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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에 공개처형 직관한 내가 트럼프에게 궁금한 것

요약
  • 트럼프 대통령이 총기난사범 니달 하산의 사형 집행 생중계를 추진하다 반대 여론과 반미 선전 우려로 철회했다.
  • 필자는 북한의 공개처형 경험과 비교하며, 이러한 시도가 국가 권력에 의한 감정 조작과 정치적 의식임을 비판한다.
  • 공개처형은 타인의 죽음을 구경거리로 만들어 대중의 무감각과 야만성을 자극하는 폭력임을 강조한다.
총기난사범 니달 하산의 공개처형 생중계 하려다 반미 선전에 이용된다는 지적에 철회"타탕! 타탕! 타탕!"

세 번의 총성이 울렸다. 총알은 아홉 발이었다. 말뚝 5미터 앞에 선 군인 세 명이 무릎과 가슴, 머리를 겨눴다. 나는 일곱 살, 당시 인민학교 1학년이었다.

학교는 우리를 단체로 '관람'에 데려갔다. 어린 아이들은 맨 앞줄에 섰다. 죄명은 김일성 초상화를 꾸민 구리 월계수 장식을 뜯어 판 것이었다. 처형과 시체 정리까지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군인들은 시신을 가마니에 말아 트럭에 실었다. 사람들은 말뚝의 핏자국을 보며 혀를 차다 흩어졌다.

나는 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 그리고 창틀에 매달려 그곳을 다시 내다봤다. 집에서도 보이는 곳이었다. 그날 나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 날의 장면은 또렷하다. 감정 없이 기억만 남았다. 나는 이 경험을 영화 <이퀄리브리엄>에 빗대 쓴 적이 있다. 감정을 억제하는 약 프로지움을 먹으며 사는 세계다(관련 기사 : 혁명의 언어와 설득의 언어, 그리고 이퀄리브리엄).

북한의 공개처형은 그 약과 같았다. 공포를 심고, 동시에 공포를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죽어도 싸다"는 명분은 국가가 준다. 동요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게 무감각은 체제의 일부가 된다. 공개처형은 북한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그 장면이 미국에서 벌어질 뻔했다.

사형 집행 생중계하겠다더니 철회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6년 10월 16일 조지아주 달튼의 달튼 시립공항에서 열린 중간선거 유세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AFP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10일 2009년 포트후드 총기난사범 니달 하산의 총살형을 승인했다. 집행일은 12월 3일, 장소는 포트후드다. 미군이 군사법원 판결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1961년 이후 이번 미 육군 군의관이었던 니달 하산이 처음이다. 하산은 13명을 숨지게 했다.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 문제는 사형 집행을 생중계하겠다는 미국 대통령의 공식 입장이다. 사람들이 지켜봐야 이런 범죄에 무거운 대가가 따른다는 걸 이해한다는 논리였다.

미군의 마지막 공개처형은 1930년대였다. 처형이 생중계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니 반발이 컸다. 워싱턴포스트·ABC·입소스 조사에서 미국인 80%가 생중계에 반대했다. 공화당 톰 틸리스 상원의원은 공개처형은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독재국가가 하는 일이라고 했다. 밴스 부통령도 자신은 보지 않겠다고 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처형 생중계가 공개처형과 다름없고 고문 금지 원칙을 어긴다고 밝혔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15일 생중계를 철회했다.

하산은 예정대로 총살된다. 다만 중계는 하지 않고, 희생자 직계 가족은 원하면 현장에서 지켜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생중계 철회 이유는 영상이 반미 선전에 쓰일 수 있다는 것, 미국의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람들이 그가 죽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관객이 원치 않아 접는다는 말이다. 처형을 보여주는 게 도덕적으로 옳지 않아서 철회한다는 말은 없었다.

북한판과 트럼프판, 무엇이 다른가

공개처형을 직관했던 나로서는 두 장면을 겹쳐 본다. 트럼프의 생중계 시도가 북한과 닮았다. 국가가 죽음을 보여주고 시민을 관객으로 세우는 짓. 작동 방식은 조금 다르다. 북한판은 감정을 지운다. 관람은 의무다. 동요해서는 안 된다. 공포는 속으로 삼키고 얼굴에는 평온함을 유지해야 한다. 처형된 범죄자에 대한 분노만 허용된다. 이 반복이 무감각을 만든다. 목적은 체제에 대한 복종이다.

