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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 연예가화제타투 지우고 ‘전라 노출’…나나, ‘스캔들’ 파격 변신 묻어버린 ‘입술 필러’
넷플릭스 시리즈 '스캔들'에서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선보인 배우 나나가 작품 속 입술을 둘러싼 시청자들의 지적과 논란에 대해 팬들에게 직접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전신 타투 제거와 과감한 노출 연기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입술 필러 논란'이 불거지며 화제가 되었다.
넷플릭스조선시대서울논란배우 -
생활오디세우스 못지않은 장보고의 귀환
가리포진의 역사부터 서편제 촬영지까지, 섬이 품은 이야기들 [이전기사 : 광복절에 찾은 목포, 거리 곳곳에 일제 수탈 흔적이] 완도에 도착해 짐을 정리한 뒤 완도타워를 찾았다. 언덕 위 전망대에 오르니 완도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완도군에는 말도, 청산도, 장도, 여서도 등 많은 섬이 있다. 완도의 한자명은 완전할 완(完)자가 아니라 풀초(艹) 부수가 있는 완(莞)자를 쓰는데, 풀이 무성한 섬이라는 뜻이다. 완자를 빙그레웃음 완자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어, 완도에는 '빙그레'라는 상호를 가끔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완도의 여러 섬들은 강진·해남·영암·장흥 등 인근 고을에 나뉘어 속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완도에 설치된 가리포진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가리포진은 석성으로 둘레가 3리였으며, 중종 17년(1522) 왜구 방어를 위해 처음 설치되었다. 남해와 서해를 잇는 바닷길을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 완도타워에서 바라 본 완도 앞바다 ⓒ 여경수 저녁은 완도항의 전복 전문 식당에서 먹었다. 전복회, 전복장, 전복구이를 먹으니 피곤함이 사라졌다. 산책길에는 완도 출신 골프선수 최경주의 동상도 마주쳤다. 생존하는 운동선수의 동상을 보니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저녁 식사 후 친구들이 쉬는 동안 완도향교와 객사를 다녀왔다. 완도향교는 1896년 완도가 군으로 승격한 뒤 세워져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비교적 늦은 시기에 지어졌다. 1722년 지어진 완도 객사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보관하던 공간이자 숙박시설로 쓰였다. 군현이 없던 완도에 가리포진 첨사가 객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완도가 오늘날 독립된 자치단체가 된 데는 이런 역사가 쌓여 있다. 다음날인 16일에는 완도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청산도로 향했다. 여름날의 청산도는 이름 그대로 짙푸르렀다. 주민 수는 한때 1만 3천 명이 넘었으나 지금은 2천 명 남짓이라고 한다. 50분 뒤 청산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택시를 대절해서 섬을 둘러보았다. ▲ 서편제 촬영지인 청산도 ⓒ 여경수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나는 이청준 작가의 원작 소설 <서편제>를 읽었을 때의 감동과, 이후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감동을 여전히 기억한다. 10대 후반, 세상을 향해 날 서 있던 시각이 이 작품을 통해 나름 순화되었던 느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봄날 황톳길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르던 소리꾼 일가의 장면은 여전히 명장면으로 남아 있는데, 촬영지에 다가가니 스피커에서 그 노래가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택시 기사는 촬영 당시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을 직접 보았다고 들려주었다. 청산도에는 구들장논이라 불리는 다랑논과 돌담길이 남아 있다. 물을 모아두기 힘든 섬에서 논농사를 짓기 위해, 돌을 밑받침 삼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물을 가두는 방식으로 만든 농법이다. 범바위 앞에서 만난 사진작가에게 '청산8경'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물으니, 거문도 출신 유학자 김류(金瀏)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청산도, 여서도, 거문도에서 제자들을 길렀고, 청산도에는 그를 배향하는 숭모사가 있다. 뜻밖에도 이 작은 섬에서 묵향을 느낄 수 있었다. 청산도에서 점심으로는 톳이 들어간 비빔밥과 전복된장찌개를 먹었다. 톳무침, 미역줄기볶음, 김무침 같은 해조류 밑반찬들이 함께 나왔는데, 역시나 맛있었다. 