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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빙하 두고 들이켜는 라면 국물, 크흐 [칠순의 로드트립]

요약
  • 칠순의 두 남성이 35일간의 알래스카 로드트립 중 수어드와 키나이 피오르 국립공원을 방문했습니다.
  • 이들은 30년 만에 재방문한 식당에서 식사를 즐기고, 엑시트 빙하 트레킹을 통해 지구 온난화로 인한 빙하 후퇴의 실상을 목격했습니다.
[칠순의 로드트립] 키나이 피오르 국립공원의 엑시트 빙하와 4km 암벽 터널 뚫고 닿은 발데즈기자말

칠순의 두 사내가 2026년 8월~9월, 미국 LA에서 출발해 알래스카 북극해를 거쳐 귀환하는 35일간의 로드트립. 날것 그대로의 생태 르포를 전합니다.

환상의 해안 드라이브와 추억의 맛집

앵커리지를 등지고 남쪽 끝 항구 도시 수어드(Seward)를 향해 트럭의 바퀴를 굴렸다. 앵커리지 남단에 혹처럼 매달린 키나이 반도는 지도상으로는 아담해 보여도 실제 면적은 강원도 전체에 맞먹는 거대한 땅이다. 이 반도 남쪽 끝자락에는 알래스카 여행객들이 가장 즐겨 찾는 양대 명소인 호머(Homer)와 수어드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운전 피로도와 시간 대비 동선을 치밀하게 계산한 끝에 낚시꾼들의 성지인 호머를 과감히 건너뛰고 수어드로 직행하기로 결정했다. 집채만 한 넙치류인 핼리벗(Halibut)을 낚는 손맛은 강태공들에게나 축제일 뿐, 낚싯대를 쥐지 않는 우리 둘에게는 왕복 수백 킬로미터를 더 내달릴 만한 가성비가 나오지 않았다.

앵커리지에서 수어드로 이어지는 수어드 하이웨이는 턴어게인 암(Turnagain Arm) 만의 해안선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다. 차창 바로 옆으로 쪽빛 바다가 찰랑이는 환상적인 절경도 일품이었지만,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기이할 정도로 낮게 깔린 구름이었다.

▲ 턴어게인 암 해안도로를 감싼 낮고 몽환적인 구름 띠 앵커리지에서 수어드로 향하는 해안도로. 차가운 바닷물과 거대한 산맥 사이에 갇힌 구름이 수면과 산허리에 닿을 듯 납작하게 내려앉아 이국적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 한진석

태평양의 습한 기류가 차가운 바닷물과 거대한 빙하 산맥에 갇힌 탓인지, 구름은 하늘 높이 피어오르는 대신 수면과 산허리 사이에 굵은 솜이불처럼 납작하게 누워 도로 바로 옆까지 손에 잡힐 듯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바다와 구름 사이로 난 비밀 통로를 달리는 듯한 몽환적인 풍광이었다.

또한 이 도로 주변은 하얀 고래 벨루가와 수만 마리의 물새 떼가 쉬어가는 알래스카 최고의 야생 관찰 구역으로도 이름난 곳이다. 희귀한 흰고래를 눈에 담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바닷가 갓길에 트럭을 세우고 쌍안경을 꺼내 들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잔물결 위를 눈이 짓무르도록 훑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흰 등지느러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야생은 언제나 인간의 조바심을 비웃듯 제 신비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법이다.

벨루가는 보지 못했으나 섭섭함은 전혀 없었다. 지난 수천 킬로미터 동안 지평선 끝까지 메마른 툰드라와 빽빽한 침엽수림만 노려보며 달려온 우리였다. 시야 가득 부서지는 푸른 바다와 기암절벽을 끼고 달리는 해안 도로는, 오랜만에 계기판의 긴장을 털어내고 숨을 고르게 해주는 더없이 평화로운 휴식을 선물해 주었다.

수어드 마을 어귀에 닿자마자 매부가 묵은 기억을 더듬으며 차를 몰았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부는 호젓한 물가 끝자락에 이르자, 낡았지만 기품 있는 통나무집 식당 한 채가 불쑥 나타났다."이 집이 바로 30년 전 친구 부부들과 와서 감탄하며 먹었던 그 핼리벗 집이야!"

