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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통일부장관 '북한을 조선으로' 제안, 이렇게 풀자
'주적'과 '위협' 사이, 시민에게 물어라 ▲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로 출근하며 발언하고 있다. 2026.8.6 ⓒ 연합뉴스 북한을 '조선'으로 부르고, '주적' 대신 '위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자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제안이 우리 사회의 해묵은 논쟁을 다시 소환했다. 상호 적대적 언어를 자제하고 북한의 공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약칭 '조선'을 사용함으로써 평화공존의 계기를 마련하자는 제안이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남북한 공식 명칭 불러주기'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일이라며, 선의로 시작한 언어의 변화가 정쟁에 휘말려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적 신뢰 구축을 위해 용어를 바꾸자는 통일부 장관과 그 변화가 초래할 국내 정치적 비용을 우려하는 대통령의 신중론이 마주한 셈이다. 이 논쟁은 대외적 신뢰 구축과 대내적 정당성 확보라는 두 국가적 과제가 충돌하는 우리의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호칭 변경, 충분히 검토할 가치 있어 사실, '주적'과 '위협'은 같은 층위의 개념이 아니다. '적'은 특정 행위자나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지만, '위협'은 그 행위자가 보유한 능력과 의도, 행동이 초래하는 위험을 평가한 결과다. 따라서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규정을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표현으로 전환하는 것은 단순한 용어 교체가 아니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적으로 규정하는 안보관에서, 구체적인 능력과 행동을 기준으로 위험을 판단하는 안보관으로 이동하는 일이다. 게다가 국제 정치에서 호칭은 단순한 표현의 선택이 아니다. 상대를 무엇이라 부르는가는 그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알리는 정치적 신호다. 북한을 '조선'으로 부른다고 해서 북한 체제의 모든 가치와 행동을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북한을 적대와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와 협상의 상대로 대하겠다는 최소한의 신호는 될 수 있다. 언어가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적대의 언어만으로 평화를 논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호칭 변경은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 1970년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동방정책(Ostpolitik)이 대표적인 사례다. 브란트 이전의 서독은 자신만이 독일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독점적 대표권을 주장했고, 이를 토대로 동독을 승인한 국가와 외교 관계를 제한하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브란트 정부는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 즉, '다가섬을 통한 변화'를 선택했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통해 서독은 두 국가의 현실을 인정하되, 서로를 외국으로 보지 않는 민족적·헌법적 특수관계를 유지했다. 현상을 인정하는 것이 현상을 영구화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평화적으로 변화시키는 출발점이라는 역설적 선택이다. 동방정책 이후 인적 왕래와 이산가족 접촉, 우편·통신 및 교통 협력이 확대되고, 훗날에는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한 외교적 토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아무리 전략적으로 타당한 정책이라도 국민적 설득과 민주적 승인 없이 추진되면 심각한 국내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야당인 기민·기사연합은 동방정책을 공산주의에 대한 굴복이자 독일 통일을 포기한 매국 행위로 규정했다. 여당 의원 일부까지 이탈하면서 위기에 처한 브란트 정부는 1972년 건설적 불신임 투표에서 불과 두 표 차이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그해 조기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대중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외교적 결단은 지도자가 내릴 수 있지만, 그 결단을 지속 가능한 국가 전략으로 만드는 힘은 결국 국민의 승인에서 나온다는 교훈이다. 찬반 아닌 조건부 합의 지금 우리도 '주적이냐 위협이냐'를 놓고 진영의 싸움을 되살려선 안 된다. 필요한 것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엄중하게 관리하면서도 적대적 언어를 줄이고 외교적 선택지를 넓힐 수 있는 조건을 국민과 함께 찾는 일이다. 통일부가 제안한 외교적 유연성이 소모적인 진영 대립에 빠지는 걸 막고 남남 갈등의 고리를 끊어내려면 서로 다른 안보 인식 사이에서 합의의 조건을 탐색하는 시민 숙의의 장이 필요하다. 이 공론장은 단순한 찬반 투표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북한을 조선으로 부르는 데 찬성하십니까?" 또는 "'주적'이라는 표현을 삭제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순간 대화는 타협하기 어려운 정체성 투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누가 더 평화를 사랑하는지, 누가 더 국가관이 투철한지를 겨루는 이념적 싸움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질문의 틀을 바꿔야 한다. 예컨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북한을 향한 적대적 표현을 완화하거나 호칭 변경을 검토할 경우, 우리 정부가 북한에 요구해야 할 최소한의 상호 조치는 무엇입니까?" 또는 "우리 정부가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되는 안보상의 레드라인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을 때 논쟁의 축은 정체성 대립에서 상호주의에 입각한 다양한 조건의 탐색으로 이동한다. 북한이 군사 핫라인을 복원하고, 접경 지역에서의 도발을 중단하며, 최소한의 신뢰 구축 조치에 응한다면, 등의 조건적 사고를 전개하면 적대적 표현의 완화나 호칭 변경을 유용한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시민들은 추상적인 친북과 반북의 구도를 벗어나 비용과 편익, 위험과 기회를 비교하며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조건부 합의' 방식이다. 모든 시민에게 북한에 관한 하나의 세계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안보관을 유지하면서도 어떤 조건에서 정책 변화에 동의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것이다. 협상론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 사회의 '합의 가능 영역(ZOPA, Zone of Possible Agreement)'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공론화의 목적은 갈등을 없애거나 만장일치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변화의 범위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확인하는 데 있다. ▲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7일 창립 60주년을 맞이한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축하방문하고 연설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8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대한민국이 안전하게 사는 방법은 우리가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라면서 "우리를 때 없이 건드리지 말며 우리를 놓고 힘자랑내기를 하지 않으면 될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은 공식석상에서 과거 남조선이라 부르던 호칭을 '대한민국'으로 부르고 있다. 2024.10.8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공론화의 절차도 엄정해야 한다. 