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멕시코 이주 한인들의 삶을 그린 영화 ‘애니깽’ 속 한 장면. 동아DB |
이들은 1905년 목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오겠다는 꿈을 안고 멕시코행 배에 올랐다. 하지만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날 즈음, 조국은 일제 침탈로 무너지고 말았다. 돌아갈 곳을 잃은 이들은 이역만리에서 새롭게 삶의 터전을 일궜다. 필자는 그들의 후손을 돌보는 의료봉사단 일원으로 현지에 간 것이다. 메리다에 머무는 동안 필자 머릿속에는 마야문명의 비극과 대한제국 국권 상실이라는 인류사의 두 고난이 교차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 보낸 ‘애니깽’멕시코에서 번성했던 마야문명이 9~10세기 무렵 갑자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원인은 학계의 오랜 연구 주제였다. 일부 학자는 16세기 스페인 침략자들이 가져온 외래 감염병이 원주민 90% 이상을 몰살시켰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반면 기후 변화에 따른 극심한 가뭄, 주식인 옥수수에 발생한 병충해, 인구 과밀이 야기한 수질 오염 및 감염병 유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의견도 있다. 환경 파괴와 질병 대응 실패가 거대한 문명을 안에서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마야의 비극이 보건의 중요성을 보여준다면, 메리다에 뿌리내린 애니깽의 역사는 인간의 강한 생존력과 숭고한 애국심을 웅변한다. 이들은 고된 노동과 굶주림,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피땀 흘려 모은 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지금도 메리다 한인회관을 비롯한 멕시코 곳곳에는 이들의 고국을 향한 핏빛 염원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애니깽 4~5세가 처한 보건의료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현지 의료체계의 한계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혈압, 당뇨 같은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이가 적잖다. 고국을 위해 헌신한 이들의 후손이 보건의료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보건학 관점에서 질병은 바이러스 침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공동체가 구성원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낼 수 없을 때 치명적인 병리 현상이 시작된다. 마야문명이 보건 환경 악화와 기근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듯이, 우리 역시 역사를 잊고 소외된 이웃을 방치한다면 내적 역동성을 잃게 될 것이다.
애니깽 후손에게 이제는 우리가 답할 차례다. 일회성 봉사를 넘어 그들의 보건의료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체계적 지원이 절실하다. 그것이야말로 120년 전 선조들이 고국에 보낸 뜨거운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인류애일 것이다.
구한말 멕시코 이주 한인들의 삶을 그린 영화 ‘애니깽’ 속 한 장면. 동아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