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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죽이지 않는다니... '영아 살해' 안 하는 부모에 놀라던 시대

요약
  • 모성애가 여자의 본성이라는 통념에 반박하며, 신화와 역사 속 비정한 어머니의 사례를 소개한다.
  • 그리스 신화의 메데이아와 고대 스파르타의 아기 선별 제도를 통해 자식을 살해하거나 버리는 행위가 사회적·제도적으로 존재했음을 설명한다.
[미술로 만나는 인문학] 모성애 ② 비정한 어머니들
▲  외젠 들라크루아 <격노한 메데이아> 1862년
ⓒ 퍼블릭 도메인

모성이 여자의 본성이라는 주장에 반박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여자들은 어머니로 태어났고 자식에게 헌신하며 살아갈 운명이라는 생각이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는 견해다. 인류 역사로 볼 때 모성이 일정한 시기에 강조되었고, 모성과 거리가 먼 행태가 사회적으로 나타난 사례가 적지 않다는 근거를 든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니라 비정한 어머니의 사례 말이다.

비정한 어머니의 상징 메데이아

서구에서 비정한 어머니의 상징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데이아다. 배신한 남편에게 복수하고자 자기 아이를 살해한 여인이다. 19세기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격노한 메데이아>는 어머니가 두 아들을 살해하기 직전 상황을 담았다. 금방이라도 유혈 낭자한 비극이 벌어질 긴박한 분위기다.

메데이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두 아이를 우악스럽게 끌어안고 있다.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다. 왼쪽 아이는 어머니가 이제 자기를 보호하는 존재가 아님을 직감하고 당황하는 눈빛이다. 오른쪽 아이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보며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이다. 벗어나려 애를 쓰지만, 워낙 어리고 각각 목과 팔이 잡혀있어서 허공에서 버둥거릴 뿐이다.

상황을 이해하려면 간단하게라도 줄거리를 접할 필요가 있다. 이아손은 왕위를 가로챈 삼촌 펠리아스에게 쫓겨났다. 이아손에게 콜키스로 가서 황금 양털을 가져오면 왕위를 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모험 중에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콜키스 공주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황금 양털을 손에 넣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펠리아스는 약속을 어기고 왕위를 내놓지 않았다.

배신당한 이아손을 돕기 위해 다시 메데이아가 나섰다. 펠리아스의 두 딸을 속여 아버지를 죽이게 만들고 이아손과 함께 코린토스로 도망쳤다. 새로운 국가에서 아이 둘을 낳고 살던 중 왕이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하자, 이아손은 권력 욕심에 메데이아를 버리고 결혼했다. 메데이아는 독을 바른 의상을 신부에게 보내 죽게 했고, 딸을 구하러 온 왕도 독에 닿아 죽었다.

메데이아는 두 명의 자식을 죽인 뒤에 코린토스 왕가 병사들의 보복을 피해 도망쳤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추적을 피해 도망치는 과정에서 아이들을 살해하기 직전 상황을 묘사했다.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로 불리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에는 이 상황에서 그녀의 독백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내가 갈 길은 험한 길일 테지. 그런데 나는 이 아이들을 더욱 험난한 길로 보내려 하고 있어. (…) 이승에서의 행복은 너희 아버지가 앗아가 버렸어. 자, 이제 가거라. 이제 너희를 더 보고 있을 수가 없구나. 슬픔에 짓눌려서. 얼마나 흉측한 짓을 저지르려는 것인지, 그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아무리 알고 있어도 들끓는 노여움이 그보다 더 강하구나."

유럽에서 희대의 악녀를 거론할 때면 빠짐없이 메데이아가 등장한다. 자식을 죽였다는 대목에 이르면 비교할 대상이 없는 마녀로 치부된다. 독백은 한편으로 내면의 갈등과 나름의 사정을 느끼게 한다. 왕과 공주의 죽음으로 독기가 오른 병사들이니 자식들도 목숨이 보장된 상황은 아니다. 차라리 어미의 손으로 끝내고 도피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메데이아의 감정이 우선하는 점도 분명하다. 자식을 죽이는 끔찍함보다 남편에 대한 노여움이 더 강하기에 실행에 옮기겠다고 한다. 남편에 대한 분노가 커지니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식어갔다. 그녀의 유모도 "이제는 아이들까지도 보기 싫은 듯 미워하는 눈치니, 무슨 끔찍한 일이라도 저지르지 않으실까 걱정스럽구나"라고 했을 정도다.

