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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희석되면서 퇴직과 은퇴라는 말 사이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직장에서 정년까지 일하다 퇴직하면 더는 일을 하지 않던 시절에는 퇴직이 곧 은퇴를 의미했지만, 퇴직이 곧 은퇴를 의미하던 시절은 지났다. 직장을 떠나는 것을 퇴직이라면, 은퇴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근로소득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는 때를 은퇴로 정의한다. 은퇴 전에는 근로소득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남는 돈으로 저축했다. ‘근로소득=생활비+저축’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은퇴 후 근로소득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다면, 다른 소득원을 찾아야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연금소득, 모아둔 금융자산과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자산소득이다. 따라서 은퇴 후에는 ‘생활비=근로소득+공적연금소득+자산소득’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은퇴 후 평안한 삶을 유지하려 3가지 소득원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소득원이 갖는 특징을 파악한 다음 적재적소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먼저 근로소득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감소하기 때문에 언제까지 근로소득에만 의존해 살 수는 없다. 노령연금과 같은 공적연금소득은 한번 개시하면 정해진 금액을 계속 받아야 한다. 물가상승률에 맞춰 연금액이 인상되기는 하지만, 은퇴자 필요하다고 맘대로 꺼내 쓸 수는 없다. 반면 자산소득은 인출 시기와 금액을 은퇴자가 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연성이 뛰어나다. 내게 맞는 은퇴소득 조합은 무엇일까. 근로소득, 공적연금소득, 자산소득을 모두 활용해 노후생활비를 충당할 수도 있지만, 그게 여의치 않을 때도 있다. 아직 노령연금을 받을 나이가 되지 않았다면 근로소득으로 부족한 부분을 자산소득으로 메워야 한다. 필요하면 노령연금을 당겨 받을 수도 있다. ‘소득이 있는 업무’에 종사하지 않으면, 노령연금 개시를 최장 5년 앞당길 수 있는데, 이를 조기노령연금이라 한다.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의 합이 ‘A값’(2026년 319만3511원)보다 적으면 ‘소득이 있는 업무’에 종사하는 않는 것으로 본다.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하면 빨리 받는 대신 적게 받아야 한다. 연금 개시를 1년씩 앞당길 때마다 연금액이 6%씩 감액되며, 5년 빨리 받으면 30% 감액된다. 그러면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하는 것과 정상적으로 수령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유리할까. 정상적으로 65세부터 연금을 받는 쪽과 5년 앞당겨 60세에 조기 수령하는 쪽을 비교해 보자. 다른 조건이 동일할 때 누적 연금수령액을 비교하면 75세를 전후로 유불리가 갈린다. 75세 전 사망하면 5년 앞당겨 수령한 쪽이, 75세 이후에는 정상수령한 쪽의 누적 수령액이 많다.
하지만 은퇴자가 기대수명만 고려해 연금개시 시기를 정하진 않는다. 은퇴자의 심리적인 면도 고려해야 한다. ‘숲속에 새 떼보다 내 손 위의 새 한 마리가 낫다’는 속담처럼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 수익보다 작더라도 확실한 현재 소유를 더 가치 있게 여긴다. 비상예비자금도 고려해야 한다. 연금소득이 없으면 금융자산을 활용해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데, 유동성이 큰 현금이 줄어들 때 은퇴자는 불안감을 느낀다. 목돈이 필요한 비상상태가 발생했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산소득이라면 금융자산을 활용해서 얻는 소득을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4년 고령자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 가구의 자산 중 부동산이 80.1%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퇴자가 보유한 부동산 중 상당 부분은 거주 주택이다. 따라서 은퇴 후 자산소득은 거주 주택을 언제,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근로소득이 사라지고 나면, 공적연금소득과 자산소득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한다. 이때 거주 주택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우선 주택 규모를 줄이거나, 거주지를 이전해서 얻은 차액을 생활비로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거주 주택을 담보로 주택연금을 신청할 수도 있다. 은퇴자가 보유한 주택의 공시가격이 12억원 이하이고, 부부 중 연장자가 55세 이상이면 거주 주택을 담보로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주택연금에 가입하면서 종신지급방식을 선택하면 가입자 본인과 배우자가 모두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 연금액은 가입자(연소자) 나이와 주택 가격(시가)을 기준으로 책정된다. 정액형을 선택하면 가입 당시 정해진 연금액을 본인과 배우자가 사망할 때까지 받는다.
은퇴자는 ‘죽기 전에 돈이 먼저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한다. 무전장수(無錢長壽)의 불안을 잠재우려면 ‘자신의 수명’과 ‘자산의 수명’을 일치시켜야 한다. 방법은 종신토록 받을 수 있는 연금소득을 확보하는 것인데, 노령연금과 주택연금이 여기 해당한다. 노령연금의 장점은 크게 3가지다. 첫째, 가입자가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받는다. 둘째, 가입자가 사망하면 배우자에게 유족연금을 지급한다. 셋째, 물가가 오르면 연금액도 인상된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연금액이 부족해 노령연금만으로는 노후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다.
노령연금 수령액을 늘리려면 연기연금을 신청하면 된다. 연기연금을 신청하면 연금개시 시기를 최장 5년 늦출 수 있다. 연금 개시를 1년씩 늦출 때마다 연금액은 7.2%씩 증액되고, 5년을 늦추면 연금액이 36% 늘어난다. 연기하는 동안 물가상승분을 반영하면 연금액은 더 늘어난다.
연기 신청을 했다가 일찍 사망하면 손해지만, 장수 리스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은퇴자가 노령연금 개시를 65세에서 70세로 연기하고, 부족한 생활비는 주택연금(종신지급방식)으로 충당한다고 해보자.
이 같은 방법으로 70세부터 사망할 때까지 생활비 걱정을 덜어내고 나면, 남은 것은 근로소득과 자산소득(금융자산)을 활용해서 은퇴 이후부터 70세가 될 때까지 생활비만 마련하면 된다. 기간이 확정되면 계획을 세우기가 용이하다. 이게 정답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전장에서 유능한 장수가 자신이 가진 무기의 특징을 잘 알고 적재적소에 사용하듯, 은퇴자는 자신의 가진 소득의 특징에 맞는 인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