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9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도서전의 피셔(S. Fischer) 출판사 전시 부스에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캐나다 작가 앤 카슨의 축하 포스터가 전시돼 있다. EPA 연합뉴스홀로 쓰이는 글은 세상에 없다. 사랑이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인 것처럼, 모든 작가는 앞선 작가들과 함께 글을 써낸다. 예컨대 윤동주가 남긴 육필 원고를 살펴보면 꽤 귀여운 흔적이 있다. 그는 백석의 시 ‘모닥불’을 읽고 시의 끝부분에 붉은 글씨로 ‘걸작傑作이다’라고 써두었다. 선배 시인의 시를 읽다가 마음이 동하여 붉은 색연필을 들었을 청년을 생각하면 흐뭇해진다. 그런데 백석의 온정적인 시선과 평등의 상상력이 먼 훗날 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어떤 만남과 대화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시는 그런 부드러운 침투와 포옹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배반이든 계승이든 초월이든, 우리는 시를 쓰며 앞선 것들과 대화를 나눈다. 앤 카슨은 이를 부단히 해낸 놀라운 작가다. “다들 미쳤네요!”라는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은 그 대화가 얼마나 외롭고도 치열한 것이었는지를 우아하고 쾌활하게 보여준다. 시는 우리를 대화적인 존재로 만드는 동시에 누구보다도 독자적인 존재로 만든다.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타자가 되고 동시에 가장 나다운 얼굴이 된다.
시인부터 고전학자까지… 오래된 질문을 사랑하다
앤 카슨은 1950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활발한 저술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저작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시인, 에세이스트, 번역가, 고전학자’. 이 모든 직업에는 유사성이 있다. 다양한 구성물들 ‘사이’에서 이를 연결하거나 옮기고 분석하고 대화하는 등 중간자적 특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대부분 난감하고 까다롭다. “번역자라면 누구나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옮겨질 수 없는 지점을 알고 있다.”(‘침묵하고 있을 권리에 대한 변주들’, ‘플로트’, 봄날의책 펴냄) 즉, 카슨은 이 지점을 알면서도 이런 직업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다. 옮길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든 옮기려 하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감히 말하려 하며, 더 나아가 이미 소실되어 일부만 남은 옛적의 시들을 간신히 해석하려 시도하는 것. 이러한 맥락에서 시인, 에세이스트, 번역가 그리고 고전학자라는 카슨의 이력은, 그의 영혼이 향하는 방향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것은 ‘불가능’에 계속해서 접근하는 것. 소실된 것을 현재적인 것으로 마주하는 것. 표현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두드리는 것. 말을 거는 것. 과거를 외롭게 두지 않는 것. 대화를 통해 우리가 우리로 거듭나는 것. 그렇게 “오래된 질문들을 사랑”(‘녹스’, 봄날의책 펴냄)하는 것.
실제로 앤 카슨의 문학적 이력은 이렇게 시작된다. “에로스를 최초로 ‘달콤씁쓸한’이라고 부른 이는 사포였다.”(‘에로스, 달콤씁쓸한’, 난다 펴냄) 이 글은 1986년 출간된 앤 카슨의 첫 단행본의 첫 문장인데, ‘사랑’이라는 가장 흔하고도 보편적인 관념을 말하기 위해 그는 기원전 612년에 출생한 시인 사포의 말을 인용해 대화를 시작한다. 여기서 카슨은 영어식 표현인 ‘bittersweet’(씁쓸달콤한)와 사포가 사용한 복합어 ‘글루쿠피크론’(glukupikron)의 차이를 지적한다. 이 그리스어는 ‘씁쓸달콤’이 아니라 ‘달콤씁쓸한’이라는 순서로 표기된다. 단어 하나에도 사랑에 관한 시간적 경과와 인식 및 경험이 묻어난다. “여기서 에로스는 달콤함을 가져다준 다음 씁쓸함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겨지는 셈이다. 사포는 가능한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구분하고 있다.”(같은 책) 우리는 사랑이 우선은 달콤하게 찾아와서 쓰디쓰게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숱하게 보았다. 그 씁쓸하고도 아름다운 인식이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왜 카슨의 시는 어려울까
이처럼 앤 카슨의 문학 전반은 대화적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어렵고 인용이 많다. 에밀리 브론테, 밈네르모스, 스테시코로스, 카툴루스, 카프카, 죽은 오빠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 시대와 성별, 국경과 원근을 가벼이 넘으며 그는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는 풍경을 그린다. 그래서 그의 시는 손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 어려움이 그의 시가 지닌 사랑의 핵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어보자.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카슨은 담담하지만 아프게 말한다.
“그는 자신만이 아는 언어,/ 으르렁거림과 음절들과 거칠고 갑작스러운 호소로 이루어진 언어를 사용한다.// 너울대는 말들 위로 이따금씩 몇몇 상투적인 문구들이 떠오른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라든가 생일 축하해!―/ 하지만 삼 년도 더 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문장다운 문장은 떠오른 적이 없다./ 나는 그의 앞니가 검게 변해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나는 미친 사람들의 이는 어떻게 닦아주는지 궁금하다.”(‘유리 에세이’,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난다 펴냄)
‘소리’와 ‘언어’ 사이를 오가는 아버지. 치매로 인해 양팔이 결박된 채로 병원에 입원한 그는 가장 이질적인 언어와 가장 평범한 말들을 뒤섞어서 말한다. 이것 역시 번역가이자 시인인 카슨이 옮겨야 하고 조우해야 하는 ‘어려운 말’이다. 그리고 이런 난감하고도 슬픈 언어 앞에서 시인은 아버지의 구강을 보며 어떻게 이를 닦아주는지를 궁금해한다. “미친 사람들의 이”를 어떻게 닦아주는가. 그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가능해지나. 미친 말은 그저 미친 말이기만 한 것일까. 그것을 썩지 않게 두는 게 시와 인간이 아닐까.
어떤 걸음보다 진보적인 ‘뒷걸음’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앤 카슨의 시에 나타나는 난해함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즉 그의 시에 나타나는 다양한 인용과 쉽사리 읽히지 않는 시적 어려움은,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지적이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고 쉽게 번역되지 않으나, 그것이 인간의 형태를 지닌 소리이기에 귀 기울이는 것. 나는 이 경향적(傾向的) 자세가 참 아름다워 보인다. 이 자세를 에로스가 아니면 무어라고 말할까.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려 하고, 볼 수 없는 것을 보려 하고, 죽은 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 앤 카슨은 그렇게 뒤로 걷는다. 그리고 이 뒷걸음은 사랑을 함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걸음보다도 진보적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뒤로 걷지 못하게 했다. 죽은 자들이나 그렇게 걸어, 그녀는 말하곤 했다. 그녀는 어쩌다 이런 믿음을 품게 됐을까? 아마도 오역誤譯 때문이겠지. 어쨌거나 죽은 자들은 뒤로 걷는 게 아니라 우리 뒤를 따라오면서 걷는다. 그들은 폐가 없고 소리쳐 부르지도 못하지만 우리가 뒤돌아보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중 많은 이들이 사랑의 희생자다.” -앤 카슨, ‘뒤로 걷기에 대한 짧은 이야기’ 전문(‘짧은 이야기들’, 난다 펴냄)
고명재 시인
‘에로스, 달콤씁슬한’, 앤 카슨, 황유원 옮김, 난다, 2025
‘녹스’, 앤 카슨, 윤경희 옮김, 봄날의책, 2022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민승남 올김, 한겨레출판, 2024
2026 노벨문학상을 받은 앤 카슨. 노벨상 누리집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