검붉은 빛깔의 톳은 식감이 좋았다. 특히 군소무침은 처음 먹어본 맛인데, 스걱스걱 씹히는 맛이 참 좋았다. ▲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완도(신라 청해진) ⓒ 여경수 오후에 다시 완도로 돌아와 장보고기념관과 청해진이 있던 장도를 찾았다. 완도 장좌리 앞바다에 둥글넓적하게 떠 있는 장도는 장군섬이라고도 불리며, 목책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썰물 때면 갯벌이 드러나 걸어서도 건널 수 있다는데, 우리가 나올 무렵에는 이미 밀물이 들어차 있었다. 대동여지도에서 완도를 찾아보니 '신라청해진(新羅淸海鎭)'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역시 대동여지도는 단순한 지도가 아닌 문화를 담고 있는 지도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 장보고에 관한 정보는 여러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장보고는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해 해상권을 장악했다. 장보고는 신무왕 옹립에 공을 세웠으나,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으려 하자 신하들이 "섬사람"이라는 이유로 반대했고, 이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염장에게 살해되었다. 물론 반란이라는 용어는 삼국사기를 집필한 이들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청해진 사람들은 이후 벽골군(오늘날 김제)으로 옮겨졌다는 대목에서,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하는 디아스포라가 연상되었다. ▲ 장보고기념관에서 바라 본 청해진 ⓒ 여경수 완도에는 15.5m 크기의 장보고 동상이 서 있다. 오른손엔 칼을, 왼손엔 교역물품도록을 쥔 모습으로, 무인이자 상인이었던 그의 삶을 보여준다. 장보고 사후 신라는 청해진을 폐허로 만들었는데, 이는 신라가 이미 쇠망해 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해양 상인의 후손인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으니, 바다를 장악하는 자가 권력을 쥔다는 것을 우리 역사가 보여주는 셈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오디세이>가 그려낸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떠올리면(10년), 페르시아·아라비아 상인까지 끌어들인 국제 무역망을 장악하고 9세기 불교문화 융성에도 기여한 장보고가 완도로 돌아온 것 역시, 귀향 서사의 백미로 읽힌다(장보고는 당나라로 건너간 이후 금의환향 하기까지 약 20~25년의 세월이 걸렸다).
디아스포라운동선수오디세이조선시대10대 -
세계“명품 매장과 온탕이 한 지붕 아래”…외신도 반한 2만 원짜리 부산 찜질방
기사 이해를 돕기위한 자료사진, 연합뉴스 명품 매장과 온탕이 한 지붕 아래 공존하는 나라. 미국 CNN이 부산 찜질방을 통해 한국 목욕 문화의 속살을 들여다봤다. CNN은 16일(현지시간) ‘세계 최대 백화점에서 알몸이 되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 센텀시티 내 ‘스파랜드’를 집중 조명했다. 세계 최대 규모 백화점 안에 찜질방이 들어선 풍경이 미국 독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CNN은 “미국 쇼핑몰이 피자와 옷을 파는 공간이라면, 한국 대형 쇼핑몰에서는 찜질방을 경험할 수 있다”며 양국 문화의 차이를 대비했다. 기사는 “명품 매장 사이에 있는 검은색 유리문을 지나면 스파랜드가 나온다”고 묘사했다. 찜질방의 이용 방식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남녀가 분리된 공간에서 탈의 후 온탕에 입욕하고 이후 남녀 공용 찜질 공간으로 이동하는 구조다. 한국 특유의 전신 세신 서비스인 ‘때밀이’도 소개됐다. 기자는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세신사들이 능숙하고 효율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전했다. 역사적 뿌리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목욕 문화 전문가 이인혜씨는 CNN에 “뜨거운 방에서 몸을 데우며 휴식하거나 병을 다스리는 문화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며 전통 가옥의 온돌이 현대 찜질방의 원형이 됐다고 설명했다. 현대식 찜질방은 부산 여성들이 공동 건물의 뜨거운 바닥을 온돌처럼 활용한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후 서울 등 전국으로 퍼졌고, 1995년 7월 정부가 법적 기준을 마련하면서 제도권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의 찜질방은 단순한 목욕 시설을 넘어섰다. 현재 전국에 수천 곳이 운영되며 사우나와 미용 서비스, 식당, 카페, 네일숍, 수면실 등을 갖춘 복합 공간으로 진화했다. 소금·황토·숯 등을 활용한 다양한 찜질방도 운영된다. 