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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배우 하영 증조부 안상호는 왜 친일인명사전 누락 됐을까
민족문제연구소 측 "발간 당시 선정기준 미달"... 연구소, 친일인명사전 개정판 준비중 ▲ '이런 엿같은 사랑' 제작발표회 배우 하영이 5일 서울 마포구 호텔 나루 서울 엠갤러리에서 열린 넷플릭스 새 시리즈 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6.8.5 ⓒ 연합뉴스 제81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친일 행적 논란이 불거진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씨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 선정 기준 등에 미달했기 때문으로 확인됐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안상호가 친일 행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추가 행적이 드러날 경우 수록 여부를 다시 심의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안상호, 친일 행적 있는 건 사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는 11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 여부는 선정 기준과 행위의 적극성, 반복성, 지속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뒤 결정했다"라며 "(2009년) 발간 당시 안상호는 선정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에 보류됐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연구소는 발간 이후에도 꾸준히 자료조사와 연구를 진행하며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다"라며 "따라서 추가 행적이 드러날 경우 수록 여부를 다시 심의하게 된다"라고 밝혔다. 특히 "친일파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은 조사 기구나 연구자 간 차이가 있을 수 있다"라면서도 "안상호가 친일 행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부연했다. 배우 하영씨는 지난 7일 KBS 2TV 예능 프로그램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증조할아버지는 양의학을 일본에서 배워오시고 한국에서 개원하신 첫 의사셨다고 들었다" "할아버지, 아빠, 언니도 의사"라며 4대째 의료인 집안이라는 가족 이력을 소개했다. 이후 그의 증조부가 일제강점기에 의사로 활동한 안상호씨(1872~1927)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친일 논란이 일었다. 배우 소속사 "한 인물의 이력 전하는 데 신중한 검증 필요함을 깨달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안상호는 1902년 6월 일본 동경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해 한국인으로는 처음 일본 의사자격증을 취득했다. 한국의사학회지 제24권 2호에는 안상호가 전의 촉탁(외부 주치의)으로 고종의 건강을, 조선왕조실록에는 촉탁의(외부 의료진)로 순종의 건강을 돌봤다는 기록이 있다. 안상호는 대정친목회(대정실업친목회)에서도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 단체는 조선인 상류층으로 구성된 친일 단체인데, 이완용이 고문을 맡았다. 장신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지난 2007년 논문 '대정친목회와 내선융화운동'에 따르면 안상호는 1916년 11월 선출된 간부진에서 21명의 평의원 중 1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영의 소속사 비스터스엔터테인먼트는 '사실무근'이라던 기존 발표를 하루 만에 뒤집고 사과했다. 소속사는 지난 11일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 선생이 1916년 대정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기록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인했다"라며 "충분한 검증 없이 '사실무근'이라 성급히 답변하여 혼란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라고 했다. 이어 "의도치 않게 논란이 빚어진 데 대해 배우 본인은 마음이 매우 무거운 상황"이며 "당사는 역사적 사실과 한 인물의 이력을 대중에 전하는 일에 얼마나 신중한 검증이 필요한지 이번 일을 통해 깊이 깨달았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하영 역시 이번 일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을 깊이 새기고, 앞으로 더욱 신중하고 겸허한 자세로 임하겠다"라고 전했다. 다만 대한민국 헌법이 연좌제를 금하기 때문에 배우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헌법은 13조 3항에서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한다. 배우 하영씨는 지난 2019년 KBS 2TV 드라마 '닥터 프리즈너'로 데뷔했다. 이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중증외상센터' '월간남친' '참교육' 등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지난 7일엔 배우 정해인과 호흡을 맞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이런 엿같은 사랑' 주연을 맡았고, 내년 차기작으로 SBS 드라마 '승산 있습니다' 공개를 앞뒀다. [관련 기사] "일본 사람과 똑같지요"... 하영 증조부 안상호 발언 살펴보니 https://omn.kr/2jdf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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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하영 비난은 친일 강박증"…'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소신 밝혔다