통일부는 공론화를 제안하고 필요한 정책자료를 제출하되, 의제 설계와 참여자 선정, 정보 검증과 토론 운영은 독립적인 공론화위원회에 맡겨야 한다. 이미 정책 방향을 제시한 부처가 전 과정을 주도하면 아무리 공정하게 운영해도 관제 공론화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모든 공론화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참여 시민은 성별·연령·지역 등 인구사회학적 분포뿐 아니라 대북·안보 인식의 분포를 비례적으로 반영해 선발해야 한다. 동시에 소수 견해가 숙의 과정에서 묻히지 않도록 최소한의 대표성도 보장해야 한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인권 문제, 남북관계의 역사, 국제법과 헌법적 쟁점, 호칭 변경의 외교적 효과와 위험을 균형 있게 담은 자료도 제공해야 한다. 국가기후위기대응위원회(민간위원장 이창훈)의 '기후시민회의'가 시도하고 있듯, 정부와 여야, 안보 전문가와 평화 연구자, 탈북민과 접경지역 주민 등 서로 다른 경험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시민들의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공론화 결과를 단순한 찬반 비율로 정리해서도 안 된다. 어떤 조건에서 호칭 변경을 수용할 수 있는지, 국민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상호조치는 무엇인지,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는 안보 원칙은 무엇인지 정밀하게 제시해야 한다. 정부 역시 무엇을 수용하고 무엇을 수용하지 않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공식적으로 답해야 한다. 공론화 결과를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설명하는 '준수 또는 설명(Comply or Explain)' 원칙을 적용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공론화가 여론 수렴을 가장한 정책 홍보가 아니라 다양한 참여자가 국가 전략을 공동으로 형성하는 민주적 절차가 된다. 정부가 독점해 온 북한 의제 시민에게 돌려줄 때 북한은 우리에게 군사적 위협인 동시에 평화를 위해 협상해야 할 상대다. 헌법적으로는 통일의 대상이면서 현실적으로는 독자적인 체제와 군사력을 가진 정치적 실체이기도 하다. 이 복합적인 존재를 '주적'이나 '조선'이라는 하나의 단어로만 규정하려 할 때 논쟁은 진영의 낙인찍기로 흐르기 쉽다. 따라서 정동영 장관의 실용외교와 이재명 대통령의 신중론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외교적 유연성에도 국민적 정당성이 필요하고, 정치적 신중함이 새로운 대북정책의 선택을 봉쇄하는 명분이 되어서도 안 된다. 오랫동안 정부와 정치권이 독점해 온 북한 의제를 시민에게 돌려줄 때, 대북정책은 진영의 낙인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함께 선택하고 책임지는 지속 가능한 국가 전략이 될 수 있다. * 필자 소개: 은재호는 국무총리 소속 한국행정연구원에 재직하며 한국갈등학회장과 다수 정부 부처의 갈등관리심의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민통합위원회 위원과 한국외국어대학교 EU융합전공 겸임교수 및 프랑스 파리 1대학 PRISM-Sorbonne 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일하며 연구 현장과 정책 현장을 이어주는 정책 중개자로 활동하고 있다. '민주주의 디자이너'를 '참칭'하는 그의 저서로는 <사회갈등 해소를 위한 국민통합 전략과 실행방안 연구>(2017), <혁신적 포용국가의 국가론적 지위와 이행전략>(공저, 2019), <공론화의 이론과 실제>(2022), <경세제민의 공공리더십>(공저, 2024), <여론 속의 여론>(공저, 2025) 등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서울 종로구정부서울청사연합뉴스대한민국 -
세계미국서 크게 성공한 한국인 부자가 기꺼이 돈을 보낸 곳 [김종성의 '히, 스토리']
[어떤 어른] 미국 서부를 개척한 재미교포 한시대 앵글로색슨족의 미국 서부 개척은 총소리와 유혈을 수반했지만, 피땀에 기반한 한국인 한시대(韓始大, 1889~1981)의 서부 개척은 아름답고 숭고했다. 재정적 토대 없이 하와이로 이민 간 그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에서 한형제회사와 한가회사 등을 운영하는 중견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하와이대학 한국학센터가 발간한 <1903-1905 호놀룰루 도착 한국인 승객들(Korean Passengers Arriving at Honolulu, 1903-1905)>은 만 14세 된 한시대(Han, Su Tai)가 황해도 해주에서 살다가 홍콩마루호를 타고 1903년 11월 18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고 알려준다. 동승자는 39세 된 아버지 한준상이었다. 어머니와 동생 한영대가 도착한 것은 2년 뒤 5월 8일이다. 이 가족이 한꺼번에 이주하지 못한 것은 경제적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일은 이 가족이 하와이에서 미 본토로 이주할 때도 되풀이됐다. 이때도 아버지가 먼저 건너가 돈을 모은 다음에 가족들을 나중에 불러들였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한인 사회의 지도자 ▲ 독립운동가 한시대 선생 ⓒ 국가보훈부 한시대의 부모들은 교육열이 높았다. 그런데도 한창 공부할 나이인 한시대는 곧바로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한시대가 하와이 한인기숙학교에 입학한 것은 1906년 9월이다. 부인과 작은아들이 정착한 뒤에 큰아들이 정규학교에 들어간 것은 1905년까지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준상이 한국에서 갖고 간 돈을 기반으로 그 아들 한시대가 미국에서 사업을 벌인 게 아님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 부자들을 소개하는 2016년 1월 17일 자 <미주중앙일보> 기사는 한시대의 일생을 요약하는 대목에서 "1903년 부모와 함께 15세에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왔다"라고 한 뒤 "1950년대에 자본금 40만 달러에 달하는 한가기업회사를 설립해서 크게 성공했다"라고 기술한다. '40만 달러'는 한국 정부의 발행물에도 등장한다. 국가보훈부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3권 한시대 편은 "1950년대 중반경 약 40만불에 상당하는 한가기업회사를 설립"했다고 말한다. 40만 달러가 자산인지 납입자본금인지 아니면 각종 재산의 평가액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이 돈은 오늘날로 치면 10배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미국 노동부 노동통계국이 2024년 11월에 발표한 '전체 도시소비자의 장기 소비자물가지수(CPI)'라는 자료에 따르면, 1955년 6월의 CPI는 26.7이었다. 금년 7월 14일 발표된 CPI는 336.07이다. 다른 변수를 배제하고 CPI 변화만 놓고 보면, 1950년대 중반의 40만 달러는 지금의 500만 달러(약 71억 원)에 근접하는 구매력을 갖는다. 1950년대 중반의 40만 달러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미국의 소기업 자산 규모밖에 되지 않지만, 1950년대 중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 국세청이 발간한 <소득세 통계 1955>에 따르면, 대차대조표를 제출한 74만 6962개의 법인 중에서 총자산이 25만 달러 미만인 기업은 77.8%이고, 50만 달러 미만인 기업은 87.3%였다. 이를 감안하면 한가기업회사는 상위 12.7~22.2%에 드는 기업이었다. 한시대의 부모는 자녀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한시대는 당시의 재미교포 자녀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동생 한영대는 LA에서 의사가 됐다. 이런 요인은 한시대가 한국인 사회에서 리더십을 갖는 데 도움이 됐고, 그는 한국인들과 협력해 26세 때 사탕무 등을 재배하는 농장 사업을 시작했다. 1909년에 창립된 대한인국민회를 기리는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홈페이지는 한시대를 소개하는 코너에서 "1915년 캘리포니아주 맨티카지방에서 한인 60여 명과 함께 1300에이커의 농지를 조차했다"라고 알려준다. 현지의 사회적 약자인 한국인들이 노동력과 자금을 모아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는 큰일을 26세의 한국 청년이 주도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사탕무 재배에 주력하던 한시대는 포도농사가 유망해 보이자 주력 업종을 과감하게 바꿨다. 