트럼프판은 감정을 끓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은 정의를 목격할 자격이 있다"고 썼다. '그들'은 유가족을 의미한다. 여기서 요구되는 감정은 무감각이 아니다. 분노와 응징의 쾌감이다. 생중계를 지켜볼 대중도 마찬가지다. 사회학자 뒤르켐은 처벌이 범죄자보다 처벌하는 공동체를 위한 의식(Ritual)이라고 봤다. 함께 분노하며 '우리'를 다진다는 것이다.

북한의 공개처형도 트럼프의 생중계 구상도 그 의식을 정치에 쓰려는 시도에 가깝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국가가 처형을 광장에서 담장 안으로 옮겼다고 썼다. 교수대에 처하고 몸에 형벌을 새기며 권력을 과시하고 복종을 강요했던 시대가 끝난 것이다. 이유는 군중이었다. 처형장의 군중은 언제든 사형수 편에 서서 권력에 등을 돌릴 수 있었다. 근대 국가체제에서 공개처형은 거의 사라졌지만, 사형대에서의 처형이나 교수형은 여전히 나라별로 제각각으로 유지되고 있다.

트럼프의 생중계 시도는 푸코가 말했던 그 담장을 다시 허무는 일과 같다. 오늘 날 광장은 곧 스마트폰이다. 죽음에 조회수가 붙는다. 북한판은 감정과 동요를 억제억제하는 것이 목표이고, 트럼프판은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를 위한 희열을 끓어 올리려는 감정의 과열이 목표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그것을 관람하므로 오히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자극이 반복되면 사람은 거기에 무뎌진다. 분노의 구경거리도 몇 번 보면 일상이 된다. 감정의 과잉도 결국 또 하나의 이퀄리브리엄이다.

일곱 살에 봤던 그 죽어가던 사람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 "나를 죽이지 말라"는 윤리적 의무라고 말했다. 아무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얼굴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연약하고도 가장 벌거 벗겨진 생태이며 무방비한 상태를 보여주기에 타인을 마주할 때 우리는 타자를 보호해야 할 무한한 책임이 부여된다고 했다. 그런데 공개처형은 '나를 죽이지 말라'는 그 얼굴을 정면에서 거스르는 폭력이다.

카뮈는 <단두대에 관한 성찰>에서 "본보기를 위한 사형"의 모순을 적확하게 꼬집었다. 사형존치론자들의 주장처럼, 사형이 범죄를 막는 본보기라면 왜 그것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고 담장 안으로 숨기느냐고 했다. 사형을 관람시키는 것이 범죄예방 효과보다 오히려 대중의 야만성을 더 자극할 수 있으며 이것이 도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뎌진 감각은 저절로 돌아오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트럼프는 생중계를 철회했다. 처형은 집행하되 대중에게 공개는 하지 않겠다며 한 발 물러났다. 글쎄, 이걸 한 발 물러났다고 표현하는 것도 당혹스러울 만큼 트럼프의 처형 의지는 여전히 지탄의 대상이다.

이번 철회는 카뮈가 지적했던 그 모순을 다시 확인시켰다. 보여주겠다고 하자 다수가 고개를 돌렸다. 보여줄 수 없는 형벌이라면, 보는 게 옳지 않다는 형벌이라면, 그 형벌은 정당한가? 사형제를 다시 묻게 된다. 물론 나도 가끔은 범죄자의 잔혹함에 응당한 처벌을 가하는 것이 정의(justice)가 아니냐는 내적 충돌이 크다. 이런 내적 충돌의 다수가 곧 여론이기도 하다.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4월 연방 사형 집행 수단에 총살형, 전기의자형, 가스질식사형을 추가하는 방안을 내놨다. 형의 종류는 중요치 않다. 모두 국가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사형은 되돌릴 수 없다. 오판이 드러나도 살릴 방법이 없다. 한국은 1997년 12월 30일 23명을 끝으로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국제앰네스티는 2007년 한국을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했다.

나는 공개처형을 보고 밥을 먹던 아이였다. 그 무감각을 깨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쪽에 와서야 그 장면이 끔찍했다는 걸 깨달았다. 감정은 저절로 돌아오지 않았다. 슬퍼해도 되고 분노해도 되는 사회, 죽음을 구경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 조금씩 돌아왔다.

여전히 미국은 브레이크가 있는 사회다. 여론이 반대했고, 같은 당 정치인들도 독재국가 같다고 말했다. 북한에는 그 브레이크가 없다. 여론이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차가 완전히 멈춘 건 아니다. 트럼프는 처형장을 무대로 만들려 했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부러운 것일까?

덧붙이는 글 | 조경일 작가는 현재 피스아고라 대표로 활동한다. 정치개혁, 분단체제 해체 등을 연구하며 주체적 시민의 참여를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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