박유하 "안상호 단순 친일로 몰 수 없어" "일제강점기 인사 모두 부정할 건가" 친일 낙인 비판 일본군 위안부를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 등으로 묘사해 논란을 빚은 책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 박유하 세종대학교 명예교수가 배우 하영을 둘러싼 친일 논란을 "친일 강박증"이라고 주장했다. 하영의 증조부인 의사 안상호의 이력을 두고 친일 행적을 단정하기보다 당시 시대적 배경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취지다. 박 교수는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친일 강박증'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하영의 증조부와 조부의 이력을 거론했다. 박 교수는 안상호 씨에 대해 "나무위키 설명만 봐도 문제의 안상호는 단순히 친일로 몰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게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의 첫 번째 양의'라는 타이틀은 그가 조선의 문명화·근대화를 상징하는 인물임을 말한다"며 "대한제국 1호 국비유학생이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그런 그가 귀국 후 순종의 주치의가 되었다는 건 당연한 수순이고 그 명예에는 당연히 부도 따라왔을 것"이라며 "친일로 쌓은 명예라기보다 스스로의 실력과 국가의 지원으로 의료계 개척자가 되었던 이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안상호 씨가 이완용을 치료했다는 점을 두고 제기된 비판에 대해서는 "이완용을 치료했다며 비난하는 이도 있던데 이완용 아니라 서민이라도, 가능하다면 그에게 치료받고 싶었을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인사들의 행적을 일률적으로 친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정치·경제·문화·교육 모든 분야에서 리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구조적으로 친일파일 수밖에 없다"며 "그들의 존재를 모두 부정한다면 일제시대 내내 인재를 키우지 말아야 했다는 얘기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 시대 내내 조선인 정치가도 조선인 사장도 조선인 학교장도 존재하면 안 되었다는 얘기가 되고, 그들의 존재를 전부정하는 이들은 일본인의 지배를 직접 받고 싶었다는 얘긴가"라고 반문했다. 하영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조상들의 행적을 자신 있게 단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주장도 내놨다. 박 교수는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인 조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수십만 명이 모였다는 지원병 지원자들 속에 당신의 조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또 "그 조부는 이름에 남은 '상놈' 흔적을 없애려고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창씨개명 신청을 했을지도 모른다"며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래야만 규탄부터 하고 보는 당신의 폭력이 한 사람을 사정없이 죽이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순결 강박이 이 모든 걸 만든다"며 "식민지화된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식민지화의 흔적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려 하는 것부터 모순 아니냐"고 지적했다. 한편 배우 하영은 KBS 2TV 예능 프로그램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증조할아버지부터 이어진 '4대 의사 집안'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하영의 증조부가 의사 안상호 씨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둘러싼 친일 논란이 불거졌다. (사진 = 연합뉴스, 뿌리와이파리, 박유하 페이스북, 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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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신들도 일본 피 섞여…친일 규탄은 폭력" 하영 옹호나선 교수
