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경유 허용 이어 대러 봉쇄 해체 수순
유럽에 "러 가스 수입 재개하라" 압박
2017년 7월 독일 함부르크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회담을 하고 있다. 함부르크=AP 연합뉴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회가 통과시킨 대러시아 제재법의 시행을 전격 유예했다. 법안 발효를 불과 이틀 앞두고 기습적으로 단행된 이번 결정으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이 4년 넘게 구축해 온 대러 경제 압박망을 미국 스스로 허물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안보 원칙과 동맹의 신뢰를 내팽개치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경제적 탈출구를 열어줬다는 거센 비판이 나왔다.
특사 띄워 거래형 종전 타진
백악관은 16일(현지시간) 늦은 밤 트럼프 대통령이 국익을 이유로 '린지 O 그레이엄 러시아·이란 제재법'의 핵심 조항 집행을 유예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상원에서 86대 11이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 이 법은 러시아 고위 관리 및 금융기관을 겨냥하고 러시아산 원유를 사들이는 5대 수입국에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전방위적 제재 패키지다. 지난 7월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직후 갑작스레 별세한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의 유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법안에 명시된 대통령 고유의 면제 권한을 발동해 18일로 예정됐던 법안 시행을 무력화했다. 최근 러시아산 경유 수입을 허용한 데 이어 일주일 만에 나온 추가 완화 조치다.
이번 제재 유예는 단발성 조치가 아니다. 물밑에서 추진 중인 '거래형 종전 모델'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7일 미국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비선 특사로 활동 중인 재러드 쿠슈너와 스티브 윗코프는 최근 유럽과 우크라이나 고위 당국자들과 잇따라 접촉하며 "유럽이 우크라이나 경유 파이프라인을 통해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재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러시아에 거대한 시장과 달러 수익을 보장해 주는 대신 종전 테이블로 끌어내겠다는 구상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024년 10월 17일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담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브뤼셀=AFP 연합뉴스러시아 환호... 우크라 유럽은 경악
러시아는 즉각 환호했다. 푸틴 대통령의 경제특사인 키릴 드미트리예프는 16일 "마침내 얼음이 깨졌다"며 미·러 간 대규모 경제 협력이 다시 시작됐음을 알렸다. 그는 러시아 원전을 활용한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구축과 석유 대기업 루크오일 자산 거래, 해저 가스관 노드스트림 2 재가동 등 미국과 논의 중인 대형 프로젝트들을 거론했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미국의 제재 암전, 침략자에 대한 압박 완화, 푸틴에 대한 재정적 보상은 그가 공격을 계속하도록 부추길 뿐"이라고 비판했다. 로베르트 하베크 전 독일 경제장관은 NYT 인터뷰에서 "유럽, 특히 독일은 다시는 러시아 가스에 의존해선 안 된다"며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인보다 푸틴에게 더 많은 동정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두렵다"고 직격했다.
공화당 "독재자 굴복"
공화당 내 정통 보수파도 비판에 가세했다. 존 코닌(텍사스) 상원의원은 SNS에 "의회는 트럼프가 푸틴에게 제공하고 있는 '원조'에 대해 즉각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일갈했고, 톰 틸리스(노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은 "무고한 민간인을 매일 학살하는 독재자에게 굴복한 처사이자 극도로 무책임한 결정"이라고 질타했다. 테드 크루즈(텍사스) 상원의원 역시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제재 중단은 실수였다"고 비판했다. 오빠의 지역구를 승계해 선거를 치르고 있는 달린 그레이엄 상원의원조차 기자회견을 통해 "푸틴과 러시아를 신뢰하지 않으며, 나라면 러시아에 압박을 유지했을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과 거리를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