스파랜드는 온도가 다른 탕 22개와 야외 족욕탕을 갖추고 있다. CNN은 찜질방의 공동 이용 문화에도 주목했다. “여러 세대의 여성들이 함께 방문해 대화를 나누고, 서로 머리를 손질하거나 몸을 부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며 “찜질방이 신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외국인 접근성도 높아졌다. CNN은 스파랜드 관리자를 인용해 평일 기준 내국인과 외국인 비율이 대략 반반이라고 전했다. 입장료는 2만원(약 14달러)이다. CNN은 “K팝·K푸드·K뷰티에 이어 찜질방이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며 “서울뿐 아니라 부산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이 같은 흐름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17000원 내면 이걸 다? 한국인들 부럽다”…‘케데헌’ 인기에 K찜질방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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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세계 최대 백화점서 알몸…검은 유리문 지나면 나온다"…CNN도 푹 빠진 곳
신세계 센텀시티 '스파랜드' 집중 조명…때밀이·온돌·공동목욕 문화 소개 미국 CNN이 부산의 찜질방을 소개하며 한국의 독특한 목욕 문화를 조명했다. CNN은 찜질방을 단순히 목욕이나 사우나를 즐기는 시설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인 생활문화와 현대적인 서비스가 결합한 공간으로 설명했다.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 신세계백화점 제공 CNN은 지난 12일(현지시간) '세계 최대의 백화점에서 알몸이 되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 센텀시티에 있는 '스파랜드'를 소개했다. CNN은 미국의 쇼핑몰이 피자나 옷을 사는 공간이라면 한국의 대형 쇼핑몰에서는 찜질방을 경험할 수 있다고 비교했다. 특히 신세계 센텀시티가 세계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라는 점을 소개하면서 "명품 매장 사이에 있는 검은색 유리문을 지나면 스파랜드가 나온다"고 묘사했다. CNN은 찜질방을 개인실에서 서비스를 받는 고급 스파와는 다른 공간으로 설명했다. 이용객은 남녀가 분리된 공간에서 옷을 벗고 온탕에 들어간 뒤 찜질방으로 이동한다. 목욕 후에는 '때밀이'로 불리는 전신 세신도 경험할 수 있다. 기자는 세신 과정이 다소 낯선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세신사들이 능숙하고 효율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전했다. 한국식 찜질방.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 없음. 연합뉴스 찜질방의 기원도 부산과 연결했다. 목욕 문화 전문가 이인혜씨의 설명을 인용해 조선시대에도 뜨거운 방에서 몸을 데우며 휴식하거나 병을 회복하는 문화가 있었으며, 전통 가옥의 온돌이 현대 찜질방의 배경이 됐다고 소개했다. 현대식 찜질방은 도시화와 함께 형태가 달라졌다. CNN에 따르면 부산의 일부 여성들이 공동 건물의 뜨거운 바닥에 누워 온돌 문화를 재현하려 한 것이 현대적인 찜질방의 시작으로 전해진다. 이후 서울 등으로 확산했고 1995년 7월 정부가 찜질방을 법적으로 인정하면서 관련 기준도 마련됐다. 현재 한국에는 수천곳의 찜질방이 운영되고 있으며 목욕과 사우나뿐 아니라 미용 서비스, 식당, 카페, 네일숍, 수면실 등을 갖춘 곳도 생겼다고 CNN은 전했다. 일부 시설에서는 소금과 황토, 숯 등을 활용한 찜질방도 운영한다. CNN은 찜질방의 공동 이용 문화에도 주목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목욕하는 방식이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여러 세대의 여성들이 함께 방문해 대화를 나누고 서로 머리를 손질하거나 몸을 부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찜질방이 신체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스파랜드는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식 찜질방을 처음 경험하기에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곳으로 소개됐다. CNN은 관리자의 말을 인용, 평일 기준 이용객 가운데 현지인과 외국인의 비율이 대략 반반이라고 전했다. 시설에는 온도가 다른 22개의 탕과 황토·숯 등을 활용한 찜질방, 야외 족욕탕 등이 마련돼 있다. CNN은 "한국 음식과 영화, 음악, 화장품 등으로 확산한 '한류'가 관광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서울뿐 아니라 부산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찜질방 역시 한국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장소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스파랜드의 입장료는 2만원으로, CNN은 이를 약 14달러로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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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국인은 왜 밥그릇 안 드나요?"…외국인들 신기해한 이유