주문한 두툼한 핼리벗 튀김 요리가 식탁에 올랐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흰 살코기에서 고소하고 기름진 풍미가 입안 가득 번졌다. 소박한 비상식량에 길들여졌던 혀가 실로 오랜만에 호사를 누렸다. 배를 두드리며 식당을 나선 매부는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식당 간판을 찍어 LA의 옛 친구들에게 전송했다. 30년 세월을 뚫고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켜낸 맛집의 온기 속에서, 낭만을 즐기던 옛 여행자들의 여유가 훈훈하게 묻어났다.

▲ 30년만에 다시 찾은 핼리벗 식당 수어드 바닷가 외딴곳에 핼리벗 맛집이 숨어있다. 매부는 30년전 친구들과 방문했던 이곳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 한진석

도망치는 빙하의 혓바닥, 그리고 뜻밖의 숲길

점심을 든든하게 채우고 인근 키나이 피오르 국립공원의 엑시트 빙하(Exit Glacier) 트레킹에 나섰다. 수어드를 벗어나 빙하로 향하는 길목은 뜻밖에도 키 큰 활엽수들이 울창한 원시림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태평양 난류가 밀려드는 지형이라 연중 온화하고 비가 잦은 해양성 기후 덕분이었다.

탐방로 초입에 들어서자 저 멀리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리다 멈춘 듯한 거대한 빙하의 푸른 혓바닥이 시야를 메웠다. 걷는 길가에는 수십 미터 간격으로 연도가 적힌 팻말들이 꽂혀 있었다. 1800년대부터 2~3년 간격으로 당시 빙하의 끝자락이 머물렀던 자리를 꼼꼼하게 기록해 둔 이정표였다.
팻말을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지구 온난화라는 거대한 재앙의 속도가 서늘하게 뼈에 와닿았다.

1800년대와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완만하게 줄어들던 빙하의 후퇴 속도는, 최근 50년 구간에 들어서자 무서울 정도로 가파르게 산 위로 도망치고 있었다. 인간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을 맹렬하게 파괴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하지만 얼음이 녹아내려 처참하게 맨살을 드러낸 자갈밭을, 바람에 실려 온 풀씨와 어린 자작나무들이 악착같이 메워가며 새로운 숲을 일구는 광경은 또 다른 경이로움이었다. 빙하가 물러난 죽음의 자리에 기어이 뿌리를 내리는 초록의 식물들. 얼음의 비극 너머로 약동하는 지구의 지독한 생명력이 그곳에 있었다.

▲ 피오르 국립공원의 엑시트 빙하, 2010년 빙하의 위치를 표시 엑시트 빙하 2010년의 위치이다. 불과 16년전 까지만 해도 이곳까지 빙하에 덮여있었다. 빙하가 물러간 자리는 파란 식물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 한진석

다음 목적지는 북극해 송유관의 종착지 발데즈(Valdez)였다. 수어드에서 발데즈까지는 바다를 가로지르면 직선거리로 고작 200킬로미터 남짓이다. 하지만 육로로 가려면 거대한 산맥을 피해 북쪽 내륙으로 수백 킬로미터를 빙 돌아가야 하기에 트럭으로 꼬박 10시간을 내달려야 했다. 무의미한 장거리 운전 대신 바닷길을 택했다. 휘티어(Whittier) 항구에서 차를 페리에 싣고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의 피오르 바다를 건너기로 한 것이다.

수어드에서 휘티어까지는 차로 1시간 남짓이라 출항 시간까지 반나절의 여유가 있었다. 달리던 중 '블랙베어 캠프장'이라는 낡은 표지판을 보고 핸들을 꺾었다. 오토캠핑장 뒤편으로 숨겨진 오솔길로 발을 디뎠는데, 기대 이상의 절경이었다. 키 큰 가문비나무와 활엽수가 우거진 깊은 원시림 사이로 굽이치는 길. 한쪽으로는 만년설 암벽이 병풍처럼 솟아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은빛 여울의 계곡물이 나란히 흘렀다. 지난 25일간 걸었던 알래스카의 수많은 길 가운데 단연 가장 눈이 호사스러운 비경이었다.

