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 책 읽으며 반성 또 반성…모든 게 스승”
두툼한 독서노트 10권…딸 도움 받아 책 펴내
지난 8일 박정옥이 강원도 강릉의 자택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평균 5시간가량 책을 읽는다.2018년의 어느 날, 80살을 맞은 박정옥은 마음을 먹었다. “80살이면 이제 ‘(저승에) 갈 나이’다. 더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책이나 읽자. 오늘부터 1천권의 책을 읽자. 그리고 내가 가야 할 곳으로 가야지.” 그날 이후 8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안방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편다. 책, 독서대, 스탠드, 기록을 위한 포스트잇 그리고 돋보기. 87살 독서가를 위한 준비물 전부다. 80대에 1400여권의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온 할머니 독서가의 이야기는 딸 은영이 관리하는 에스엔에스(SNS) 계정을 통해 빠르게 번져나갔다.
딸이 지난해 9월 세상에 내놓은 4초짜리 영상에서 박정옥은 그저 매일 하던 대로 파자마를 입고 앉아 돋보기를 낀 채 책을 읽고 있다. 그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매일 하루 5시간 이상 그렇게 책을 읽는다. 그러나 그 모습에 젊은이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존경스럽다”, “최근에 본 분들 중 제일 멋지심”, “저도 미루고 있던 것부터 하나씩 시작해보고 싶어졌어요. 정말 하고 싶은 일에는 늦은 나이가 없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스탠드 앞에 꼿꼿이 앉으신 모습 하나로 나도 오늘 미뤄둔 걸 다시 펼칠 용기가 생겨”. 1만6천명이 ‘좋아요’를 누르고 1200개의 댓글을 달았다. 사람들은 딸이 부르는 대로 그를 ‘박천권’이라 부른다. 지난 8일 강원도 강릉의 자택에서 만난 그는 책 읽는 일은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무슨 뜻일까.
나이 여든에도 독자는 태어난다. 은퇴 이후 80살에 열혈 독서가로 거듭나 책 1433권을 읽은 박정옥은 독서를 통해 아직 ‘성장’한다. 남들이 책장을 덮는 나이에, 책장을 펼친 그의 이야기를 통해 책 읽기의 본질을 돌아봤다. 그림은 그의 이야기에 감명 받은 스레드 친구(@cucudaldal01)가 그려준 ‘책 읽는 박정옥’의 모습. 그래픽 김은정 기자 ejkim@hani.co.kr“나는 젊어서도 책을 읽고 싶었지만, 삶에 굴곡이 심했고 헤쳐나가다 보니 이 나이가 되었다.”(박정옥의 독서 일기 일부) 대개 80살은 펼쳤던 책도 덮는 나이다. 지난해 국가데이터처 사회조사 자료를 보면, 60대에 37.1%에 이르는 독서 인구는 70대엔 25.8%로, 80대엔 14.3%로 쪼그라든다. 1인당 연간 평균 독서량도 60대엔 4권, 70대엔 2.2권, 80대엔 0.9권으로 추락한다. 체력과 경제력, 기억력이 두루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겠으나, 책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려는 호기심 또한 전만 같지 못해서다. 노년층이 된 뒤에도 남아 있는 소수의 독자들은 젊어서 이미 지식 향유 계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남들이 책에서 등을 돌리는 나이에 되레 열혈 독서가로 거듭난 박정옥의 이야기는 그래서 특별하다. 해방 이전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나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강원도에서 보험 영업으로, 부산에서 한복 바느질 일로 75살이 될 때까지 허리를 펴지 않고 일했다. 늘 책을 좋아했지만, 생업에 바쁜 이들 누구에게나 그렇듯 ‘독서’는 사치스러운 경험이었다. “노는 게 시간”이라는 그의 말대로, 은퇴 이후엔 재미없는 책마저 손에서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노년은, 가장 독서하기 좋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지난 8일 독서가 박정옥이 강원도 강릉의 자택 뒤뜰에서 그의 독서 일기를 묶어 지난달 출간한 책 ‘늦은 나이는 없다’를 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나는 죽을 때까지 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테레비(티브이) 보는 법을 잃어(잊어) 버렸다. 책을 읽는 순간은 너므(너무) 행복하다.”(독서 일기) 책은 평생 일하고 가정을 돌보느라 곁눈질할 새 없던 그에게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을 활짝 열어주었다. ‘1천권만 읽고 (저세상) 가자’던 그의 다짐이 목표를 초과해 1430권까지 이어진 것은 그저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부터 철학, 건강, 종교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최근엔 뇌과학 책에 빠졌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2018년 이후 이틀에 한권꼴이다. 어찌나 재미있는지 그는 한권도 빼먹지 않고 모든 책에 번호를 매겨 독서 기록을 남겼다. 두툼한 독서 노트가 어느덧 10권이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그의 ‘멋쟁이 남편’은 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정말 대단하다”며 그의 책읽기를 응원해주었다.