베트남서 화제 된 식사법 베트남 매체, 한국인 식사법 조명 밥그릇 들지 않는 식사 모습 분석 "밀보다 곡물밥 식사로 수저 사용" '수저 문화·금속그릇' 등 문화 주목 기사와 무관한 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한 베트남 현지 매체가 식사할 때 밥그릇을 손에 들지 않는 한국인의 식사 습관을 조명했다. 베트남·중국·일본에선 밥그릇을 입 가까이 들어 먹는 모습이 자연스럽지만 한국에선 오히려 예의에 어긋난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한국 특유의 숟가락·젓가락 사용법, 밥·국·반찬으로 구성된 식사문화, 금속 그릇의 발달 등이 오랜 시간 이어지면서 이 같은 차이가 발생했다고 소개했다. 16일(현지시간) VN익스프레스에 따르면 최근 한국계 미국인 셰프 크리스 조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한국과 베트남·중국·일본을 비교하면서 한국인의 식사 습관이 주목받았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베트남·중국·일본에선 한 손으로 밥그릇을 들고 다른 손으로 음식을 먹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반면 한국인들은 어릴 때부터 밥그릇을 들어 올리는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배웠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오히려 반대다. 그는 일본에서 밥그릇이나 작은 국그릇을 가슴 가까이 들어 먹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소개했다. 그릇을 식탁에 둔 채 얼굴을 가까이 숙여 먹는 행동을 점잖지 못한 모습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 하지만 한국 전통 식사예절에선 밥그릇과 국그릇을 들어 올리지 않는 것이 권장된다고 설명했다. 밥에 젓가락을 수직으로 꽂거나 연장자보다 먼저 식사를 시작하는 것도 피해야 할 행동으로 꼽았다. 이 같은 규칙은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서 더 중시된다고 강조했다. 다만 최근엔 가정에서 면이나 패스트푸드, 작은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을 경우이 규칙이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식사 습관이 다른 이유로 한국 전통 식사도구인 '수저'를 지목했다. 긴 손잡이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함께 사용하는 방식이다. 숟가락은 밥과 국·찌개를 먹는 데, 젓가락은 고기와 채소·반찬 등을 집는 데 주로 쓰인다. 숟가락이 밥을 입까지 옮겨주기 때문에 굳이 밥그릇을 손으로 들 필요가 적었던 셈이다. 미국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음식 연구 프로젝트 '뿌리키친'을 공동 설립한 정서영 셰프는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습관이 밥그릇을 들어 올리는 행동을 예의에 어긋난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데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다른 음식 접시도 입 가까이 가져오기보다 식탁에 둔 채 먹는 방식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식사의 구성도 영향을 미쳤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과거 한반도·중국의 지배층이 밥과 국을 먹을 때 모두 숟가락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중국 북부에선 약 7세기부터 밀가루로 만든 면·빵이 주식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젓가락 사용이 점차 우세해졌다. 반면 한반도는 밀 재배에 유리하지 않아 곡물밥, 국, 반찬으로 이뤄진 식사 문화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숟가락·젓가락을 함께 사용하는 문화가 수세기 동안 유지됐다는 설명이다. 한국 식탁에선 통상 밥그릇을 왼쪽, 국그릇을 오른쪽에 놓고 반찬은 가운데에 차려 함께 먹는다. 숟가락으로 밥과 국을 먹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번갈아 먹는다. 주 교수는 "한국 식사에선 밥과 반찬, 국의 맛이 서로 어우러진다"고 했다. 금속 그릇도 한몫했다. 과거 한반도의 왕실·상류층은 구리 78%, 주석 22%로 만든 합금 그릇을 사용했다. 튼튼하고 끓는 물로 소독할 수 있지만 열전도율이 높아 뜨거운 음식을 담으면 손으로 들기 어려웠다. 조선시대 들어 금속 생산이 늘면서 놋그릇은 일반 가정으로 확산됐다. 