또 농업생산에만 머물지 않고 농업 유통으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항상 대담성을 보였다"고 평한다. 사업을 불려 나간 그는 캘리포니아 중부에서 농업회사인 한형제회사를 운영하고, 남부에서 부동산 임대업체인 한가기업회사를 경영했다. 한가기업회사가 상위 12.7~22.2%에 들었으니, 그는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였다.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그가 사업 성공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서도 14세 때 떠난 고국의 비참한 사정을 잊지 않고 살았다는 점이다. 독립운동 후원에 앞장서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운동까지 ▲ 국가보훈처가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한시대 선생 ⓒ 국가보훈부 한시대가 한국을 떠난 1903년은 일본이 한국 무대의 경쟁자인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마지막 일격을 생각하던 시기였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 승리를 발판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성사시켰다. 그는 이 같은 고국의 처지를 마음에 두고 살았을 뿐 아니라 고국을 돕기 위한 구체적 실천에도 나섰다. 그의 이름이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대규모 농장사업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3·1운동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그는 재미교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사람이 됐다. 위 공훈록은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송금"했다고 말한다. 그는 사업을 할 때처럼 독립운동 후원을 할 때도 과감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사업과 국권회복운동에서도 항상 대담성을 보였다"고 평한다.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중 두 민족의 항일투쟁은 전쟁 단계로 발전했다. 한시대의 기부활동도 이 흐름에 맞춰 전개됐다. 공훈록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을 기회로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주 등지에서 산재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등 6개 단체와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陳線)을 결성하고 진강(鎭江)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활동하면서 8년간 적극적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고 기술한다. 이런 가운데 그는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 해외한족대회 부의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부위원장 등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재미교포 통합과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했다. 그는 돈뿐 아니라 시간도 얼마든지 고국을 위해 쓸 수 있는 사업가였다. 이 점은 고국 여행이 쉬워진 해방 직후에 증명됐다. 이때 그는 해방 이후의 분열상을 극복하고자 직접 고국에 돌아와 호소 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11월 4일, 56세 된 한시대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대표단을 이끌고 고국 땅을 밟았다. 그 뒤 그가 중점적으로 전개한 일은 좌우통합운동이다. 국가보훈부가 그를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할 때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중립적 입장에서 중간세력들과의 통합운동을 전개해 1946년 9월 15일 천도교 청우당에서 8개 정당 및 단체를 통합한 신진당을 결성"했다. 중간세력의 덩치를 키워 좌우합작을 벌이는 작업이 신진당 결성이라는 성과를 냈던 것이다. 그는 좌우합작을 위해 대중적 홍보활동에도 참여했다. 위 자료는 "한시대는 (1946년) 7월 18일 자와 8월 1일 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좌우합작에 의한 단결만이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역설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파당적 논쟁을 버리고 운동의 통합과 정당과 민중 사이의 협동을 재촉하자고 주장하였다"라고 한 뒤 "7월 23일에는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최로 대중 강연회를 개최하였다"라고 기술한다.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은 실상은 항일진보진영에 대한 보수세력의 압박이었다. 전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보수진영 상당수가 친일파 혹은 극우세력이었기 때문에, 항일진보진영은 이들과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미국에서 건너와 민족의 단결을 촉구한 것은 고국에 대한 한시대의 애정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잘나가는 사업가였던 점을 감안하면, 고국의 단결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좌우합작에 실패하고 돌아간 뒤에도 한시대는 흥사단 활동 등을 통해 교포사회 단결과 민족교육 증진에 이바지했다. 14세 때 아버지와 함께 고국을 떠난 그는 고국의 비참한 현실을 잊지 못해 항상 태평양 건너편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았다. 그래서 그가 번 돈들도 그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날아가 고국을 위해 쓰이게 됐다. 그는 고국을 위해 미국 서부에 뛰어든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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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후 2일 신생아 위급"...막막한 순간, 기적처럼 열린 도로[오따뉴]
생후 2일된 신생아가 성숙한 시민의식 덕에 목숨을 구한 일이 알려졌다. /사진=경찰청 유튜브 캡 생후 2일 된 신생아가 경찰과 시민들의 신속한 협조 덕분에 무사히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받은 사연이 알려졌다. 지난 8일 대한민국 경찰청 유튜브에는 '생후 2일 신생아 긴급 에스코트'라는 제목의 영상이 공개됐다. 영상에 따르면 지난 3일 112에 "생후 2일 된 아이가 위급한데 에스코트를 부탁한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신생아가 갑자기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긴급 이송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경찰은 즉시 순찰차를 출동시켜 구급차를 에스코트했다. 병원까지 거리는 약 14㎞로 평소에도 정체가 발생하면 50분가량 걸리는 구간이었다. 특히 금요일 저녁 퇴근 시간과 겹치면서 도로가 극심한 정체를 빚었다. 구급차가 정체 구간에 갇히자 순찰차는 앞서 달리며 "신생아 이송 중입니다. 좌우측으로 피해주세요"라고 안내 방송을 하고 사이렌을 울렸다. 그러자 차들이 양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양보가 이어지면서 구급차는 정체 구간을 빠르게 통과할 수 있었고, 결국 병원까지 18분 만에 도착했다. 구급차 블랙박스에는 운전 대원이 차 안의 아기와 보호자에게 "경찰분들 덕분에 정말 빨리 왔다"고 말하는 모습도 담겼다. 해당 사설 구급차 운전 대원은 경찰청 유튜브 댓글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금요일 저녁 퇴근길이라 정체가 심해 신생아를 어떻게 이송해야 할지 막막했다"며 "아기는 호흡곤란으로 산소마스크를 사용하고 있었고 상태가 좋지 않아 서둘러 이송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생각나는 건 경찰분들뿐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지체 없이 달려와 주셔서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었다"고 경찰에 감사를 전했다. 경찰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이뤄낸 일"이라며 "아픈 아이는 신생아중환자실에서 무사히 치료받았다"고 밝혔다. 