"일제 치하에서 구조적 친일파일 수밖에" 반박 하영, SNS 캡처. 일본군 위안부를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 등으로 표현해 논란이 된 책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세종대학교 명예교수가 배우 하영을 둘러싼 친일 논란을 두고 "친일 강박증"이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지난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친일 강박증'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하영의 증조부와 조부 이력을 언급하며 "나무위키 설명만 봐도 문제의 안상호는 단순히 친일로 몰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게 보인다"고 했다.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 씨에 대해서는 "'조선의 첫 번째 양의'라는 타이틀은 그가 조선의 문명화·근대화를 상징하는 인물임을 말한다"며 "대한제국 1호 국비유학생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런 그가 귀국 후 순종의 주치의가 되었다는 건 당연한 수순이고 그 명예에는 당연히 부도 따라왔을 것"이라며 "친일로 쌓은 명예라기보다 스스로의 실력과 국가의 지원으로 의료계 개척자가 되었던 이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안 씨가 이완용을 치료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이완용을 치료했다며 비난하는 이도 있던데 이완용 아니라 서민이라도, 가능하다면 그에게 치료받고 싶었을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인사들의 행적을 일괄적으로 친일로 규정하는 시각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정치·경제·문화·교육 모든 분야에서 리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구조적으로 친일파일 수밖에 없다"며 "그들의 존재를 모두 부정한다면 일제시대 내내 인재를 키우지 말아야 했다는 얘기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 시대 내내 조선인 정치가도 조선인 사장도 조선인 학교장도 존재하면 안 되었다는 얘기가 되고, 그들의 존재를 전부정하는 이들은 일본인의 지배를 직접 받고 싶었다는 얘긴가"라고 반문했다. 하영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인 조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수십만 명이 모였다는 지원병 지원자들 속에 당신의 조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또 "그 조부는 이름에 남은 '상놈' 흔적을 없애려고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창씨개명 신청을 했을지도 모른다"며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 교수는 "그래야만 규탄부터 하고 보는 당신의 폭력이 한 사람을 사정없이 죽이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순결 강박이 이 모든 걸 만든다"며 "식민지화된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식민지화의 흔적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려 하는 것부터 모순 아니냐"고 지적했다. 앞서 하영은 KBS 2TV 예능 프로그램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증조할아버지부터 이어진 '4대 의사 집안'을 소개했다. 이후 하영의 증조부가 의사 안상호 씨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 행적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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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 "하영 비난은 친일 강박증" 주장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TV조선 방송화면 캡처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가 배우 하영 조상의 친일 논란과 관련해 '친일 강박증'이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11일 자신의 SNS에 안상호가 '조선의 첫 번째 양의'로 불렸고 대한제국 1호 국비유학생이었다는 점을 들어 "대한제국이 만든 인재"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런 그가 귀국 후 순종의 주치의가 되었다는 건 당연한 수순이고 그 명예에는 당연히 부도 따라왔을 것"이라며 "친일로 쌓은 명예라기보다 스스로의 실력과 국가의 지원으로 의료계 개척자가 되었던 이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12일 추가 글을 게시하며 "지금 논란은, 그저 한 사람의 우수한 의사로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에게, 자신을 의사로 만든 일본, 혹은 사회와 얼마나 거리를 둘 수 있었는지를 묻는 논란이 되어야 한다"며 "쉬운 규탄이 아닌 어려운 고민"이라고 언급했다. 앞서 배우 하영은 여러 방송에 출연해 증조할아버지부터 이어진 '4대 의사 집안'을 소개했으며, 이후 증조부가 의사 안상호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정친목회 활동 등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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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내가 이 집에서 태어난 게 더럽다"…하영 논란 속 13년 전 '후손 고백글' 재조명 [어떻게 생각하세요]