민간에선 밥그릇을 손에 드는 행동을 식탁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나 구걸하는 사람의 모습과 연결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다만 이를 한국인이 밥그릇을 들지 않게 된 핵심 원인으로 입증하는 역사적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물론 이 같은 식사법이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다. 베트남·중국·일본에서도 음식 종류와 가정, 상황에 따라 그릇을 드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이 매체는 한국에서도 일상적인 식사일 경우 작은 그릇을 손에 들고 먹기도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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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전국구 산'에 가려진…산꾼 체력 시험하는 산 [경상도의 숨은 명산 문경 도장산]
정상으로 가는 암릉길은 데크 하나 없는 야생이다. 소나무들은 마치 전설 속 구렁이가 똬리를 튼 듯 자라나고 있다. 영남이 시작되는 고장, 문경.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음속 깊이 품게 되는 곳이다. 조선시대 영남대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둘러싼 웅장한 산세는 문경을 우리나라 최고의 산악도시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 놓았다. 새재를 넘던 옛 선비들의 발걸음이 남아 있는 이 땅은, 지금도 산을 오르는 이들의 마음을 붙잡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백두대간이 문경을 지나며 빚어 놓은 주흘산, 조령산, 희양산, 대야산, 청화산, 조항산, 속리산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5년 전, 주흘산 정상을 밟고 해가 질 무렵 힘겹게 하산했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산이 그저 오르고 내려오는 대상이었을 뿐, 그 속에 담긴 시간과 이야기를 헤아릴 줄 몰랐다. 이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문경새재에서 로프 구간을 지나 신선암봉으로 이어지던 조령산의 아찔한 암릉길과 끝없이 이어지던 긴 데크, 희양산 은티마을 구간에서 마주했던 300m 가까운 직벽의 압도적 존재감, 그리고 대야산 정상에서 붉게 떠오르던 여명까지, 이 모든 순간이 문경이 산꾼에게 건넨 잊지 못할 선물이었다. 산은 오를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 주었고, 문경은 그 얼굴을 가장 다양하게 지닌 고장이었다. 심원사 갈림길부터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이번에는 문경에서도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산꾼들 사이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거친 매력으로 은근히 이름난 도장산을 찾았다. 도장산道藏山은 이름 그대로 '도를 감춘 산'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깊은 계곡과 날카로운 암릉, 울창한 숲속 깊숙이 비경을 숨겨 놓은 산이다. 여름이면 수많은 피서객들이 계곡을 찾아 발을 담그지만, 정작 정상까지 오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계곡의 서늘함에 이끌린 발걸음은 대개 물가에서 멈추고, 산의 진짜 얼굴은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직접 걸어보니 금방 알 수 있었다. 병풍바위를 지나면 시작되는 진짜 오르막 새벽 일찍 부산을 출발해 약 3시간을 달려 문경시 농암면 용추교주차장에 도착했다. 30℃를 훌쩍 넘는 무더위가 예보된 날이었다. 도장산 정상까지 3.3km, 등산 안내판 앞에서 그 숫자를 마주했을 때만 해도 거리만 보면 짧게 느껴지는 산행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처 알지 못했을 뿐 도장산은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도장산은 조선 후기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등장하는 유서 깊은 산이다. 청화산과 속리산 사이에 사람이 살기 좋은 복지福地로, 속리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명당이라 기록되어 있다. 천년고찰 심원사와 십승지 우복동의 이야기까지 품고 있으니, 도장산은 자연과 역사가 함께 살아 숨 쉬는 산이라 할 만하다. 초입에선 발 딛을 때마다 작은 돌이 미끄러지며 쉴 틈 없는 오르막이 이어진다. 가벼운 걸음으로 숲길에 들어서자 힘찬 계곡물 소리가 먼저 반겨주었다. 조금 걷자 사찰의 일주문처럼 우뚝 선 병풍바위가 눈앞에 나타났다. 