영상을 본 누리꾼들은 "많은 천사가 도와주셨으니 축복받고 예쁘게 자라라", "국가권력 사용의 아주 올바른 예", "이런 배려를 받는 존재였다는 걸 기억하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란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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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올공서 장동혁 손 ‘덥석’ 잡던 황교안 “부정선거 함께 막자”…연이틀 손짓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왼쪽)와 황교안 자유와혁신 대표. 황교안티브이(TV) 갈무리 지난 8일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 현장에서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와 잠깐 만났던 황교안 자유와혁신 대표가 장 대표에게 “부정선거 막아내기 함께 하자”는 의사를 전했다. 황 대표는 9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어제 올림픽공원에서 장 대표를 만났다.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투표 수개표’를 외치고 있었다. 내 메시지와 똑같았다”며 “이제 부정선거 막아내기 함께 하자. 함께 자유대한민국 지켜내자”고 밝혔다. 황 대표와 장 대표는 지난 8일 저녁 ‘개표소 봉쇄 시위’가 열리고 있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만났다. 장 대표가 ‘광복절 올공데이 참정권 되찾는 날!’ 등의 손팻말을 들고 시위 참가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가운데, 황 대표가 뒤에서 다가온 것. 장 대표는 웃으며 고개를 숙인 뒤 앉은 상태로 황 대표와 악수했다. 황 대표는 장 대표 왼편에 앉으며 장 대표의 왼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장 대표는 잡은 손을 풀더니 손팻말을 고쳐 들었다. 태극기를 흔드는 장 대표를 본 황 대표는 일어나 왼손을 들고 장 대표에게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장 대표는 웃으면서 목례했고 황 대표는 ‘부정선거’ 구호를 외치면서 자리를 떠났다. 황 대표가 등장해 떠나기까지 시간은 1분을 넘지 않았다. 황 대표는 극우 유튜버 전한길씨 등과 함께 대표적인 부정선거론 ‘스피커’로 꼽힌다. 지난해 11월12일 황 대표가 내란 선동 혐의로 내란특검팀에 체포되자 장 대표는 같은 날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대장동 항소 포기 규탄대회’에서 “무도한 정권이 대장동 항소 포기를 덮기 위해 오늘 황교안 전 총리를 긴급 체포”했다며 “전쟁이다. 우리가 황교안이다. 뭉쳐서 싸우자”고 발언한 바 있다. 1월19일 장 대표가 쌍특검법(통일교·공천헌금 특검법)을 요구하며 국회 로텐더홀에서 단식 투쟁을 할 때는 황 대표가 찾아와 격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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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괴물폭우 직후 극한폭염…한국 '복합재난' 과거 30년보다 3배 증가
그린피스·카이스트 연구팀 '한국 폭염·폭우 복합재난 위험도 변화 연구' 대한민국 폭염 상황은? (서울=연합뉴스) 김성민 기자 =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는 6일 서울 동작구 기상청 모니터에 최고기온 상황이 표시돼 있다. 2026.8.6 ksm7976@yna.co.kr (서울=연합뉴스) 양수연 기자 = 기후 변화로 폭우·폭염 등 극한 기후 현상이 서로 영향을 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복합 재난'이 지난 30년 대비 최근 4년 3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후환경단체 그린피스는 김형준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연구팀에 의뢰한 '한국 폭염·폭우 복합재난 위험도 변화 연구'에서 이 같은 결과를 확인했다고 10일 밝혔다. 연구팀은 한 달(28일) 동안 발생한 강수량 최댓값과 최고 기온을 하나로 합친 지표인 '복합기후극한강도지수'(CI28, Compound Intensity 28)를 개발해 평년(1991∼2020년)과 최근 4년(2021∼2024년)의 여름철(6∼9월) 기록을 비교했다. 그 결과 평년 CI28 중앙값은 0.55인 반면 최근 4년은 1.65를 기록해, 폭우와 폭염의 전반적인 강도가 3배 심화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팀은 "폭우와 폭염 같은 두 가지 현상이 함께 발생하는 빈도가 늘어나면서 복합적으로 위험이 커진 것"이라며 복합재난이 구조적으로 심화하고 있다고 해설했다. 또 복합재난의 발생 일수 역시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평년 대비 CI28가 상위 1% 수준으로 심각했던 날은 평년 1.1일에서 최근 5.2일로 약 4.8배 증가했다. CI28이 상위 5% 이상인 날은 5.5일에서 14.2일로 약 2.6배, 상위 10% 이상인 날은 12.2일에서 25일로 약 두 배 늘었다. 연구팀은 최근 한국·일본과 같은 몬순 기후권에서 여름철 집중호우 직후 폭염이 이어지는 패턴이 반복적으로 관찰되고 있다며 이번 연구 역시 폭우와 폭염이 독립된 두 재해가 아님을 보인다고 짚었다. 온난화가 진행될수록 폭우와 폭염 사이의 급격한 전환이 심화하며 복합재난의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강성원 그린피스 캠페이너는 "폭우나 산불 등 한 가지 재난에만 대응하는 현 체계로는 복합재난에 대비할 수 없다"며 "복합재난의 규모와 빈도를 고려한 사전 대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중호우에 통제된 동부간선도로 (서울=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 집중호우가 내린 18일 서울 동부간선도로 전구간이 전면 통제되고 있다. 2026.7.18 cityboy@yna.co.kr seel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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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젤렌스키 "방공망 지원 위해 한국과 접촉 중…북한군 최대 5만 러시아 배치"
우크라이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방공망 지원을 받기 위해 대한민국 외교당국과 접촉 중이라며, 최대 5만 명의 북한군이 러시아에 배치됐다고 밝혔습니다. 현지시간 9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현지 방송 인터뷰 발언을 SNS에 공유하며 "우리가 부족한 방공 시스템 분야에서 한국의 지원을 받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드론 거래를 비롯한 다른 분야에서도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는 주장과 함께 "한국에 법적 제약이 있지만 우리는 이런 협력을 기대하고 있고 양국의 외교관들이 접촉 중"이라고 덧붙입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 영토에 배치된 것으로 알려진 북한군 규모가 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처음에는 수백 명 규모에서 그다음엔 수천 명, 이제는 3~5만 명의 북한군을 러시아 영토에 배치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북한군이 현대전 경험을 쌓게 될 것이라고 밝히며 러시아로부터 군사적 수단도 넘겨받으리라는 점을 경고했습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방공 시스템우크라이나대한민국젤렌스키 -