▲ '블랙베어 캠프장' 만년설 암벽과 계곡이 어우러진 '블랙베어 캠프장' 오솔길. 25일간 걸었던 알래스카 길 중 단연 가장 눈이 호사스러운 원시림 비경이었다.
ⓒ 한진석

숲길을 빠져나와 포티지 빙하 호숫가에 차를 세웠다. 트렁크를 열고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부어 컵라면 하나씩을 비워냈다. 눈앞에 만년 빙하를 병풍처럼 두고 들이켜는 칼칼한 라면 국물은 그 어떤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보다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기차와 함께 달리는 기괴한 1차선 터널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휘티어를 향해 차를 몰았다. 휘티어로 들어가려면 거대한 빙하산을 뚫어 만든 '안톤 앤더슨 기념 터널'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길이만 4킬로미터가 넘는 북미에서 가장 긴 복합 터널인데, 그 구조가 참으로 기괴하다.

터널 내부가 고작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1차선 너비에 불과하다. 그래서 30분 간격으로 들어가는 방향과 나오는 방향의 차량을 교대로 통제하며 일방통행으로 운행한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비좁은 터널을 기차도 함께 쓴다는 사실이다. 바닥에 기차 철길이 깔려 있고, 그 위로 아스팔트를 메워 기차와 자동차가 시간표를 쪼개가며 번갈아 지나다닌다.

스케줄이 어긋나 기차 운행 시간과 겹치기라도 하면 터널 밖 차단기 앞에서 한두 시간 멍하니 갇혀 기다려야 한다. 우리 역시 한참을 대기한 끝에 신호가 떨어져 터널 안으로 진입했다.

▲ 안톤 앤더슨 기념 터널앞에 대기중인 차량행렬 길이만 4킬로미터가 넘는 북미에서 가장 긴 복합 터널인데, 그 구조가 참으로 기괴하다.
ⓒ 한진석

터널 내부는 흡사 2차 대전 당시의 거대한 지하 탄광이나 군사 요새에 들어선 듯 살벌했다. 매끄러운 콘크리트 벽면 따위는 없었다. 투박한 곡괭이와 다이너마이트로 암반을 마구 깨부수며 파고 들어간 것처럼 거친 바위 요철들이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다. 바닥에는 기차 철로가 그대로 밟혔고, 트럭의 사이드미러가 바위벽에 긁히지 않을까 온 신경이 곤두섰다. 이 옹색한 암벽 구멍으로 거대한 화물 열차와 대형 트레일러가 통과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는 서커스처럼 느껴졌다.

어두컴컴한 바위 터널을 빠져나오자, 첩첩산중 속에 숨겨진 비밀 기지 같은 휘티어 항구가 불쑥 눈앞에 펼쳐졌다. 항구에 도착해 곧장 발데즈행 페리 탑승 수속을 밟고, 트럭을 페리 화물칸 깊숙이 밀어 넣은 뒤 갑판으로 올라섰다. 지금까지 숲속 길을 운전하며 알래스카의 깊은 속살을 파고들었다면, 흔들리는 갑판 위는 멀찌감치 물러서서 원시 자연의 거대한 겉가죽을 조망하는 시간이었다.

배는 뱃고동을 울리며 피오르 바닷길을 미끄러져 나갔다. 배 좌우로 솟아오른 험준한 산맥들과 바다와 맞닿은 기암절벽, 빽빽한 침엽수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차가운 물살 위에 등을 대고 벌러덩 누워 조개를 깨 먹던 해달 대여섯 마리가 개구쟁이처럼 고개를 내밀어 잔잔한 웃음을 주었다.

▲ 휘티어에서 발데즈 가는 페리 배 좌우로 솟아오른 험준한 산맥들과 바다와 맞닿은 기암절벽, 빽빽한 침엽수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 한진석

어느덧 사위가 짙은 어둠에 잠기고, 배는 밤늦은 시간에야 발데즈 앞바다에 들어섰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바다 저편에서, 갑자기 거대한 산업 도시의 요새처럼 번쩍이는 발데즈 원유 터미널의 찬란한 불빛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북극해 툰드라 지하 깊은 곳에서 뽑아 올려 1,300킬로미터를 강철 파이프를 타고 달려온 검은 피가 거대한 유조선의 배를 채우는 불야성의 현장. 그 불빛을 길잡이 삼아 페리는 마침내 발데즈 항구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닻을 내렸다.