온라인 커뮤니티 '안상호 후손'이라며 작성한 2013년 글 확산 배우 하영(왼쪽)의 증조부 안상호가 친일 논란에 휩싸인 가운데 자신을 안상호의 증손이라고 밝힌 네티즌이 2013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 재조명되고 있다. /사진=하영 인스타그램, 온라인 커뮤니티 [파이낸셜뉴스] 배우 하영의 증조부인 구한말 의사 안상호를 둘러싼 친일 논란이 확산하는 가운데, 13년 전 자신을 안상호의 증손이라고 밝힌 네티즌의 글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11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2013년 5월 작성된 글이 확산됐다. 작성자 A씨는 "익명이니까 고백할 수 있다"며 "우리 증조부가 고종 황제 독살 의심을 받은 어의였다"고 적었다. 이어 "나는 4년 전 처음 알게 됐다. TV에도 나왔다. 이름만 짧게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솔직히 우리 집 잘 산다. 대대로 잘 살았다고 들었다"며 "일제 때 별 탈 없이 잘 산 걸 보면 증조할아버지를 시작으로 할아버지도 친일을 했을 것 같다"고 했다. A씨는 "더럽다.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난 게"라고 덧붙였다. A씨가 언급한 방송은 2009년 8월 14일 kbs '역사스페셜' '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로 추정된다. 고종 독살설을 다룬 해당 방송에서 안상호의 이름은 두 차례 등장한다. 일본인 궁내부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의 회고록 '이왕궁비사'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의 수기에서다. 이방자 여사는 수기에 조선총독부가 안상호에게 독살을 명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적었다. 안상호는 슬하에 4남3녀를 뒀으며, 넷째 아들이 하영의 할아버지다. 이 때문에 글쓴이가 하영의 친척일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앞서 하영은 KBS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증조부가 안상호라고 소개했다가 논란의 중심에 선 바 있다. 안상호는 한국 최초 개업의로 알려졌지만, 친일 단체 '대정실업친목회' 평의원을 지낸 것으로 확인됐다. 안상호는 1909년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에게 피습된 친일파 이완용을 치료한 의료진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목숨을 건진 이완용은 이듬해인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하영 측은 지난 10일 친일 논란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으나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꿔 사과했다. 소속사는 안상호가 친일단체 평의원 명단에 오른 사실을 확인했다며 "충분한 검증 없이 성급히 답변해 혼란을 드린 점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2009년 8월 15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편에서 안상호의 이름이 언급된 장면. /사진=KBS '역사스페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수기에서 안상호를 언급한 대목. 영친왕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다. /사진=KBS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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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태풍 '돌핀' 소멸했지만...베이징까지 연간 강수량 30% 폭우
[앵커] 중국에 상륙한 태풍 돌핀은 이틀 만에 소멸했지만, 여전히 내륙 곳곳에 폭우 경보가 내려진 상탭니다. 수도 베이징 일대엔 24시간 동안 연간 강수량의 3분의 1 넘는 큰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베이징 강정규 특파원입니다. [기자] 소방 차량에서 내려온 이동식 펌프가 도로에 고인 물을 뽑아내기 시작합니다. 주변 하천까지 뻗어 놓은 아름드리 호스 여러 가닥에선 쉴새 없이 물을 토해 냅니다. 소방대원들은 태풍이 망가뜨린 철재 구조물 잔해와 쓰러진 나무들도 치워야 합니다. [소방 구조 대원 : 철판이 단단히 고정돼 있지 않아서 떨어져 내리면 다른 집 간판을 망가뜨릴 수 있어요.] 물에 잠긴 도시에선 수륙 양용 차량을 개발한 업체가 구조대를 자처했습니다. [추훙빙 / 구조대장 : 수심 1.2m 이내에선 무한궤도로 달리고 1.2m를 넘어서면 물에 떠서 움직입니다.] 태풍 당시엔 300여 명을 대피시켰고, 이후엔 홍수에 발 묶인 주민들의 병원 이송을 도왔습니다. [유 씨 / 중국 저장성 주민 : 제 손자가 이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물건을 가져다줍니다.] [왕 씨 / 중국 저장성 주민 : 제가 차를 몰고 네 시간이나 달려왔습니다. 아버지가 입원해서 수술을 받으셨어요.] 지난 8일 오후 중국 동부 저장성 연안에 상륙한 제13호 태풍 돌핀. 이틀 만에 내륙에서 소멸했지만, 여전히 후베이·안후이·허난 3개 성에 걸쳐 소용돌이 비구름이 맴돌고 있습니다. 이밖에 산둥과 산시, 허베이를 넘어 내몽고와 헤이룽장성·윈난까지 폭우 경보가 내려졌습니다. 베이징 외곽엔 24시간 동안 최대 200mm의 큰비가 예보됐습니다. 이 지역 연평균 강수량의 3분의 1이 넘는 '물폭탄'을 하루 만에 퍼붓는 셈입니다. 베이징에서 YTN 강정규입니다. ※ '당신의 제보가 뉴스가 됩니다' [카카오톡] YTN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02-398-8585 [메일] social@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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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내 증조부 안상호 친일파, 더럽다"…하영 논란에 13년전 글 재조명
