 것이 하나 생겨 있었다. 자신감이었다. 좋은 학교나 회사에서 인정받아 얻은 게 아니었다. 육체적으로 고된 환경에서도 가족을 위해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는 “이제 미국에서 어떤 일을 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닭공장을 나온 그의 앞엔 또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그는 한동안 한의사 일을 고민했다. 미국에서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자격도 있었고, 둘째 동생도 한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스시가게를 운영하던 셋째 동생의 식당에서 한 사람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벌레를 잡고 가는 모습을 봤다. 박 회장의 눈에는 그 일이 꽤 괜찮아 보였다.
동생이 말했다. “형, 벌레사업 해볼래?” 그는 되물었다. “그게 뭔데?” 동생은 “라이센스가 필요한 비즈니스인데다, 미국은 벌레도 크고 많다”고 답했다. 박 회장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사업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라이선스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더 좋았다.
월급쟁이 직장인으로 살아온 그가 큰 자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체적으로 힘이 센 것도 아니었다. 영어로 미국인을 이길 수도 없었다. 그러나 공부해서 시험을 보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돈이 있습니까, 힘이 있습니까. 직장생활 10년 넘게 한 아저씨가 무슨 재주가 있겠어요.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마흔에도 공부해서 시험 보고 자격증 따는 건 잘하잖아요.” 그는 자격증을 자신의 ‘서바이벌 모드’로 삼았다.
밤 9시에 "벌레잡아 달라" 첫 주문...아들 데려갔다미국에서 해충방제업을 하려면 분야별로 면허가 필요했다. 집을 갉아먹는 흰개미를 처리하는 터마이트(Termite) 라이선스, 일반 해충을 다루는 페스트컨트롤 라이선스뿐 아니라 모기, 미생물 등 분야별 자격이 있었다. 박 위원장은 사업 초기부터 필요한 자격을 하나씩 모두 취득했다. 주변에서는 “그런 것까지 왜 따느냐”고 했지만 그는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5년 ‘벌레박사’를 창업했다. 말이 좋아 벌레박사지, 어느 누가 벌레를 달가워하겠나. 가족도 민망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린 딸은 친구가 아빠 직업을 물으면 “한의사”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박 위원장은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회사 이름부터 대놓고 ‘벌레박사’라고 지었다. 박 회장은 “주변에서 ‘박사님, 박사님’ 부르게 만든 것”이라며 “박사라는 말을 들으려면 나부터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현지 한인신문에 ‘벌레박사 칼럼’을 쓰고 있다. 21년째다.
박 회장은 자기 사업을 하면서 현대차같은 대기업에서 배운 서비스 정신만큼은 그대로 이식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이민사회의 생활서비스 업체 중엔 차량 한 대로 영업하고 전화 연결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박 회장은 우선 상담사무실부터 만들었다. 고객이 전화하면 직원이 직접 상담하도록 했고 직원에게 유니폼을 입혔다. 소프트웨어와 차량도 갖췄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서비스회사의 이미지를 바꿔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동생과 미국인 슈퍼바이저 등을 포함해 5명가량으로 시작한 회사의 첫 주문은 저녁 9시께 걸려온 전화 한 통이었다. 애틀랜타 다운타운의 한 순두부 식당에서 벌레를 잡아달라는 요청이 온 것. 박 위원장은 초등학생 아들을 방역차에 태웠다. 그는 “처음으로 일감이 생겼는데 그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아빠가 예전처럼 번듯한 회사를 다니는 건 아니지만, 너희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떠올렸다.
식당 주인은 높은 냉장고 위에도 약을 뿌려달라고 했다. 그때 문득 ‘내가 사다리를 제대로 타본 적도 없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올라가 벌레를 치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식당 주인은 아버지를 따라온 어린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아들은 “감사합니다”라고 꾸벅 인사했다. 박 위원장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첫해 매출은 23만달러였다. 이듬해에는 30만달러로 늘었다.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해충방제업은 오랫동안 미국 사업자들의 영역이었고 업체 간 네트워크도 강했다. 새로 등장한 한국계 업체가 한인 고객을 가져가기 시작하자 “라이선스가 제대로 있느냐”,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며 따져 묻는 전화도 걸려왔다. 불시 감사도 받았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들만의 리그’라는 장벽은 견고했던 셈이다.