세계“한국 가면 월급 5배로 벌 수 있다”…너도나도 짐 싸는 베트남 청년들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베트남 제조업계가 심각한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매년 10만명 넘는 베트남 청년들이 더 높은 임금을 찾아 해외로 떠나면서 해산물·섬유·의류 등 주요 산업 현장에서 인력 부족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9일(현지시간)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베트남 내무부는 매년 13만~15만명의 베트남인이 해외 취업에 나서는 것으로 집계했다. 지난해 말 기준 해외에 체류하는 베트남 노동자는 약 90만명에 달했다. 해외에서 일하는 베트남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보내는 돈도 상당하다. 연간 송금액은 60억~70억달러(한화 약 8조~9조원) 규모로 베트남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해외 취업이 베트남 경제에 외화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국내 산업에는 인력 부족이라는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베트남 해산물수출생산자협회(VASEP)가 재무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메콩 델타와 호치민시 등 주요 생산 거점에서 노동력 부족이 산업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기업들은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임금을 최대 25~30%까지 올렸지만 구인난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다. 베트남 섬유의류협회도 최근 당국과의 회의에서 노동력 확보를 둘러싼 경쟁이 한계에 달했다고 호소했다. “국내 월급 30만원보다 해외”…청년들 떠나는 이유 전문가들은 지역별 소득 격차와 해외와의 임금 차이가 청년들의 해외 취업을 부추기는 주요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특히 빈곤율이 높은 중부 지역 출신 구직자들은 현지에서 월 200~250달러(한화 약 28만~35만원) 수준의 일자리를 구하기보다 일본이나 한국 등 해외에서 더 높은 소득을 올리는 길을 택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국내보다 3~5배에 달하는 소득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해외 취업이 반드시 높은 실질소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 내 베트남인을 지원하는 민간단체 등에 따르면 상당수 노동자는 저축과 가족 부양을 위해 일본 등으로 향하지만, 채용 브로커 비용이나 교육 과정에서 발생한 부채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초기 비용으로 빚을 진 노동자들이 과도한 노동이나 착취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금과 현지 생활비 등을 제외하면 실제 손에 쥐는 돈이 기대보다 적은 경우도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태국인 공장 노동자 월급 402만 원?!” 대한민국 제조업 5년 뒤 벌어질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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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코리아둘레길 4,500km 첫 완주자는 78세 퇴직공무원 [산지컬 100]
코리아둘레길 첫 완주자 이건수씨 극한 산행은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산을 대하는 올곧은 태도와 이념, 탄탄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춰야만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넷플릭스 인기 예능 <피지컬100>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이를 탐구했듯, 월간<山>은 '산지컬'이 뛰어난 이들을 만나본다. _ 편집자 "걸음이 너무 빨라요." 사진기자가 여러번 제동을 걸어야 할 정도로 이씨의 걸음은 빨랐다. 4,500km. 대한민국 둘레를 한 바퀴 도는 코리아둘레길의 총 거리다. 개통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워낙 장거리다 보니 완주한 사람은 올해 3월 기준 이제 200명을 좀 넘는 수준이다. 이들의 명단은 부산 오륙도에 있는 해파랑길관광안내소 명예의 전당에서 확인할 수 있다. 면면을 살펴보면 워낙 완주까지 긴 시간이 필요한 탓에 대부분 은퇴한 시니어 걷기꾼들 이름이 올라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명예의 전당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완주한 이들을 가나다순으로 싣고 있다. 그래서 누가 먼저 완주했는지는 잘 특정되지 않는다. 사실 '먼저 완주'라는 기준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좀 애매하다. 말하자면 선행학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코리아둘레길은 동해안에 2016년 5월 개통된 해파랑길부터 2020년 10월 남파랑, 2022년 6월 서해랑, 2024년 9월 마지막 DMZ 평화의 길까지 총 10년에 걸쳐 순차 개통됐는데 개통 전까지 꽁꽁 감춰뒀다가 개통일에 '출발'하는 식이 아니었다. 구간별로 완공될 때마다 열고, 완주 인증도 할 수 있었던 경우가 많다. 즉 극단적으로는 개통식 당일에 전 코스 완주 인증을 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또 7개 필수 경유지 중 3개만 통과하면 해당 전 구간이 완보 처리되는 걸 이용해 꼼수를 부리는 사람도 적잖다. 그리고 앱에 인증하지 않고 완주한 사람들도 꽤 있다. 아무튼 코리아둘레길 인증 앱인 '두루누비'에 기록된 값을 기준으로 잡으면, 2024년 10월 5일 오후 4시 23분에 강화평화통일전망대에 도착하면서 코리아둘레길 전 코스를 완주한 사람이 처음이라고 한다. 당시 나이 76세, 올해 78세인 이건수씨다. "걸음이 너무 빨라요." 사진기자가 여러번 제동을 걸어야 할 정도로 이씨의 걸음은 빨랐다. 체신부서 45년 근무…정부 부처 테니스 대회 우승도 이건수씨는 호적상 1948년생, 실제로는 1946년생이다. 경기도 안성 석남사 아래 산자락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피란을 갔다가 휴전 후 다시 본가로 돌아왔다. 전쟁의 기억은 어릴 때라 그저 업혀 다니고 끌려 다닌 것이 전부였다. 당시 마을의 발전도는 한마디로 정리됐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전기가 안 들어왔었어요." 그런 곳이라 학교도 한참 걸어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는 그나마 가까웠다. 편도 5km 정도 됐다. 중고등학교는 두 배로 10km를 걸어야 했다. 등하교를 통해서 체력이 축적된 탓인지 학창시절엔 나름 키도 크고 건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사관학교를 가는 게 꿈이었어요. 하지만 입시에서 실패했죠. 대학갈 형편도 아니라 일찌감치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인 18세에 공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잘 선택한 것 같아요." 그렇게 1960년대 체신부(정보통신부)에서 행정업무를 45년 동안 맡았다. 일이 있으면 청와대에 차출되기도 했고, 한국통신(현 KT)의 창설멤버였기도 했단다. 그리고 2006년 퇴직했다. "젊을 땐 테니스를 좀 쳤어요. 정부 부처별 대회에서 우승도 한 적이 있죠. 좀 더 나이를 먹곤 상사 영향으로 골프를 쳤죠. 프로 자격증도 땄습니다. 확실히 운동에 소질이 좀 있었죠." 그런데 골프는 계속 시간과 돈을 쏟아 부어야만 실력이 유지된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 연습을 하자니 즐거움보다 스트레스가 커졌다. 그렇게 골프를 접고 시작한 것이 달리기. 이때가 퇴직을 앞둔 50대 후반이었다. 코리아둘레길과 임자체, 경기·서울·인천둘레길 각각의 완주 인증서들. 코리아둘레길과 임자체, 경기·서울·인천둘레길 각각의 완주 인증서들. 달리기하다 등산에 입문…백두대간 종주부터 시작 달리기도 5년 정도 열심히 했다. 마라톤 풀코스는 15회 완주, 하프는 셀 수 없다. 기록은 풀코스 4시간~4시간 20분, 하프는 1시간 45분~2시간 정도였다. 춘천마라톤 하프대회에선 연령대 3위를 해본 적도 있다. 처음엔 몰랐는데 주최 측에서 집으로 3등 축하 선물을 보내 줘서 뒤늦게 알았다. "산도 달리기 때문에 접했어요. 백담사에서 공룡능선을 타는 설악산 42km 종주를 달리기 훈련 삼아서 동호인들과 함께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서브쓰리하는 젊은 친구들보다도 제가 먼저 도착하는 걸 보고 '아. 내가 등산이랑 궁합이 맞나보다'란 생각을 하게 됐죠." 게다가 국내에서도 아름답기로 손에 꼽는 설악산 공룡능선이다. 도취될 수밖에 없는 절경이다. 그래서 자연히 산에 빠지게 됐다. 2011년쯤의 일이다. "등산을 시작하려니 어디부터 손을 대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쭉 보는데 백두대간 종주가 엄청 유행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유행인 것만 알고, 힘든 건 또 몰랐어요. 그래서 무턱대고 동네에 있는 해밀산악회 대간 종주대 가입 신청을 넣었죠. 나이를 보더니 바로 'No' 하더라고요." 산행 경험이 전무 하다시피 한 60대 중반이 백두대간을 탄다니 대장 입장에선 탐탁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간청을 해서 합류하게 됐다. 걱정 반 의심 반의 종주가 시작됐는데 성큼성큼 잘 걷는 그를 보고 모두가 걱정을 거뒀다. 그리고 오히려 더 빨라지는 그를 보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대장이 송병연씨라고 체육교사 출신인 산악인이셨어요. 