적어도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우선하고 늘 자애로운 모성과는 거리가 멀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이 깊어가면서 아이들에 대한 미움마저 생긴다. 자기감정의 해소가 앞서고, 자기 생존을 위해서는 아이들을 제거하는 선택도 한다. 신화로 풀어낸 이야기이기에 나타나는 극단적 설정만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고대사회의 아기 선별과 살해

▲  장 피에르 생투르 <스파르타의 아기 선별> 1785년
ⓒ 퍼블릭 도메인

비정한 부모 이야기는 신화에 머물지 않는다. 스위스 화가 장 피에르 생투르(1752~1809)의 <스파르타의 아기 선별>은 고대 그리스의 사례를 담고 있다. 건강한 아이만 양육하여 전사로 키우려 시행한 스파르타의 아기 선별을 묘사했다. 그리스 출신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나오는 다음 내용을 회화로 표현했다.

"자녀는 부모의 의지대로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레스케라는 곳으로 데려가야 했다. 여기서 각 씨족의 어른들이 공식적으로 아이를 살펴보고 체격이 좋고 튼튼하면 키워도 좋다고 명하고 9천 개로 구획된 토지 가운데 하나를 배정해주었다. 그러나 병약하거나 기형이 있으면 타이게톤 산의 아포테타이 협곡으로 보냈다."

그림 오른쪽 선별 위원들이 갓난아기의 몸을 만져보며 건강 상태를 확인한다. 장로들만이 아니라 아이 양육 경험이 있을 시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본다. 왼쪽으로는 적합 판정을 받지 못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기를 끌어안거나 자기 머리를 감싼 채 안타까워한다. 한 장로가 손을 치켜들어 이들의 태도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라고 훈계하는 모습도 보인다.

스파르타의 입법자로 불리는 리쿠르고스가 만든 제도라고 한다. '레스케'는 원로원 회의장이다. 각 씨족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아기의 신체 상태를 살핀다. 골격과 건강, 장애 여부를 확인하여 양육 허락 대상을 선별한다. 적합 판정을 받은 아기는 부모가 양육하고, 토지가 분배된다.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아기는 '버려두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아포테타이 협곡에 버려진다.

건강하지 못한 아이는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믿음에 따른 제도다. 자녀를 부모의 사랑과 의지로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국가 제도이니 부모의 비정함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까? 시민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이를 국가 자산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많은 부모가 인정했음을 나타낸다. 부모와 자식을 절대적 사랑으로 연결하는 통념과 매우 다르다.

스파르타만의 현상이 아니다. 그리스에서 영아살해가 꽤 널리 행해졌음을 알려주는 언급이 있다. 미국 심리학자 섀리 서러가 <어머니의 신화>에서 전한 다음 내용이 적절한 참고가 된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 그리스인은 이집트인이 영아를 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라워했음을 전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집트인에 대한 것만큼이나 부모로서의 그리스인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녀에 의하면 5세기 아테네 어머니들은 양육하기로 선택한 자녀들만을 좋아했다. 신생아 가운데 여자아기 살해율이 10~20%에 이르렀다고 추정한다. 기원전 200년경의 로마 정복기까지 여자 형제들은 드물었는데, 단지 100가족당 1가족꼴로 1명 이상의 딸을 키웠을 뿐이다. 원하지 않는 여아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 버려질 위험에 처했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아테네에서 아이들은 포대기에 싸여 항아리에 담긴 채로 주택지 밖의 거름더미와 오물통 근처에 유기되었다. 이런 사실은 그리스인들이 버린 자녀들을 일종의 인간쓰레기로 생각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 유기를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의식에 앞서는 출생 후 5~10일이 되기 전까지 해야만 했다.

근대까지 이어진 영아 살해

자녀를 버리는 관습이 서구문화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중세에서도 은밀하게 나타났다. 그 과정은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의 형태로 제도화되었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영아를 유기하거나 살해하는 관행이 근대 유럽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고대사회에서 아이는 제도화된 인구 축소 수단의 희생물이었다. (…) 나의 추론이 비열하거나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면 18세기 영국사를 읽어보시라. 알코올에 중독된 산모 1,000명당 10명꼴로 자기 아이를 템스강에 빠뜨려 죽이거나 천연두로 죽은 사람의 옷에 싸거나 쓰레기통에 버렸다. 머리를 눌러 질식시키거나 여러 수단으로 아이의 생명을 단축했다."