배우 하영이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논란으로 구설에 오른 가운데, 13년 전 자신을 안상호 후손이라고 소개한 네티즌의 글이 재조명되고 있다./사진=뉴스1 배우 하영이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논란으로 구설에 오른 가운데, 13년 전 자신을 안상호 후손이라고 소개한 네티즌의 글이 재조명되고 있다. 1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2013년 5월 작성된 "익명이니까 고백할 수 있는데"라는 제목의 글이 다시 공유됐다. 자신이 안상호 증손주라는 네티즌은 "우리 증조부가 고종 황제 독살 의심을 받은 어의였다"며 "나는 4년 전 처음 알게 됐다. (안상호 독살설은) TV에서도 다뤘다. 그냥 짧게 이름만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솔직히 말해 우리 집 잘 산다. 나도 잘 모르지만 대대로 잘 살았다고 들었다. 일제 때 별탈없이 잘 산 걸 보면 증조할아버지를 시작으로 할아버지도 친일을 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XX 더럽다.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난 게"라고 하소연했다. 안상호는 슬하에 4남 3녀를 뒀다. 이중 넷째 아들 안부호씨가 배우 하영의 할아버지다. 이에 따라 해당 글을 작성한 네티즌이 하영의 친척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최근 하영은 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자신의 증조부가 안상호라는 사실을 밝혀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한국 최초 개업의인 안상호는 친일 단체 '대정실업친목회' 평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안상호는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에게 피습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을 치료한 의료진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역사학자 고(故) 박영석 전 건국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이완용 연구'에 따르면 1909년 12월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피습된 이완용은 병원으로 옮겨져 안상호, 박종환 등 의료진에 치료를 받았다. 목숨을 건진 이완용은 이듬해인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 체결에 앞장섰다. 안상호의 이름은 고종의 독살설을 다룬 '이방자수기'와 '이왕궁비사'에도 등장한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비였던 이방자 여사는 수기에 "뜻밖의 소문을 들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시의(侍醫) 안상호에게 독살할 것을 명령했다는 것"이라고 적었다. 궁내부 사무관이었던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도 회고록 '이왕궁비사'에서 "전하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민병석 및 윤덕영이 총독부 대관과 모의해 안상호에게 명하여 독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있다"고 전했다. 하영 측은 증조부의 친일 논란에 대해 10일 "사실무근"이라고 했지만, 하루 만에 입장을 번복하고 사과했다. 소속사는 "안상호 선생이 친일단체 평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 것을 확인했다. 충분한 검증 없이 '사실무근'이라 성급히 답변해 혼란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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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나만의 게놈 지도' 시대…부모 염색체 100% 해독
부모 양쪽으로부터 한 벌씩 물려받은 유전체 세트를 완벽히 해독한 정밀 유전체 지도가 구현됐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부모 양쪽에서 물려받은 두 벌의 염색체를 완전히 해독하는 시대가 열렸다. 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담은 ‘개인 맞춤형 게놈(유전체) 지도’가 구현됐다. 애덤 필리피 미국 존스홉킨스대 컴퓨터과학·의공학·유전의학 교수 연구팀은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 기증받은 혈액에서 염색체 쌍인 '이배체'를 추출하고 부모 각각으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를 분리해 정밀 해독하는 데 성공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고품질의 인간 유전체 지도를 구축한 연구 성과를 6일 국제학술지 '셀'에 발표했다. 연구를 주도한 필리피 교수는 “머지않아 개인의 전체 유전체를 분석하는 일이 일상화될 것”이라며 “출생 때부터 개인의 완전한 유전체를 생성해 의무기록에 첨부한 뒤 평생 개인 맞춤형 의료 서비스를 받는 미래가 그려질 것으로 전망한다”고 연구의 의미를 밝혔다. 최초의 유전체 지도는 누락된 부분이 있다. 2003년 인간 유전체 초안을 만든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여러 기증자의 DNA 샘플을 조합해 만든 표준 지도다. 당시 기술로는 염색체 가운데 잘록한 부분인 중심절, 염색체 맨 끝인 텔로미어 등을 읽지 못해 완성도 92%에 그쳤다. 유전체의 8%는 공백 상태였다는 뜻이다. 2022년에는 ‘T2T(Telomere-to-Telomere)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완성도 100%의 인간 유전체 지도가 만들어졌다. 2003년 읽어내지 못했던 유전체 영역을 해독했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의 DNA를 이용해 만들었다. 다만 부모 양쪽에서 각각 받은 염색체를 이용한 것 아니라 부계 유래 염색체만 두 벌 가진 유전체를 지도화했다는 한계가 있다. 존스홉킨스대 연구팀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 23개, 어머니로부터 받은 23개를 구분해 각각 완벽히 해독했다. 부모 양쪽으로부터 한 벌씩 물려받아 쌍을 이룬 유전체 세트인 이배체를 복원한 최초의 정밀 유전체 지도다. 연구팀은 기증자 한 명의 혈액에서 얻은 DNA 시료를 이용해 유전체 분석을 진행했다. 