이분이랑 같이 전국을 누볐습니다. 백두대간은 물론 9정맥도 완주했고, 산림청 100명산과 5대 태극종주(설악, 지리, 호남, 충북, 영남알프스)까지 섭렵했죠." 이씨는 "무엇보다 약속과 원칙을 한번 정해 놓으면 철저하게 지켜가면서 걷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코스를 단단하게 숙지할 정도로 산행 정보를 공부해 두는 건 물론 길에 얽힌 역사나 문화 유래, 소요시간까지 다 머릿속에 두고 걷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또 그런 그를 보면서 같은 자세로 산을 올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024년 9월 23일 DMZ 평화의 길 개통식에 참가한 이건수씨(오른쪽) 2025년 상반기 걷기여행주간 선포식에 코리아둘레길 완주자로서 기념패를 받았다.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을 때 한국의길과문화에서 해파랑, 서해랑, 남파랑길 완주자들을 모아 마지막 개통구간 DMZ 평화의 길을 함께 걸었다. 이씨는 이들과 동행하다가 본인과 마찬가지로 속도가 빨랐던 김형갑씨와 단 둘이 질러 나가 먼저 완주했다고 전했다. 임자체로 수직의 세계, 코리아둘레길로 수평의 세계 그렇게 대간과 정맥, 100명산을 끝내자 높은 산에 대한 갈증과 꿈이 생겼다. 모락모락 피어난 염원은 저 멀리 히말라야의 흰 산으로 향했다. 임자체다. 고소를 경험한다고 3년간 중국 태산, 일본 후지산,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를 연습산행으로 각각 두 번 이상 갈 정도로 치열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2018년, 해밀산악회와 함께 임자체 정상에 올랐다. "정말 어려울 거라 예상하고 있었어요. 사고도 많이 난다고 들었고요. 그래서 정말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부모님 산소에 가서 절을 하고,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찍었던 사진도 가족 몰래 혼자 가슴에 품고 갔었습니다." 비장하게 도전했는데, 결과는 좀 허무했다. 정상까지 큰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고소증세도 잘 안 나타났다. 그래서 정상까지 갈 거라 예상하지 않았던 인원까지 정상에 올랐다. 날씨가 그만큼 좋았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고, 정상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고산의 꿈을 이루고 난 뒤에 또 다른 꿈을 꾸었다. 이번엔 수평의 세계였다. 미국 PCT 4,300km다. 하지만 자료를 검토하면 할수록 부담스러웠다. 첫 번째는 언어의 장벽, 두 번째는 비용이었다. 그때 '코리아둘레길'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거다 싶었다. "완공을 기다리면서 다른 둘레길들을 쓸어 담듯 걸었어요. 한 번에 30~35km 정도 잡았죠. 지리산, 치악산, 북한산, 서울둘레길 등 이름 좀 있는 길들은 다 완주했습니다. 그중 으뜸을 꼽자면 제주 올레죠. 걸으면서 주민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았는데, 길에 어린 애환이나 역사가 무척 인상 깊더라고요." 서울둘레길은 58번이나 완주했다. 다른 둘레길을 가기 위한 훈련 차 걷다 보니 완주 기록이 엄청 쌓였다. 등산 앱 트랭글을 통해 확인해 보니 1년에 4,500~5,600km 정도 걸은 기록이 남아 있었다. "경기둘레길을 걷는 도중 안성구간을 지날 때였죠. 머리를 비운 채 이정표를 따라 하염없이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아버지 산소가 툭 나왔어요. 하도 걸어 다니다 보니까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죠. 워낙 어릴 때 돌아가셔서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렇게 건강하고 씩씩하게 낳아 주신 탓에 걷고 걸어 아버지 앞으로까지 이어지는 길에 설 수 있었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사하다고 절을 올리고 또 걸어 나갔었습니다." 임자체 정상에 오른 해밀산악회 회원들과 이건수씨. 임자체 원정은 KBS '영상앨범 산' 팀이 동행 촬영했었다. 한 번에 2주, 400km 이상 걸어 2020년 12월 9일, 코리아둘레길을 시작했다. 두루누비 앱을 통한 인증이 그때부터 가능했다. 시작은 남파랑이었다. 12월이라 남쪽 지방이 좀 따뜻할 것 같았다. PCT에 버금가는 좋은 길을 걷는다는 열정에 도취돼 2주 쉬고 2주 걷는 패턴을 강행했다. 한 번 나가면 400km 이상 걷고 들어오는 식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2주 동안 걸을 계획을 짠다. 하루에 어느 정도 운행할지 결정하고, 그 운행거리 속에서 이용 가능한 숙소와 식당 위치를 전부 체크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다니기 때문에 교통편도 알아둬야 했다. 이게 걷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2020년이기 때문이다. 즉, 코로나가 문제였다. "코로나 방역수칙을 스스로 엄수하는 것도 까다로웠지만 다중이용시설이라고 전부 틀어막았던 것 기억나시죠? 그래서 인터넷에는 쉼터가 있다고 해서 갔는데 문을 닫은 곳이 부지기수였어요. 식당도 인터넷엔 운영 중이라 나와 있지만 찾아가면 휴폐업이곤 했죠. 숙소도 마찬가지지요. 그런 순간들이 코리아둘레길을 걸으면서 가장 힘들었네요." 우여곡절도 많았다. 2022년 4월 서해랑길 부안 구간에선 체력이 급격히 소진돼 한 발짝도 더 걷지 못하고 주저앉아 쓰러진 적이 있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젊은이가 도움을 줬다. 한의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 약 3시간 후 퇴원해 다시 걸어 나갈 수 있었다. 또 같은 해 5월에는 양말에 구멍이 뚫려 읍내에 사러 나갔지만 문을 연 가게가 없었다. 일단 택시를 타고 숙소로 들어가는데 사연을 들은 기사가 보관하고 있던 양말 3켤레를 선물로 줘서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다. 걸으면서 점점 욕심이 생겼다. 특히 가장 먼저 코리아둘레길을 완주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서해랑길 같은 경우 정식 개통 이전까지 최대한 완주를 끝내 놓고, 개통되는 날에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코스를 재빠르게 완주했다. 또 마지막으로 DMZ 평화의 길이 개통됐을 때는 같이 출발한 일행들의 걷는 속도가 하루 10~15km로 너무 느려 먼저 앞서 나왔다. 그렇게 출발한 지 12일 만인 10월 5일, 두루누비앱 인증 기준 코리아둘레길 첫 완주자가 됐다. "우리나라 동서남북을 다 돌아보니 무엇보다 분명하게 다른 정서의 차이가 흥미로웠습니다. 대표적으로 호남지역은 정감이 있고, 경상지역은 속이 넓었어요." 서울둘레길 지도 앞에 선 이건수씨. 그는 서울둘레길만 58회 완주했다. "수목원정원 스탬프투어는 과소평가 받고 있다" 4년 동안 코리아둘레길을 걸은 날은 113일, 1,100만 원 정도 썼다. 참고로 PCT는 예산이 5,000~7,000만 원 정도 드는 걸로 나왔었다고 한다. 코리아둘레길 완주 이후로는 그만큼 치열한 프로젝트는 진행하지 않고 그간 헌신해 준 가족들에게 감사를 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도전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스탬프투어가 아주 재밌더라고요. 동기부여도 되고, 성취감도 있고, 특히 이 투어를 계기로 평소라면 갈 생각을 전혀 못 했을 곳들과 연결돼 기분이 좋았어요." 2023년 11월 시작한 전국 수목원정원 스탬프투어는 2026년 6월 4일 완주했다. 그는 "대부분 기대 이상으로 아름답고, 걷기 좋은 곳들이었다"며 "세계적인 수준의 장소들이 많은데 사람들로부터 좀 과소평가 받는 것 같아 아쉽다"고 전했다. 또 다른 건으로는 국가유산청에서 선정한 국가유산 76개소 스탬프투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30개소 스탬프투어가 있는데 이 또한 모두 완주했다. 유익하고 도움이 참 많이 됐다고 한다. 특히 유네스코 투어는 7월 부산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를 기념해 올해 한시적으로 11월까지 운영되는 거라 더 특별했다. 이씨는 "잘 알려지지 않은 스탬프투어들이 매우 많다"며 "성취감도 생기고 유익하고 재밌다"고 말한다. 2018년 임자체 원정 당시 맞춘 단체티. "저에게 걷기 외에 다른 취미가 있냐고 물으면 독서라 답합니다. 걷기, 달리기, 등산 모두 먼저 책부터 봤어요. 책에서 알고자 하는 걸 얻고, 그대로 실습해 보죠. 뭘 하더라도 제대로 기초를 알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등산도 국립공원등산학교를 수료하고 나서 제대로 입문했어요." 그는 "솔직히 말하면, 등산보다 독서를 더 중시한다"고 고백했다. 