박 위원장은 가격보다 서비스로 차별화하기로 했다. 직원들에게 한국식 서비스 예절을 가르쳤다. 고객 집에 들어갈 때 신발부터 벗고 친절하게 작업내용을 설명하게 했다. 박 회장은 “미국 업체는 신발을 신고 집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고객들이 놀랬다”면서 “한 번 계약한 한인 고객이 좀처럼 이탈하지 않으면서 입소문이 퍼졌다”고 말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벌레 방역 사업에 인생을 건 박 회장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2020년 미국 전역을 덮친 코로나19. 공장이 멈추고 식당이 문을 닫았다. 확진자가 발생한 생산시설에서는 사람을 다시 투입하려면 방역이 시급했다. 모두가 공포에 빠져 있을 때 박 위원장의 머릿속에는 사업 초기에 주변 사람들이 “그런 것까지 왜 따느냐”고 했던 라이선스 하나가 떠올랐다. 미생물 등을 다룰 수 있는 마이크로비얼(Microbial) 라이선스였다.
코로나19에 방역 수요 폭발...'대박' 기회가 왔다미국에서는 방역 약품도 자격 없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 박 위원장은 자신의 라이선스로 코로나 방역에 필요한 약제를 사용할 수 있는지 관련 당국을 직접 찾아가 확인했다. 가능하다는 답을 받자 방역복과 마스크, 장비, 약품을 확보했다. 방역용 화학제품이 부족해지자 테네시의 한 창고까지 찾아갔다. 재고가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저거 다 달라”고 했다.
주문이 밀려들었다. 공장에서 확진자가 나오면 “생산라인을 다시 돌려야 하니 빨리 와달라”는 전화가 이어졌다. 직원 10명 안팎을 풀가동해 새벽까지 현장을 누볐다. 아내도 방역복을 입고 작업을 도왔다. 코로나 기간 벌레박사가 처리한 서비스는 약 5000건에 달했다. 연간 60만~70만달러 수준이던 매출은 160만달러까지 뛰었다.
썬박 벌레박사 대표에게 코로나19는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박 대표(맨 오른쪽)가 한인사회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독자 제공정작 박 위원장이 당시를 회상하며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매출이 아니었다. 한인회관과 교회, 한국학교처럼 비용을 부담하기 어려운 곳은 무료로 소독했다. 장례식장도 찾아갔다. “내가 가진 걸로 한국 커뮤니티를 구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정말 행복했다”면서 “의협심 같은 것도 막 생겼다”고 했다. 남들이 쓸데없다고 했던 자격증 하나가 가장 절실한 순간에 사람들을 돕는 무기가 됐다. 공로를 인정받아 올 초엔 존 오소프 연방 상원의원으로부터 상원 공식 표창을 받기도 했다. 오소프 의원실은 “박 회장은 한인 중소기업 오너를 지원하고, 다른 커뮤니티와의 협력을 위해 노력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현재 벌레박사는 약 4000명의 고객을 정기적으로 관리한다. 트럭과 인스펙션 차량 10대가 조지아 곳곳을 누비고 있으며 현대자동차 생산단지가 들어선 사바나 지역까지 서비스를 확대했다. 올해 서비스 매출 목표는 200만달러다. 앞으로 아시아계 고객으로 시장을 넓히고 프랜차이즈 사업에도 다시 도전할 계획이다. 미국 해충방제업계 100위권에 들어가는 기준으로 보는 연매출 800만달러를 10년 안에 달성하는 게 목표다.
공대를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과를 택했지만 정작 대학은 불어교육과에 갔다. 별생각 없이 선택한 불어 덕분에 자동차회사에 들어갔다. 자동차 연구소에서는 문과생이라고 설움을 받았지만 살아남기 위해 자동차공학을 공부했다. 마흔에는 대기업 연구원이라는 간판을 버리고 실리콘밸리를 꿈꾸며 미국으로 향했지만 현실은 냉장실 닭공장이었다. 거기서 빠져나온 뒤에는 가족조차 내키지 않아 했던 ‘벌레 잡는 일’을 택했다. 그리고 남들이 외면한 라이선스를 하나씩 모은 일이 15년 뒤 회사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는 이제 “벌레로 미국에서 제대로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연구소에서도, 닭공장에서도, 그렇게 살아봤잖아요. 거기까지 버티고 나니까 미국에서 무슨 일을 해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박 회장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