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테이프선 ‘작자 미상’, 원작자는 15년 직장인
“신 집사, 신학해라”…희귀암 딛고 찾은 소명, 다시 신학교로
“교회문화, 복음 앞서는 기교 경계해야” 오직 주님만
신상근 목사가 지난 15일 경기도 포천 행복한교회에서 기타를 잡고 실로암을 만들었던 1981년 12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는 차가운 새벽이었소/당신 눈 속에 여명 있음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소/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나에게 영원한 이 꿈속에서 깨이지 않게 하소서.”40년이 훌쩍 넘도록 사랑받고 있는 복음성가 ‘실로암’ 가사다. 이 곡은 육군 훈련병들에게 유독 큰 사랑을 받으면서 논산 육군훈련소 연무대 군인교회에서 이 찬양을 목놓아 불러보지 않은 이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손뼉을 치고 제자리에서 뜀박질하며 새 빛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게 만들었던 불후의 명곡 ‘실로암’은 긴 세월 작자 미상으로, 혹은 외국의 번안곡이나 다른 이의 이름이 붙은 채 주인을 잃고 떠돌았다.
정작 창작자는 찬양과는 먼 곳에 있었다. 신학교를 떠나 직장인으로, 사경을 헤매던 말기 암 환자로 곡절을 겪고 다시 목회의 자리로 돌아온 신상근(64) 포천 행복한교회 목사가 이 곡을 빚어낸 주인공이다.
지난 15일 교회에서 만난 신 목사의 사무실 책장 앞에는 기타가 놓여 있었다.
“70년대 말에 지금의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는 악기 가게들이 여럿 있었어요. 고등학생 때 처음 기타를 샀죠. 기타 연주와 작곡 등을 모두 교회에서 형들한테 배웠어요. 순복음옥수교회에 다녔는데 아버지는 이 교회 장로였고 어머니는 늘 새벽 제단을 쌓으셨어요. 그런 신앙적 감수성 속에서 실로암을 썼습니다.”
청소년기 그는 명동에서 모이던 예수전도단(YWAM) 화요 모임을 쫓아다니던 ‘찬양 키즈’였다.
결정적인 순간은 1980년 겨울,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 예비고사를 마치고 작정한 ‘40일 새벽기도회’ 끝자락에 찾아왔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최기순 목사가 강대상에서 요한복음 9장 말씀을 선포했던 날이었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실로암 못에 가 씻고 난 뒤 눈을 뜨고, 영적 어둠에서도 벗어난 구원의 사건을 담고 있는 구절이다.
“그 말씀이 벼락처럼 가슴을 쳤습니다. 장래 걱정으로 막막하던 때였는데 새벽 제단에서 곧바로 시상이 떠올랐습니다. 빈 공책에 썼습니다. 훗날 정식 악보에 옮겨 적었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어 아쉽습니다.” 그렇게 그해 12월 스무 살 청년의 손끝에서 ‘실로암’ 1절이 탄생했다.
신 목사가 쓴 건 1절만이었다. 현재 불리는 2~3절은 훗날 성도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자연스레 살이 붙은 노랫말이다.
그가 장로회신학대에 진학한 건 실로암을 통해 신앙 고백을 한 뒤였다. 신학과에 입학한 신 목사는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컸다. 마침 그해 신설된 교회음악과 학생들과도 많이 어울리며 음악적 감수성을 더했다.
학생들이 만든 선교 동아리인 ‘장신선교단’에도 합류했다. 실로암은 이 선교단의 단가로 채택되며 널리 사랑받기 시작했다.
“군에 다녀오니 길거리 리어카 테이프에서 제 노래가 나오더라고요. 이때 보니 ‘작자 미상’이라고 돼 있었습니다. 저작권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이었죠. 대학 동기인 이준용이 ‘네 찬양을 관리해주겠다’며 아가페출판사 찬양집 맨 앞 1번에 실로암을 실어주면서 비로소 제 이름이 공식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준용씨는 CBS ‘찬양의 꽃다발’을 진행한 방송인이자 신 목사의 대학 동문으로 훗날 TBN 한국교통방송 본부장 등을 지냈다.
제대 후 신 목사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생계 문제로 복학을 미룬 채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직업이 됐다. 유명 작사가이자 매부였던 고 정두수 선생의 회사 책임자로 일하며 15년간 사회생활을 했다.
1992년 결혼해 가정을 꾸렸으나 마음 한구석엔 늘 부르심에 대한 빚진 마음이 남아 있었다. 신 목사는 “연애할 때 아내에게 무심코 ‘나 마흔 살이 되면 신학을 다시 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고 말했다.
목회에 대한 미련은 일종의 빚과도 같았다. 혹독한 상환 요구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1998년부터 기침이 잦아들지 않고 체중이 급격히 줄었다. 과로인 줄 알고 이듬해 5월 연휴에 찾은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이름도 생소한 희귀암, ‘악성 섬유성 조직세포암’ 말기라고 했다.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전이돼 수술조차 불가능했고 의사는 “두 달 남았다”고 시한부 선고를 했다.
몇 번이나 사경을 헤맸던 그를 찾아왔던 사람이 당시 출석하던 서울 신일교회 이광선 목사였다. 이른 새벽 홀로 병실을 찾은 이 목사는 앙상하게 마른 신 목사의 가슴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한 뒤 단호하게 말했다.
“신 집사, 이제 신학 다시 해라.” 죽음을 목전에 둔 그는 비로소 무릎을 꿇었다. 마음의 빚은 이렇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99년 순천향병원에서 신약 임상시험 대상자로 항암 치료를 받아보겠냐는 제안을 했다. 신 목사는 수락했고 모두 6명이 신약으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20개월 동안 독한 임상시험 약물을 투여받았다. 함께 임상시험에 참여했던 환자 중 5명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오직 신 목사만 살아남았다.
“독한 항암제를 맞으며 병원 복도에 누워있을 때 신일교회 찬양 대원 50여명이 병문안을 와 복도에서 찬송가를 불러줬는데 심장이 쿵 하고 울렸습니다. ‘한 달만 더 살았으면’, ‘석 달만 더 살았으면’ 하던 기도가 2000년 겨울 마침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의학적 판정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2001년 그는 청년 시절 아내에게 던졌던 말 그대로 정확히 만 40세에 장로회신학대 3학년에 복학했습니다.”
신 목사는 이렇게 신학의 길로 돌아왔다. 항암 치료 후유증으로 심장과 신장이 망가지고 기립성 빈혈이 찾아왔지만 배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고도 했다.
그는 자신의 찬양이 군부대와 수많은 집회에서 불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시울을 붉힌다고 했다.
“젊은 날 군인들이 그 노래를 부르며 눈물 흘리고 위로받는 모습을 보면서 ‘내 보잘것없는 노래가 저들에게 참 아름답게 쓰이고 있구나’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실로암’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가장 큰 생명의 선물이었습니다. 절망의 수렁에 빠질 때마다 ‘아, 또 어두운 밤이 찾아왔구나.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새벽을 예비해 두셨다’는 믿음으로 버텼으니까요. 제게도 이 찬송은 희망이자 빛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대중문화를 향해서도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기독교 대중문화가 때로는 하나님을 증거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감정을 앞세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거룩함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찬양은 공허할 뿐입니다. 제가 사경을 헤맬 때 나를 살린 것은 화려한 기교의 노래가 아니라 피 묻은 십자가 복음이 담긴 찬송가였습니다.”
인터뷰 말미 신 목사는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신앙인들에겐 본향과도 같은 초대교회,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던 본질의 ‘사도행전적 교회’로 돌아갈 때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이 생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