박정옥에게 책은 노년의 몸이 갈 수 없는 곳에 가고,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게 하는 통로다. 청년기의 독서가 시험과 자기계발에, 중년 이후의 독서가 처세와 경제·경영에 방점을 찍는 것과 차이가 난다. 팔순의 독서는 어떤 책을 통해서도 세상을 배우고, 책을 그저 호기심과 즐거움의 세계로 받아들이던 유년의 독서와 닮아 있다. ‘딱딱한 책을 읽으면 머리가 아프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의 답은 간명하다. “머리가 아프면 못 읽지.” 남들이 좋아하는 책이라도 나에게 재미없는 책은 솔직하게 평가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그는 2023년 10월19일 이렇게 썼다. “인기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지만 꼭 도깨비장난 같은 기분이다. 내가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대강 읽었다.”
“감동적인 책을 읽으며 마음에 반성, 삶에 반성. 나에게는 모든 것이 스승이었다.”(독서 일기) 대개 노인의 마음은 흔들림 없고 완고하다. 87살 박정옥의 마음은 유연하게 움직이며 활짝 열려 있었다. 타고난 성품인지, 1400권 독서의 힘인지 알 수 없다. 그는 책을 통해 전에 없던 겸손함을 배운다고 했다. “사람이 겸손해지더라고요, 책을 많이 읽으면. 성질이 급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참을 수 있더라고.”
가장 많이 좋아하는 소설가 조정래와 시인 나태주의 글은 특히 그를 겸허하게 했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노래하는 나태주의 시는 시인의 순수한 내면을 닮은 것 같아 마음이 맑아진다. 반면 조정래의 소설은 평온한 가슴에 격정을 몰고 온다. 격동하는 역사 이면, 민초들의 마음을 절절히 전한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노인의 눈은 마치 어젯밤 그 책을 읽은 것처럼 반짝였다. “‘태백산맥’을 읽어 보면 반성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조정래 작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그는 ‘빨갱이는 그저 나쁜 놈이고 공산주의는 무조건 해악’인 줄 알았다던 평생의 믿음을 수정했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공산주의를 택하도록)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지주들은 땅을 다 자기들이 차지하니까 괜찮지마는 공산주의는 공동으로 나눠서 산다니까 그게 듣기가 좋았을 거 아니냐고. 그래서 그런 사상을 많이 가졌더라.” 딸과의 유튜브 방송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해방되고 나라가 정리도 안 된 상태에서 우익이니 좌익이니 서로 죽이는 거야. 같은 민족끼리.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87살에도 박정옥의 내면은 아직 ‘성장’하는 듯 보였다.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과의 투쟁”이며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산문집 ‘읽다’)이라고 짚은 김영하의 말대로다.
박정옥이 2018년 이후 꾸준히 기록해온 독서 일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책 읽기는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저서 ‘늦은 나이는 없다’ 중에서) 지난달 박정옥은 자신의 이름이 ‘저자’로 적힌 책을 손에 쥐었다. 딸 지은영이 강릉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엄마의 독서 일기를 엮은 책을 낸 것이다. 표지에는 그의 독서를 응원하는 에스엔에스 친구 ‘쿠쿠달달’이 그려준 ‘책 읽는 박정옥’의 모습이 담겼다. 그림만이 아니다. 어르신의 독서를 자기 일처럼 응원하는 친구들의 마음이 자주 강릉에 닿는다. 책을 보내주는 친구들이 많아, 박정옥의 책상에는 자꾸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쌓인다. “요새는 도서관에를 안 가서 도서관에서 나 죽은 줄 알 거야. 유명한 할머니거든. 하도 책을 읽어서 읽은 책을 또 가져올 때도 있고.”
가족들 역시 든든한 지원군이다. 노년의 독서는 시력 등 신체 능력뿐 아니라 ‘책 공수’가 장애물이다. 다행히 박정옥은 거동도 자유롭고 일반 단행본을 읽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다. “책을 읽기 시작한 뒤 백내장이 개선돼서 오히려 의사 선생님이 놀랄 정도”라고 그는 웃으며 자랑했다. 그래도 책 배달을 해주던 남편과 그를 이어받은 딸의 도움이 없었다면 도서관에서 그동안 무려 760권의 책을 대출해 보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손녀들은 책을 챙겨 할머니에게 보내고 취직한 손자는 첫 월급으로 할머니를 위한 문화상품권을 20만원어치 선물했다고 한다. 박정옥은 그 상품권으로 제일 먼저 좋아하는 조정래의 ‘서리꽃’을 샀다.
노인회장인 그를 따라 입암동 노인회관 어르신들 여럿이 독서에 도전했지만 번번이들 실패한다. 어쩌면 책 읽기를 무거운 숙제로 받아들이는 까닭인지 모른다. 돌아서면 책 내용을 잊어버리는 건 어르신들만의 고충이 아닌데 말이다. 이제는 독서가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은 박정옥의 ‘독서론’은 10대부터 90대까지 모든 독서가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는 책 읽기가 “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다 빠져나가는데, 콩나물은 자라잖아. 조금씩이라도 나에게 도움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읽고 있어.”
그의 말이 옳다. 주인공 이름 좀 기억하지 못하면 어떤가. 책은 이토록 재미있고, 이토록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데! “늦은 나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