각 염색체의 한쪽 말단(텔로미어)부터 반대쪽 말단까지 빠진 구간 없이 연속된 DNA 염기서열을 완성했다. 연구팀은 지금까지 안개에 가려져 있던 암, 신경계 질환 등과 관련된 유전체 영역들을 추가로 밝혀냈다. 기존 지도에 포함돼 있지 않던 DNA 염기서열 9억개 이상이 추가된 것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50억 달러(약 7조1650억원)가 투입돼 진행된 반면 연구팀은 단 5000달러(약 716만원)로 개인의 게놈을 완벽하게 해독했다. 국가 규모의 거대 과학 프로젝트가 개인 의료에 적용 가능한 기술로 전환되고 있다는 의미다. 연구팀은 ‘개인 맞춤형 유전체’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필리피 교수는 “내 유전체와 표준 유전체 사이의 차이점을 찾으려던 방식에서 개인의 고유한 유전체 전체를 실제로 해독하는 방식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며 “환자의 전체 유전체를 빠르고 저렴하게 지도화하면 희귀유전질환 진단 공백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의료인들이 환자의 질병 위험을 훨씬 쉽게 예측하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현재 브라카 유전자 변이로 유방암 발병 위험을 예측하는 등의 유전자 분석이 이뤄지고 있지만 앞으로는 새로운 유전자 변이들이 더욱 많이 발견돼 암 발생 위험, 희귀유전질환 발생 위험 등의 예측 정확도가 크게 높아지고 개인 맞춤형 의료 서비스까지 제공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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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미국서 크게 성공한 한국인 부자가 기꺼이 돈을 보낸 곳 [김종성의 '히, 스토리']
[어떤 어른] 미국 서부를 개척한 재미교포 한시대 앵글로색슨족의 미국 서부 개척은 총소리와 유혈을 수반했지만, 피땀에 기반한 한국인 한시대(韓始大, 1889~1981)의 서부 개척은 아름답고 숭고했다. 재정적 토대 없이 하와이로 이민 간 그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에서 한형제회사와 한가회사 등을 운영하는 중견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하와이대학 한국학센터가 발간한 <1903-1905 호놀룰루 도착 한국인 승객들(Korean Passengers Arriving at Honolulu, 1903-1905)>은 만 14세 된 한시대(Han, Su Tai)가 황해도 해주에서 살다가 홍콩마루호를 타고 1903년 11월 18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고 알려준다. 동승자는 39세 된 아버지 한준상이었다. 어머니와 동생 한영대가 도착한 것은 2년 뒤 5월 8일이다. 이 가족이 한꺼번에 이주하지 못한 것은 경제적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일은 이 가족이 하와이에서 미 본토로 이주할 때도 되풀이됐다. 이때도 아버지가 먼저 건너가 돈을 모은 다음에 가족들을 나중에 불러들였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한인 사회의 지도자 ▲ 독립운동가 한시대 선생 ⓒ 국가보훈부 한시대의 부모들은 교육열이 높았다. 그런데도 한창 공부할 나이인 한시대는 곧바로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한시대가 하와이 한인기숙학교에 입학한 것은 1906년 9월이다. 부인과 작은아들이 정착한 뒤에 큰아들이 정규학교에 들어간 것은 1905년까지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준상이 한국에서 갖고 간 돈을 기반으로 그 아들 한시대가 미국에서 사업을 벌인 게 아님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 부자들을 소개하는 2016년 1월 17일 자 <미주중앙일보> 기사는 한시대의 일생을 요약하는 대목에서 "1903년 부모와 함께 15세에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왔다"라고 한 뒤 "1950년대에 자본금 40만 달러에 달하는 한가기업회사를 설립해서 크게 성공했다"라고 기술한다. '40만 달러'는 한국 정부의 발행물에도 등장한다. 국가보훈부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3권 한시대 편은 "1950년대 중반경 약 40만불에 상당하는 한가기업회사를 설립"했다고 말한다. 40만 달러가 자산인지 납입자본금인지 아니면 각종 재산의 평가액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이 돈은 오늘날로 치면 10배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미국 노동부 노동통계국이 2024년 11월에 발표한 '전체 도시소비자의 장기 소비자물가지수(CPI)'라는 자료에 따르면, 1955년 6월의 CPI는 26.7이었다. 금년 7월 14일 발표된 CPI는 336.07이다. 다른 변수를 배제하고 CPI 변화만 놓고 보면, 1950년대 중반의 40만 달러는 지금의 500만 달러(약 71억 원)에 근접하는 구매력을 갖는다. 1950년대 중반의 40만 달러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미국의 소기업 자산 규모밖에 되지 않지만, 1950년대 중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 국세청이 발간한 <소득세 통계 1955>에 따르면, 대차대조표를 제출한 74만 6962개의 법인 중에서 총자산이 25만 달러 미만인 기업은 77.8%이고, 50만 달러 미만인 기업은 87.3%였다. 이를 감안하면 한가기업회사는 상위 12.7~22.2%에 드는 기업이었다. 한시대의 부모는 자녀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한시대는 당시의 재미교포 자녀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동생 한영대는 LA에서 의사가 됐다. 