기암절벽과 계곡물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초입부터 도장산의 품격을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쌍용폭포는 하산길에 들르기로 하고 곧장 정상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곡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더위를 피해 온 피서객들의 웃음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들려왔지만, 우리가 향하는 곳은 계곡이 아닌 정상이었다. 심원사 갈림길부터 본격적인 오르막으로 도장산의 진짜 모습이 시작되었다. 많은 산들이 계단이나 데크를 놓아 등산객의 편의를 돕고 있지만, 도장산은 그런 배려가 없었다. 자갈길과 흙길, 드러난 바위와 나무뿌리가 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후기에 '친절하지 않은 산',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등로', '체력을 시험하는 산'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를 직접 걸어보고서야 온몸으로 이해했다. 능선을 오르면 멋지고 건강한 소나무들을 잔뜩 만날 수 있다. 길은 분명하지만 결코 편하지 않았다. 발을 디딜 때마다 작은 돌이 미끄러지고, 경사는 쉬어갈 틈 하나 없이 이어졌다. 여기에 초여름의 높은 습도와 강한 햇볕까지 더해지자 체력이 빠르게 소진되었다. 모자 아래로 흐르던 땀이 어느새 선글라스를 타고 눈으로 흘러들어, 결국 모자를 벗고 머리띠로 바꿔 쓸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땀이 뚝뚝 떨어지고 숨은 점점 거칠어졌으며, 옷은 금세 흠뻑 젖어버렸다. 여름산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시험대였다. 소나무 숲과 암릉, 능선이 건넨 위로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던 중, 눈앞에 펼쳐진 소나무 군락은 절로 탄성을 자아냈다. 굵고 건강한 소나무들이 능선을 따라 빼곡히 늘어서 있었고,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붉은 껍질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토록 웅장하고 기품 있는 소나무 숲을 마주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감탄은 더욱 컸다. 나뭇가지 사이로 속리산 능선과 문경의 산군들이 얼핏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 짧은 조망이 지친 다리에 다시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도장산 정상. 암릉도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나무와 바위가 서로 뿌리를 얽으며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도장산만이 지닌 독특한 풍경이었다. 우회길이 있는 곳도 있지만, 암릉은 역시 손끝과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 하나씩 넘어서야 제맛이다. 도장산 정상 1.3km 안내판을 마주했을 때만 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30분 넘게 쉼 없이 암릉을 올랐는데 다음 안내판에는 정상 1.2km. 모두가 "어, 이거 뭐야?" 라며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그 아래 떨어져 있던 또 다른 안내판에는 정상까지 30분이 소요 된다 적혀 있어, 다들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거리도 시간도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도장산은 거리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는 산이었다. 봉우리를 하나 넘으면 이제 정상이겠거니 했지만, 그 너머에는 또 다른 봉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한여름의 뙤약볕이 머리 위에서 사정없이 내리쬐고, 뜨거운 지열도 지지 않고 열기를 뿜어내는데 바람마저 잠잠한 숲길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시원한 물 한 모금, 오이 한 조각, 초콜릿 하나로 다시 걸을 힘을 끌어 모았다. 정상에 올라야 비로소 제대로 쉴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다리를 옮겼다. 서로의 거친 숨소리와 등산화가 바위를 밟는 소리가 숲속을 채우며, 각자의 호흡에 맞춰 한 걸음씩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도장산에서 바라본 속리산 능선. 팽팽한 긴장을 풀어준 것은 뜻밖에도 길 한 켠에 핀 주황빛 참나리 한 송이였다. 마치 산객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처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홀로 피어 있어 다소 외로워 보였는데, 나비 한 마리가 친구가 되어 여유롭게 오가며 여름을 노래하고 있었다. 척박한 산비탈에서도 꿋꿋하게 꽃을 피워 낸 모습은 오히려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했다. 