송유관의 시작과 끝, 연어알과 컵라면의 물물교환

발데즈의 첫날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숙소 식당으로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낯익은 우리말 억양이 귓가를 톡 건드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캐나다인 연인과 함께 식사 중인 40대 한국인 여성이 앉아 있었다. 타향만리 알래스카 외딴 항구 마을에서 마주친 뜻밖의 동포였다.

반가운 마음에 자연스럽게 한 테이블에 합석했다. 머나먼 북쪽 땅에서 모국어가 몹시 그리웠던 모양인지,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막힘없이 유쾌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알고 보니 캐나다인 연인이 글로벌 석유회사 소속으로, 1300킬로미터에 달하는 알래스카 송유관(파이프라인)의 안전 점검을 맡아 이곳에 왔다고 했다. 파이프라인의 종착지인 이곳 발데즈에서 이틀간 정밀 점검을 마친 뒤, 곧바로 출발점인 북극해 데드호스(Deadhorse)를 향해 거슬러 올라갈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데드호스라니! 불과 며칠 전 우리가 거친 흙먼지 진창길을 뚫고 올라가 0도의 북극해 바닷물에 거침없이 몸을 던졌던 바로 그곳이 아닌가. 우리는 북극해에서 시작해 종착점인 발데즈로 내려왔고, 그들은 종착점에서 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반대의 여로 위에 서 있었다. 1300킬로미터 강철 송유관의 시작과 끝이 이 소박한 아침 식탁 위에서 맞물리는 순간이었다.

식탁 위에서는 즉석에서 알짜배기 정보 교환이 이뤄졌다. 우리는 그 험난한 돌턴 하이웨이를 통과하며 겪은 생생한 노면 상태와 주유소 위치, 북극해의 살벌한 날씨 정보를 아낌없이 털어놓았다. 우리보다 하루 먼저 도착한 그녀는 발데즈의 핵심 볼거리인 연어 인공 부화장 위치와 놓치지 말아야 할 트레킹 코스를 꼼꼼하게 일러주었다.

전날 밤 호텔에 짐을 풀고 산책 삼아 나갔던 바닷가 선착장의 의문도 비로소 풀렸다. 밤안개 자욱한 부두에서 수많은 낚시꾼들이 팔뚝만 한 연어를 쉴 새 없이 낚아 올리고, 곳곳에 마련된 공공 해체 작업대에서 살코기만 붉게 떠내던 기이한 풍경의 비밀이었다.

그들은 기름진 살코기만 쓱 베어내고는, 한국에서는 없어서 못 먹는 그 귀한 연어알조차 내장과 함께 쓰레기통에 뭉텅이로 내던지고 있었다. 붉고 영롱한 알들이 버려지는 광경이 어찌나 아깝던지, '이따가 사람들 뜸해지면 슬며시 다시 와서 저 알들만 싹 주워갈까' 하는 실없는 충동마저 일 정도였다. 그녀의 말대로 바다 바로 건너편에 자리한 연어 부화장 입구가 그 어마어마한 회귀의 원천이었던 셈이다.

▲ 발데즈 선착장의 연어 해체장 선착장에서 낚아 올린 싱싱한 연어를 해체하는 작업대. 살코기만 붉게 떠내고 한국에선 귀한 연어알조차 내장과 함께 버리는 모습에 입맛만 다셨다.
ⓒ 한진석

흥겨운 대화 끝에 그녀가 자기들의 비상식량이라며 귀한 연어알 통조림과 간식거리를 넉넉하게 쥐여주었다. 우리 역시 트럭 트렁크 깊숙이 아껴두었던 한국산 컵라면과 햇반 몇 개를 꺼내 선물했다.

머나먼 알래스카 오지에서 오간 연어알과 컵라면의 정겨운 물물교환. 북극해를 질주해온 두 노년 방랑자의 궤적과 거친 북쪽으로 또 다른 길을 떠나는 젊은 연인의 여정이 따뜻한 체온을 나누며 그렇게 서로를 배웅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생명의 바다 발데즈의 푸른 아침 물결이 잔잔하게 빛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칠순의 두 사내가 2026년 8~9월, 미국 LA에서 출발해 캐나다 유콘과 알래스카 북극해를 거쳐 귀환한 35일간 1만 4천 킬로미터 로드트립의 생태 르포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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