이런 요인은 한시대가 한국인 사회에서 리더십을 갖는 데 도움이 됐고, 그는 한국인들과 협력해 26세 때 사탕무 등을 재배하는 농장 사업을 시작했다. 1909년에 창립된 대한인국민회를 기리는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홈페이지는 한시대를 소개하는 코너에서 "1915년 캘리포니아주 맨티카지방에서 한인 60여 명과 함께 1300에이커의 농지를 조차했다"라고 알려준다. 현지의 사회적 약자인 한국인들이 노동력과 자금을 모아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는 큰일을 26세의 한국 청년이 주도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사탕무 재배에 주력하던 한시대는 포도농사가 유망해 보이자 주력 업종을 과감하게 바꿨다. 또 농업생산에만 머물지 않고 농업 유통으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항상 대담성을 보였다"고 평한다. 사업을 불려 나간 그는 캘리포니아 중부에서 농업회사인 한형제회사를 운영하고, 남부에서 부동산 임대업체인 한가기업회사를 경영했다. 한가기업회사가 상위 12.7~22.2%에 들었으니, 그는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였다.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그가 사업 성공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서도 14세 때 떠난 고국의 비참한 사정을 잊지 않고 살았다는 점이다. 독립운동 후원에 앞장서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운동까지 ▲ 국가보훈처가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한시대 선생 ⓒ 국가보훈부 한시대가 한국을 떠난 1903년은 일본이 한국 무대의 경쟁자인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마지막 일격을 생각하던 시기였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 승리를 발판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성사시켰다. 그는 이 같은 고국의 처지를 마음에 두고 살았을 뿐 아니라 고국을 돕기 위한 구체적 실천에도 나섰다. 그의 이름이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대규모 농장사업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3·1운동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그는 재미교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사람이 됐다. 위 공훈록은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송금"했다고 말한다. 그는 사업을 할 때처럼 독립운동 후원을 할 때도 과감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사업과 국권회복운동에서도 항상 대담성을 보였다"고 평한다.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중 두 민족의 항일투쟁은 전쟁 단계로 발전했다. 한시대의 기부활동도 이 흐름에 맞춰 전개됐다. 공훈록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을 기회로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주 등지에서 산재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등 6개 단체와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陳線)을 결성하고 진강(鎭江)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활동하면서 8년간 적극적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고 기술한다. 이런 가운데 그는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 해외한족대회 부의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부위원장 등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재미교포 통합과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했다. 그는 돈뿐 아니라 시간도 얼마든지 고국을 위해 쓸 수 있는 사업가였다. 이 점은 고국 여행이 쉬워진 해방 직후에 증명됐다. 이때 그는 해방 이후의 분열상을 극복하고자 직접 고국에 돌아와 호소 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11월 4일, 56세 된 한시대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대표단을 이끌고 고국 땅을 밟았다. 그 뒤 그가 중점적으로 전개한 일은 좌우통합운동이다. 국가보훈부가 그를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할 때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중립적 입장에서 중간세력들과의 통합운동을 전개해 1946년 9월 15일 천도교 청우당에서 8개 정당 및 단체를 통합한 신진당을 결성"했다. 중간세력의 덩치를 키워 좌우합작을 벌이는 작업이 신진당 결성이라는 성과를 냈던 것이다. 그는 좌우합작을 위해 대중적 홍보활동에도 참여했다. 위 자료는 "한시대는 (1946년) 7월 18일 자와 8월 1일 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좌우합작에 의한 단결만이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역설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파당적 논쟁을 버리고 운동의 통합과 정당과 민중 사이의 협동을 재촉하자고 주장하였다"라고 한 뒤 "7월 23일에는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최로 대중 강연회를 개최하였다"라고 기술한다.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은 실상은 항일진보진영에 대한 보수세력의 압박이었다. 