책에서 스스로를 정리 정돈할 수 있는 지혜를 많이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에 책이 2,000여 권 정도 있으며 매일매일 책상에 책을 올려두고 하루에 최소 몇 페이지라도 읽으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이다. "독서와 등산이 거울 같다는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산은 마음과 같아서 찝찝하게 가면 산도 찝찝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가면 산도 행복한 것 같죠. 또 새로운 의욕과 다짐들도 얻을 수 있고, 저를 점점 발전시켜줄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열려 있고요." 그는 수많은 인증서들을 보여 줬다. 임자체나 후지산 같은 산은 물론 여러 지자체들의 둘레길 완주 인증서다. 서류철 가득한 인증서를 보니 혀가 절로 내둘러졌다. 그리고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했냐?"고 우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그렇게 물으면 저는 '도전과 모험이 없는 인생은 편할지는 모르지만, 성장과 발전은 없다'고 답합니다. 저는 작든 크든, 사소하든 중요하든 상관없이 스스로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가면 젊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열정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런 걸음들을 쌓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인증서들은 그 발자국일 뿐이고요." 서울 양재 매헌시민의숲에서 노송을 올려다보는 이씨. 그는 "이젠 그간 헌신해 준 가족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할 시간"이라고 했다.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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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추미애 "반도체 기업 성장해도 경기도에는 세입 없다…빈껍데기 부자"
경기도 재정이 비상 상황이라고 밝힌 추미애 경기지사가 "반도체 기업이 성장해도 경기도에는 세입이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추 지사는 9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경기도에는 대한민국의 핵심 산업이 몰려 있다. 반도체 기업이 성장하면 법인세를 비롯한 국가 세수는 늘어난다"면서도 "그에 따라 중앙이 지방에 내려보내는 보통교부세 재원도 커지지만 경기도에는 전혀 지급되지 않는다"고 이같이 밝혔다. 추 지사는 또 "산업에 필수인 도로와 철도, 용수와 전력, 주거와 소방·안전 인프라를 책임지는 경기도가 그 성장으로 발생하는 세수를 광역세원으로 가져올 수 없는 구조라는데 문제가 있다"며 "책임은 경기도에 있는데, 책임을 감당할 재원은 경기도에 없다"고 강조했다. 추 지사는 국가직 소방공무원 인건비 부담을 거론하면서 이같은 점을 짚었다. 추 지사는 "소방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전환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대형 산불과 재난은 이제 한 지역의 힘만으로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신분과 지휘체계는 바꿨는데, 그에 맞는 재원체계는 충분히 따라오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추 지사는 "지방이 책임져야 한다면, 책임질 수 있는 재원도 있어야 한다. 지방정부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세입구조 역시 함께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 지사는 해법으로 "소방공무원 인건비를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특별회계를 마련하고, 지속 가능한 재원을 붙이도록 재정설계를 마련해야 한다"며 "국가직 전환으로 국가적 재난대응체계를 강화했다면, 그에 걸맞게 중앙정부도 재정적 책임을 함께 나눠야 한다"고 했다. 추 지사는 또 "지방노동감독관을 시행하기에 앞서 재정대책을 세워야 한다"면서 "앞으로 지방정부가 산업현장에서 노동감독관과 특별사법경찰을 운영하고 법 위반을 적발하게 된다면, 그에 필요한 인건비와 운영비를 지방정부에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추 지사는 "권한과 책임에는 반드시 재원이 따르도록 하는 간단한 원칙을 세우는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며 "권한을 지방에 주려면 재원도 함께 줘야 한다. 책임을 맡기려면 책임을 감당할 수단도 함께 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추 지사는 아울러 올린 다른 페이스북 글에서도 경기도 재정의 어려움을 강조했다. 추 지사는 "내국세의 19.24%는 지방교부세의 재원으로 지방에 준다. 내국세가 10조원 더 걷히면 약 1조9천억원, 20조원이 더 걷히면 약 3조8천억원의 지방교부세 재원이 추가로 생긴다"면서 "전체 보통교부세 규모만 한해 약 66조원 규모"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추 지사는 "경기도는 이 보통교부세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추 지사는 "다른 지방정부는 교부세로 부족한 재정을 메울 수가 있으나 경기도는 제외되어 왔다. 오히려 경기도는 약 4천억 원의 지역상생발전기금을 타시도에 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 지사는 아울러 "경기도 반도체 기업이 벌어들이는 소득으로 경기도 GRDP가 아무리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도 경기도는 세입 한 푼 늘지 않는다"며 "반도체 특수로 경기도가 부자라는 착시현상이 생기는 이유다. 진짜 빈껍데기 부자요, 외화내빈"이라고 했다. 추 지사는 "기업이 성장해 늘어난 세수는 경기도에 돌아오지 않고, 그 세수로 늘어난 보통교부세도 경기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아무리 산업 기반을 닦고 일자리를 만드는 노력을 할수록 더 부담이 늘고 빚이 느는 이중 모순에 허우적 거리는 경기도"라고 강조했다. 추 지사는 "기업을 유치하고 일자리를 늘리고 산업기반을 닦았어도 경기도 주요 세원은 여전히 부동산 거래에 좌우되는 취득세"라며 "기업과 산업은 외면하고 취득세, 담배세 받기위해 계속 그린벨트 허물고 땅 팔고 담배소비 많이 하라고 빌어야 하느냐"고 지적했다. ▲추미애 경기도지사가 5일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에서 '경기도 재정 비상 상황' 선언 기자회견을 마친 후 단상에서 내려오고 있다. ⓒ연합뉴스
부동산 거래대형 산불연합뉴스대한민국페이스북 -
사회제돌이에서 비봉이까지…세월이 흐르며 바뀐 질문 [주말엔]
야생이라면 40년을 사는 동물이, 제주 서귀포의 한 돌고래 쇼장에서는 반입 후 평균 5년 3개월을 살고 죽었습니다. 개장 12년간 폐사한 돌고래는 8마리. 그 시간 동안 제주 바다에서는 등지느러미에 '1번'을 새긴 제돌이가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같은 바다를 두고 두 개의 이야기가 나란히 흘러갔습니다. 제주 바다로 돌아간 제돌이(1번) ⓒKBS 제주 바다로 돌아간 춘삼이(2번) ⓒKBS ■ 등지느러미에 새긴 숫자, '1번’ 2013년 7월 18일, 제주 성산항 거두리에서 적응 훈련을 마친 수애기돌고래(남방큰돌고래, Indo-Pacific bottlenose dolphin) 제돌이와 춘삼이가 방사됩니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수족관 돌고래의 야생 방사였습니다. 함께 훈련받던 삼팔이는 이미 20여 일 전에 가두리에서 스스로 탈출해 고향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방사를 코앞에 두고 뜻밖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등지느러미에 일련번호를 새기는 문제였습니다. 한쪽에서는 "번호가 선명하면 바다에서 이들을 본 사람들이 '돌고래 보호'의 메시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라며 '동결 표지'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등지느러미 모양만으로도 개체 식별이 가능한 자연적인 방법이 있는데, 굳이 낙인을 찍는 건 인간의 흔적을 영원히 남겨 공연 돌고래를 자연 속에서도 관람하겠다는 의도 아니냐"라며 '동결 낙인'이라 맞섰습니다. 늘 합의로 안건을 처리해 오던 '제돌이 성공적 야생 방류를 위한 시민위원회'(약칭'제돌이 시민위')가 이 문제만큼은 다수결로 결정했습니다. 16명 위원 중 3명은 끝까지 반대했고, 그중 한 명은 방사를 일주일 앞두고 위원직을 사퇴했습니다. 결국 제돌이 지느러미엔 '1번'이, 춘삼이에겐 '2번'이 새겨졌습니다. 용어 하나를 두고도 이렇게 팽팽했던 긴장감. 