정상, 그리고 십승지 우복동의 전설 약 2시간 30분 만에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가쁜 숨을 고르며 휴대용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도장산은 결코 쉬운 여름 산이 아니다. 상당한 에너지와 노고가 필요한 산이다. 정상을 밟아본 사람만이 아는 맛이 있다. 참나리 한 송이가 위안을 줬다. 정상 조망은 거의 없어 휴식 후 심원사 방향으로 하산에 접어들었다. 100m쯤 내려오면 회란석, 헬기장, 서재 방향으로 갈라지는 이정표를 만난다. 심원사로 하산하려면 헬기장 쪽으로 가야 하지만 여기서 서재 방향으로 100m 정도 진행하면 도장산 최고의 전망대가 기다리고 있다. 눈앞에 속리산 능선이 거침없이 펼쳐진다. 왼쪽에는 천왕봉이 우뚝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문장대가 장대한 능선을 드리우고 있다. 여름 햇살 아래 짙푸른 산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그 풍경은 그동안의 오르막이 안겨준 피로를 단번에 잊게 만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느낌이다. 전망을 뒤로하고 다시 하산 길로 접어드니 도장산 일부가 사유지이며 임산물 채취를 금한다는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화북중학교, 화북병천(우복동), 도장산 정상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는 그늘에 쉬고 있는 고릴라 형상의 바위를 만나 웃으며 이름을 붙였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른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잠깐의 담소를 나누고 화북병천(우복동)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득 들머리 안내판에 적혀 있던 <택리지>의 복지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그것이 바로 십승지 가운데 하나인 우복동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분명 마을이 있으나 땅 위에서는 좀처럼 그 길을 찾기 어려워, 마치 소의 배 속에 들어앉은 듯하다 해서 우복동牛腹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전란이 닥쳐도 안전하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사람 살기 좋은 땅이라는 뜻이다. 대야산과 청화산, 속리산 문장대와 도장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이 산촌은 그런 이상향의 조건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압제와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은둔의 땅을 이상향으로 여겼다. 서양이나 중국의 유토피아와 달리 한국의 십승지는 구체적인 지명으로 실재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쌍용폭포. 심원폭포와 쌍용폭포, 여름 산이 건넨 선물 암릉 구간이 이어져 잠시 땀을 닦으며 쉬어가기로 했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온 능선이 온통 초록으로 물든 모습을 바라보니 그 싱그러움에 절로 마음이 상쾌해졌다. 휴식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헬기장에 다다랐다. 심원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도 결코 쉽지 않았다. 급경사와 암릉이 이어져 조심조심 발을 디디며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마주친 고사목 한 그루, 도장산에도 이런 나무가 있었구나 싶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니 그 너머로 문경과 상주, 보은 자락의 산군들이 겹겹이 조망되었다. 힘겨운 하산길이 내어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숲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이윽고 천년고찰 심원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땀에 흠뻑 지친 몸으로 소박하고 고즈넉한 사찰을 잠시 둘러본 뒤, 일주문을 지나 물소리를 따라 심원계곡 방향으로 길을 찾아 내려갔다. 심원폭포. 높이 약 15m, 수심 2~3m의 심원폭포는 숲속 깊이 숨겨진 비밀의 정원 같아, 눈으로 한 번 마음으로 또 한 번 감탄하게 만들었다. 검은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맑은 물줄기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고, 그 아래 소는 한여름에도 에메랄드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수정처럼 맑은 물은 바닥까지 훤히 비추고,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자연이 들려주는 가장 시원한 음악이었다. 울창한 숲과 바위가 햇빛마저 부드럽게 걸러 주어 당장이라도 풍덩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아내가 "쌍용폭포에 가서 마무리하자"며 만류했다. 