전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보수진영 상당수가 친일파 혹은 극우세력이었기 때문에, 항일진보진영은 이들과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미국에서 건너와 민족의 단결을 촉구한 것은 고국에 대한 한시대의 애정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잘나가는 사업가였던 점을 감안하면, 고국의 단결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좌우합작에 실패하고 돌아간 뒤에도 한시대는 흥사단 활동 등을 통해 교포사회 단결과 민족교육 증진에 이바지했다. 14세 때 아버지와 함께 고국을 떠난 그는 고국의 비참한 현실을 잊지 못해 항상 태평양 건너편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았다. 그래서 그가 번 돈들도 그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날아가 고국을 위해 쓰이게 됐다. 그는 고국을 위해 미국 서부에 뛰어든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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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예비 시부에 1~2주마다 안부전화 30분, 좀 뜸했더니 사사건건 트집"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결혼을 앞둔 한 예비 신부가 예비 시아버지의 반복적인 안부 전화 요구와 자신에게만 유독 날카롭게 대하는 듯한 태도에 서운함을 토로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안부 전화로 눈치 주는 시아버지'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내년 2월 결혼을 앞둔 A 씨는 예비 남편과 이미 함께 살고 있어 예비 시부모 역시 사실상 결혼한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A 씨에 따르면 예비 시아버지는 이전부터 "안부 전화를 자주 하라"고 요구해 왔다. A 씨는 한때 1~2주에 한 번씩 먼저 전화를 걸어 30분가량 통화했지만, 과거 서운한 일이 생긴 뒤부터는 최소한의 도리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최근 A 씨가 예비 시아버지의 전화를 몇 차례 피하자, 예비 시아버지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예비 남편은 "왜 자꾸 나 말고 여자친구(예비 며느리)에게 전화하느냐"고 물었고, 예비 시아버지는 감정이 상한 듯 서운해했다. 며칠 뒤 예비 시댁을 방문한 A 씨는 예비 시아버지가 자신에게만 유독 투덜거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옥수수 껍질을 벗기다 피부가 가렵다고 하자 "곱게 자라서 그렇다"는 말을 들었고, 닭갈비를 섞으려 하자 "가만히 놔두라는데 왜 그러냐"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또 예비 시아버지는 예비 남편에게 회사 성과급 여부를 물은 뒤 A 씨에게도 "성과급 있냐"고 질문했다. A 씨가 "있다"고 답했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A 씨는 "하나하나만 보면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계속 나를 기죽이거나 불편하게 만들려는 느낌이 들어 너무 불쾌했다"며 "괜히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참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전부터 쌓인 서운함도 있었다. 예비 시아버지는 과거 예비 남편의 동생에게 여자 친구와 함께 입을 야구 유니폼 점퍼를 사주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동생 커플이 커플 점퍼를 맞춰 입은 사진이 SNS에 올라왔다. A 씨는 선물 자체가 서운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다만 당시가 자신의 생일이 있던 달이었고, 자신은 예비 시부모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겼지만 정작 자신의 생일에는 두 사람 모두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는 점이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식사비 등을 계산할 때도 서운함이 쌓였다고 한다. 예비 시아버지가 "아빠가 사?"라고 묻거나 먼저 자리에 앉는 경우가 있어 결국 A 씨와 예비 남편이 비용을 부담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 보는 동생의 여자 친구에게 20만 원 상당의 점퍼를 선물한 것이 의외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A 씨는 "왜 나한테만 이렇게 대하시지?", "내가 만만한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며 "이런 일로 서운해지고 쪼잔해지는 나도 싫다"고 했다. 이어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할 것 없이 그냥 도리만 지키며 살고 싶다"며 앞으로 예비 시댁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누리꾼들은 "예비 시부가 안부를 물어야 할 만큼 위중한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안부를 물어야 하나", "시아버지 기준으로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을 것", "어른들은 맏며느리는 당연히 나를 모시는 존재로 생각하더라" 등의 반응을 보였다.
SNS아버지성과급서울비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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