그만큼 이 방사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 삼팔이는 새끼를 낳았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암컷 삼팔이·춘삼이·복순이는 야생에서 출산까지 하며 완전히 적응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13년 1차 방사(삼팔·제돌·춘삼)에 이어, 2015년 2차(태산·복순), 2017년 3차(금등·대포), 그리고 2022년 마지막 남은 '비봉'이까지. 수애기돌고래 8마리가 4차례에 걸쳐 고향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수애기돌고래 8마리가 고향 바다로 돌아갔다. ⓒKBS 다만 모두가 순탄했던 건 아닙니다. 금등이와 대포, 비봉이는 여전히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상 야생 적응 과정에 실패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2015년 방류된 태산이는 7년여 동안 단짝 복순이와 친구들과 함께 고향 바다를 마음껏 누비다가, 2022년 6월 27세 추정의 나이로 성산읍 앞바다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됐습니다. 흥미롭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방사의 '주인공'이 바뀌었습니다. 1차 방사 때는 주무 부처인 해양수산부가 한 발 물러서 있었고, 비용 조달까지 시민단체가 부담했습니다. 하지만 2차 방사부터는 정부가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습니다. 시민운동에서 시작된 일이, 어느새 국가사업으로 자리를 옮긴 셈입니다. 시민 주도의 돌고래 방사 사업은 시간이 흐르며 국가 주도의 사업으로 변경된다. ⓒKBS ■ 바다로 못 간 돌고래들…마린파크의 비극 그러나 모든 수족관 돌고래가 제돌이처럼 바다로 돌아간 건 아닙니다. 퍼시픽랜드 전직 조련사가 2010년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에 독립해 문을 연 또다른 돌고래 쇼장 '마린파크'는, 오히려 그 반대편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곳은 일본에서 수입한 '큰돌고래'(Common bottlenose dolphin)로, 관람객이 직접 만지고 함께 수영하고 먹이를 주는 '체험형' 쇼를 표방했습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개장 이후 12년간 8마리의 돌고래가 폐사했습니다. 반입일로부터 평균 5년 3개월. 야생에서라면 40년 넘게 살 수 있는 돌고래들이었습니다. 2009년 일본에서 포획돼 12년간 이용되던 '화순'이마저 2021년 숨을 거두면서, 결국 영업이 중단됐습니다. 마린파크의 마지막 생존 돌고래 ‘화순’. 2009년 일본에서 포획된 큰돌고래종으로 12년간 수족관에서 이용되다 2021년 8월 숨을 거뒀다. 사진제공: 핫핑크돌핀스 2019년, 이 수족관을 점검한 해양환경단체 '핫핑크돌핀스'는 심각한 '정형행동'을 목격했다고 기록합니다. 특히 '낙원'이라는 돌고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구석에 들어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수면 위에 가만히 떠 있었습니다. 정형행동이란 야생동물이 좁은 공간에 갇혀 있을 때 나타나는 목적 없는 반복 행동입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타나는 신호입니다. 2009년부터 2021년까지 전국 수족관에서 폐사한 고래류는 모두 46마리로, 이 가운데 제주 지역의 폐사 고래류는 22마리에 달합니다. 전국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한 수족관 사업자는 이렇게 항변합니다. "얘네들이 아무래도 자연적인 환경에서 사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도 폐사되지 않도록 굉장히 노력은 해요. 돌고래가 자산인데, 그게 없으면 못 하는 거니까." 그러나 통계는 그 '노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 그럼에도, 수족관은 늘어난다 역설적인 건, 제돌이가 바다로 돌아간 이후에도 국내 수족관 산업은 오히려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2012년 한화 아쿠아플라넷(여수·제주), 2014년 롯데월드 아쿠아리움과 거제씨월드가 잇따라 문을 열었습니다. 숫자가 그 역설을 보여줍니다. 돌고래 해방 운동이 처음 시작된 2011년, 국내 수족관은 4곳, 고래류는 27마리였습니다. 그런데 한때 이 숫자는 8곳 40마리까지 불어났습니다. 돌고래 방류가 뉴스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동안, 다른 페이지에서 돌고래 수입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던 셈입니다. 핫핑크돌핀스 조사에 따르면 2026년 3월 기준으로는 5곳 19마리까지 줄었습니다. 절반 가까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법과 제도는 이 흐름을 뒤늦게 뒤쫓아갔습니다. 제돌이 등이 바다로 돌아갔지만, 국내 수족관 사업은 오히려 성장했다. 시민단체는 공연을 위한 돌고래 의 수입 중단을 요구했다. ⓒKBS ■ 뒤늦게 정비한 법과 제도 2012년, 수애기돌고래가 '보호대상해양생물'로 지정됐습니다. 2016년엔 국내 최초로 동물원과 수족관을 통합 관리하는 '동물원수족관법'이 제정됐습니다. 1909년 창경원이 문을 연 지 100년도 더 지나서였습니다. 같은 해 '해양생태계법'이 개정돼 관람용 목적의 고래 포획이 사실상 금지됐고, 2018년엔 잔인하게 포획된 국제적 멸종 위기종 수입을 금지하는 '야생생물법 시행령' 개정이 이뤄졌습니다. 국내 돌고래 수입 대부분이 잔인한 포획 방식으로 알려진 일본 다이지에서 왔다는 점을 참작하면, 이는 사실상의 수입 금지 선언이었습니다. 2021년 해양수산부는 '제1차 수족관 관리 종합계획'을 내놓았습니다. 수족관 등록제를 허가제로 전환하고, 먹이 주기·만지기·올라타기 같은 체험 행위를 금지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신규 수족관에서는 고래류 전시 자체를 아예 금지하겠다는 내용도 담겼습니다. 이 내용은 '동물원수족관법' 개정안에 반영돼 2022년 1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2023년 12월 14일, 법이 실제로 이빨을 갖추는 날이 왔습니다. '동물원수족관법' 하위 법령이 시행되면서, 수족관 등록제는 한층 까다로운 '허가제'로 전환됐습니다. 이날 이후로는, 어떤 수족관도 관람 목적으로 고래류를 새로 들여올 수 없게 됐습니다. 신규 시설뿐 아니라 이미 영업 중이던 기존 시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손님이 돌고래 등에 올라타거나 몸을 만지는 체험 프로그램도, 이날부터는 처벌 대상이 됐습니다. 같은 날 '야생생물법' 개정안도 함께 시행됐습니다. 허가받지 않은 야생동물 카페 같은 시설에서 살아있는 야생동물을 전시하는 행위 역시 전면 금지됐습니다. 1986년 제주에서 처음 문을 연 돌고래 쇼장 '로얄마린파크'가 문을 연 지 37년, 2011년 야생 돌고래의 포획과 거래를 적발한 해경 수사가 있은 지 12년 만입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전시 동물 보호를 위한 법적 안전망이 한층 촘촘해졌습니다. 물론, 법이 촘촘해졌다고 해서 이미 수조 안에 있는 돌고래들이 저절로 바다로 돌아가는 건 아닙니다. 법은 '내일'을 막을 뿐, '어제'를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뒤늦게 관련 제도와 법령이 정비에 들어갔다. 법은 촘촘해졌지만, 돌고래가 완전히 자유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다. ⓒKBS ■ 세월이 흐르며 바뀐 질문 돌이켜보면, 1984년 서울, 1986년 제주에 돌고래쇼장이 들어선 이후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동물은 지금 행복한가.' 관람객도, 업체도, 심지어 정부도 그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돌고래는 그저 사고파는 자산이었고, 재롱을 부리는 구경거리였습니다. 그 질문이 처음으로 한국 사회에 던져진 건 2011년 여름이었습니다. 그 이후 10여 년 만에 최소한 제도적으로는 답을 마련했습니다. 수애기돌고래는 더 이상 사유재산이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해양생물이 됐고, 수족관은 더 이상 아무런 감시 없이 운영될 수 있는 사업이 아니게 됐습니다. 하지만 제도 변화로 모든 돌고래가 고향 바다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아닙니다. 여전히 전국 곳곳의 수조 안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돌고래들이 헤엄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에서는, 또 다른 '자연 수족관'이 생겨났습니다. 수족관 밖으로 나온 돌고래를, 이번엔 배를 타고 '관찰'하겠다는 새로운 관광산업이 등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돌고래를 가두지 않습니다. 대신, 바다까지 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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