살갗에 닭살이 돋을 만큼 차가운 폭포수에 손과 얼굴을 씻는 것만으로도 산행의 피로가 말끔히 해소되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도장산에서 꼭 찾아야 할 장소였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아침에 올라가며 지나쳤던 심원사 갈림길이 다시 나타났다. 도장산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나무 데크 하나 없이 오롯이 자연 그대로였는데 쌍용폭포로 가는 길목에서는 뜻밖에도 짧은 데크 계단을 만났다. 그 계단을 밟고 내려서니 쌍용계곡이었다. 심원사. 쌍용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과 기암괴석,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켰다. 계곡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기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쌍용폭포는 심원폭포보다 사람이 많다. 두 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처럼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다만 인파가 많아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계곡 풍경만 눈에 담았다. 거센 물줄기가 바위를 타고 떨어지는 소리는 한여름의 열기를 단숨에 날려 주었다. 그렇게 무더웠던 여름날, 도장산 산행을 마무리했다. 도장산은 화려함으로 승부하는 산이 아니었다. 데크 하나 없는 거친 길, 끝없이 이어지는 봉우리, 땀으로 흠뻑 젖은 옷, 그 모든 인내의 끝에서야 비로소 속리산 능선의 장쾌한 조망과 심원폭포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만났다. 도를 감춘 산이라는 이름처럼, 도장산은 자신의 진가를 아무에게나 쉽게 보여 주지 않는다. 오직 땀 흘려 오른 자에게만 조용히 곁을 내주는 산이었다. 산행길잡이 문경 도장산은 용추교주차장을 출발해 시계방향으로 정상을 거쳐 헬기장~심원사~심원계곡~쌍용폭포를 지나 원점회귀 하는 코스가 대표적이다. 총 소요시간은 약 4시간 30분에서 5시간(휴식과 사진촬영을 포함하면 6시간 정도 잡으면 좋다) 정도다. 용추교를 지나 20분 정도 자갈길을 걷다가 정상까지 오르막이 이어진다. 중간 암릉구간과 전망대가 있어 문경의 산세를 감상할 수 있다. 정상에는 조망이 없으며, 하산 시 헬기장, 심원사 방향으로 이정표에서 서재 방향으로 100m 진행하면 속리산 능선을 볼 수 있는 멋진 조망 터가 있다. 헬기장방향으로 하산하면서 우복동 마을과 멋진 소나무와 건강한 소나무, 걸어왔던 능선을 볼 수 있다. 헬기장을 지나면 급경사 구간으로 조심해서 내려 와야 한다. 소박하고 고즈넉한 심원사 경내를 구경한 후 심원계곡에서 휴식을 취하고 쌍용계곡도 들렀다 오면 산행이 종료된다. 교통 대중교통이 매우 불편하다. 점촌터미널로 이동한 뒤 여기서 택시를 타고 접근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약 35분, 택시비는 4만 원쯤 든다. 자차로 갈 경우 내비게이션에 용추교(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산86) 혹은 도장산 입구(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청화로 396) 검색. 맛집(지역번호 054) 온천 약돌한우돼지 정육식당(572-5710)은 문경의 지역특산물인 약돌한우, 약돌한돈을 부담 없는 가격으로 맛보기 좋은 정육식당이다. 약돌은 다른 말로 거정석이라고 하며 이를 섞은 사료를 먹여 키운 가축은 다른 것보다 식감이 쫄깃하고 특유의 냄새도 없어 건강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고기를 고른 후 상차림비(1인 6,000원)를 내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다. 고기와 곁들일 간단한 찬이 나오며, 부족한 쌈채소는 셀프바에서 추가로 이용할 수 있다. 문경약돌돼지 참나무장작구이(571-4625)도 황토 가마 초벌구이로 촉촉하고 고소한 육질의 깊은 맛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이다. 송내촌 산나물밥(555-4431)은 한우와 나물이 어우러진 요리가 별미로 소문난 곳이다. 대표 메뉴는 산채육회비빔밥이며 문경산신령비빔밥, 발효산나물밥, 산채육회, 산채발효수육 등도 맛볼 수 있다. 내부에 단체석이 마련되어 있어 각종 모임을 하기 좋다. 문경산중에(571-7972)는 제철 로컬푸드로 만드는 비빔밥이 맛있는 곳이다. 1인 2만2,000원. 신선한 산나물로 담백하고 깔끔하게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렸다. 문경 산천송어(555-9594)와 송정송어장 본점(552-4879)은 흙냄새나 비린내 없이 신선한 송어회를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얼큰한 송어매운탕도 일품이다. 산천송어는 송어회 1kg 4만 원, 1.5kg에 6만 원. 송정송어장은 송어회 2인분에 3만5,000원.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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