▲  작가 미상 <아기를 던지는 어머니들> 1450년 / 우타가와 쿠니요시 <영아살해 경고> 1847년
ⓒ 퍼블릭 도메인

마빈 해리스는 18세기 영국이라고 했지만, 위의 <아기를 던지는 어머니들>처럼 이미 15세기에 강에 아기를 빠뜨려 살해하는 관행을 그린 삽화가 적지 않았다. 중세에서 근대까지 이어졌다고 봐야 한다. 여러 점의 연작 형식으로 그려진 삽화인데, 영아 유기와 살해에 대한 사회적 대책으로서 보육원과 병원 설립을 촉구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강에 버려져 죽은 '아기의 시신을 건지는 어부들'을 담은 삽화도 있다. 이 그림의 설명에는 어부들이 물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강에 던져진 아기들만 잡았기 때문에 놀랐다고 적혀 있다. 프랑스의 디종 부르고뉴 대학 병원 기록 보관소에 있는 삽화임을 고려할 때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꽤 널리 행해지던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을 보면 먼저 버린 아기가 강물에 떠내려가고, 다른 어머니는 던지는 중이다. 속싸개를 한 갓난아기도 있지만, 한두 살이 된 아기도 버렸던 듯하다. 이어서 다른 어머니도 아이를 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리에 다가서고 있다.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아기의 목에 돌덩이가 묶여있어서, 단순한 유기 행위와는 다르게 살해 의도가 명확해 보인다.

일본에서도 영아살해 관행이 있었다. 일본 에도시대의 채색 목판화인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쿠니요시의 <영아살해 경고>에 생생한 장면이 담겨 있다. 아래에 어머니가 아기의 얼굴을 눌러 죽이고 있다. 아기가 버둥거리지 못하도록 다른 손과 무릎으로 몸을 누르고 있다. 당시 목을 조르거나, 젖은 종이로 얼굴을 덮거나, 강에 던지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

위로는 어머니가 사후 세계에서 심판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염라대왕이 이승 행적이 나타나는 거울을 통해 영아살해를 확인하고 형벌을 내린다. 저승사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은 아기들이 고문한다. 한 아기는 머리를 정으로 쪼고, 다른 아기들은 배에 구멍을 내거나 다리를 붙잡고 물어뜯는다. 지옥이니 어머니 영혼에 고통이 영원히 반복된다. 자녀를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는 그림을 정부가 여러 마을에 배포할 정도로 널리 퍼진 행위임을 보여준다.

마빈 해리스에 따르면 원시사회에서 영아살해는 여아에 집중되었는데, "손에 무기를 들고 싸우는 한 집단이 전장에서 더욱 강한 군사력을 발휘할수록 이웃 부족이 가하는 압력에 저항해 자기 영토를 지킬 가능성도 더욱 커질 것"이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부족 간 충돌이 잦았던 원시사회에서 군인이 될 남성의 수를 극대화하기 위해 여아의 양육을 제한한 결과다.

미국 자연사박물관이 600개 이상의 원시 부족을 조사한 결과, 미성년 인구 중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수적으로 월등히 적은 불균형 현상이 일관되게 나타났다. 두 배나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여아에 대한 인위적인 살해 관습의 결과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느 지역인가를 막론하고 원시사회에서 영아살해가 광범위하게 나타났음을 알려준다.

이후 고대에서 근대까지 경제적 요인도 영아살해의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가정에서 충당할 수 있는 경제 자원의 정도를 넘어서는 자녀의 수에 대해서는 영아살해를 통해 해결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영유아가 대상이 된 이유는 먼저 "아이들은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한 "성인들과 이어져 있는 감정의 끈보다 쉽게 단절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위의 채색 목판화에 그려진 일본의 영아살해도 경제적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17~19세기 에도시대에 성행한 이 행위를 '마비키'라고 불렀다. 본래 농업 용어로 농작물이 촘촘하게 자랐을 때 밭을 솎아내는 행위를 뜻했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가족의 생존을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죽여 가구원 수를 조절하는 행위를, 한정된 농지와 비료로 농사를 짓기 위해 작물을 솎아내는 행위에 비유한 것이다.

많은 역사가가 영아 유기와 살해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이어져 왔음을 알고 있음에도 20세기 중반까지 침묵을 지킨 경향이 있었다. 어머니들이 모든 자식을 사랑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즉 모성이 여성의 본성은 아니라는 생각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나타난 회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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